메이지 시대 당시에 일본 지식인 계층들은 대부분 탈아론, 서구화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다이쇼 시대로 넘어가면서는 이와 함께 자유주의 사상이 발달하였는데 이처럼 근대 일본 사회의 분위기는 비록 아시아주의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식인들과 관료 같은 엘리트 집단들은 번벌 정치 세력이든 자유민권운동가든 상관 없이 대체로 서구적인 근대 국가를 지향했었다.
그러나 다이쇼 시대가 저물고 쇼와 시대가 오면서 혼란을 틈 타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을 흔히 '쇼와 유신'이라고 불리는데 쇼와 유신의 이념적 기반을 만든 대표적인 인물로는 기타 잇키와 오카와 슈메이가 있다. 먼저 기타 잇키라는 인물은 국가주의 운동에도 적극 뛰어들기도 했으며 당시 국가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뚜렷한 신념과 이론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기타 잇키의 사상은 그가 쓴 <국가개조안>이라는 책에서 잘 나타는데 간단하게 그의 이념을 얘기하자면 사회주의[1]와 아시아주의(탈구입아), 국가주의, 군국주의 등이 결합해 나타난 형태라고 볼 수가 있다. 국가개조안에 나온 주장들을 살펴보면 대충 산업 국유화, 화족제 폐지, 계엄령 시행, 토지개혁, 사유재산권 제한 및 계획경제화, 천황의 힘을 이용한 헌법 정지 등이 나와있는데 기타는 저런 국가개조 정책을 일본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펼쳐서 내지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며 완전한 내선일체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이러한 개조 작업을 통해 일본의 부국강병을 이뤄낸 후에는 외부로 나아가서 영국과 미국 등의 서구 열강에게 맞서 싸워서 아시아 전체를 해방시켜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재밌는 것은 기타 잇키의 이념은 황도파[2] 청년장교들의 경전이 되었는데 정작 기타 잇키 본인은 천황을 자신의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었기에 2.26 사건 실패 직후 총살될 때 다른 인사들과는 달리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는 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타는 분명 사회주의자였지만 혁명의 주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닌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카와 슈메이도 기타 잇키와 함께 쇼와 유신의 주역으로 손 꼽힌다. 오카와 슈메이는 서양화와 대결해 정신적으로는 일본주의, 국내 경제는 사회주의 계획경제, 외교적으로는 만주와 몽골을 지배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졌는데 이는 국가개조론자인 기타 잇키 뿐만 이사와라 간지나 도조 히데키 같은 관동군, 통제파[3] 장교들과의 생각과도 일치했다. 오카와 슈메이는 그래서인지 5.15 사건에 연루되어 9년 형을 받고 3년간 복역한 후 출소했지만 그럼에도 태평양전쟁 발발 전후로 대동아공영권을 홍보하며 앞장섰다. 결국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도쿄전범재판에 기소되었지만 재판 과정에서 도조 히데키의 뒤통수를 손으로 때리는 등의 기행을 저질러서 정신장애 진단을 받아내 재판에서 빠져나갔다.
어쨌거나 기타 잇키와 오카와 슈메이의 독특한 사상(?)은 혼란기 일본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니시다 미쓰기를 중심으로 한 청년장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기타 잇키, 오카와 슈메이 등의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영향을 받으며 정당정치가들과 기성재벌, 화족 계층에게 적대하고 테러와 쿠데타 같은 폭력적이고 과격한 수단을 통해서 뒤엎고 국가개조를 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3월 쿠데타 음모와 혈맹단 테러 사건, 5.15 사건, 그리고 2.26 쿠데타 사건에서 실제 행동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목표는 거창하지만 성공 이후에 할 대책이 전혀 없었고 열정은 쓸데없을 정도로 넘쳐났지만 이성적인 판단력은 많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또한 황도파 내에서도 육해군 대립 때문에 해군 청년장교들과 육군 청년장교들의 사이는 좋지 않았으며 실제로 5.15 사건 때 해군 청년장교들은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뿐만 아니라 육군 청년장교들의 리더인 니시다 미쓰기도 죽일려고 했다. 해군 청년장교들이 니시다를 싫어했던 이유로는 크게 두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이 계획이 육군 청년장교들이 가담하지 않았던 것을 그의 책략이라고 판단했으며 두번째는 니시다가 정보를 누설하면서 계획을 방해하고 있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청년장교 운동을 지원하는 민간 지식인들의 분열도 커다란 문제였다. 사쿠라 회가 주도한 10월 쿠데타 음모가 헌병대에게 발각된 것은 다나카의 수기에 의하면 기타 잇키와 니시다 미쓰기는 입헌정우회에게 오카와 슈메이는 천황 측근에게 정보를 누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기타 잇키와 오카와 슈메이가 서로 동상이몽을 꿈꾸며 쿠데타를 계획한 것이었으며 거기다가 이 사건 이후로 계획에 동참한 참모장교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었다고 생각한 청년장교들은 그들과 결별해버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군 고위층의 확고한 지지가 중요한데 이 일 이후로 황도파 세력은 고위층의 확고하고 통일된 지지를 받지 못했고 그게 청년장교 운동의 실패 요인 중 하나였다.
결국 최후의 발악으로 황도파 청년장교들은 2.26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천황은 오히려 진압을 명령했고 졸지에 그들은 황군에서 반란군으로 신세가 바뀌었다. 병들과 부사관들은 투항 후 원대복귀 조치가 되었으며 계획을 주도한 청년장교들 중 일부는 자결했지만 상당수는 총살되었다. 이때 기타 잇키도 2.26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는데도 붙잡혀서 처형당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살아있는 한 그의 사상이 계속 영향을 끼쳐서 비슷한 일들이 반복될 수 있기에 미리 죽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황도파 청년장교 운동과 쇼와 유신은 처음에는 열정이 넘쳤지만 끝은 허무하게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주장은 훗날 일본 군부 체제에 적극 수용되었다. 통제파 세력이 중심이 된 군부는 혁신관료 및 신흥기업가 같은 테크노크라트 집단과 연합해서 정치권력의 중심이 되었으며 경제는 통제적인 계획경제로 바뀌면서 일본은 하나의 완결적 생활권과 국민경제를 갖춘 고도국방국가로 변화해갔다. 또한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동남아 침공과 태평양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기타 잇키와 오카와 슈메이가 원하던대로 일본은 서구 열강과의 전쟁까지 치르게 되었다.
이처럼 비록 황도파 청년장교 운동과 쇼와 유신은 실패로 끝났지만 결과적으로는 다른 의미로는 성공하게 된 독특한 케이스라는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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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히는 마르크시즘적 공산주의보단 국가사회주의(State socialism). 국가사회주의는 독일의 사회주의자인 페르디난트 라살레가 주장한 것으로 국가 권력을 통해서 사회주의를 실현하자는 내용의 이념이다. 이게 나온 이유는 19세기 시절 초창기 마르크시즘은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소멸을 지향했기 때문이며 실제로 마르크스는 생전에 라살레의 사상을 반대했다고 한다.
다만 20세기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공산주의 이념의 주류가 되면서부터는 사실상 국가사회주의 범위 안에는 들어가게 되었다. 또 여담이지만 국가사회주의는 National socialism, 즉 나치즘이라고 잘못 번역된게 자주 보이던데 국가사회주의에서의 '국가'는 State이지 Nation이 아니기에 State socialism은 나치즘은 아니며 National socialism은 국가사회주의보단 민족사회주의로 번역하는게 더 맞는 표현이다.
[2] 황도파는 국가주의, 전체주의, 집산주의, 대외팽창주의를 추구하는 정치 체제를 수립하려고 한 청년장교 세력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기존 정당정치가들과 기성재벌, 부패 관료들을 척결하고 천황이 중심이 된 국가를 만들어 국가개조를 한 뒤 적극적인 대외 진출을 해 서구 열강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폭력적인 수단을 지나칠 정도로 마구 사용했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 군부 내에서도 과격파 집단에 속했었다. 그러나 2.26 사건의 실패로 사실상 몰락했으며 그 후로 일본 군부의 주도권은 통제파 장교들이 가져가게 된다.
[3] 통제파는 황도파에 비해 군내의 법률통제의 의미로부터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며, 황도파와는 다르게 확실한 지휘 체계가 존재하지 않고 초창기 핵심이었던 나가타 데쓰잔도 군내에서의 파벌 행동은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비 황도파 계열의 느슨한 연합체 파벌 정도로만 여겨지기도 했었다.
다만 나가타 데쓰잔이 죽고 2.26 사건으로 황도파가 와해되자 통제파는 권력을 잡았고 그러면서 점점 정부 문제에 개입하더니 고노에 후미마로가 총리에 취임한 후부터는 아예 일본 제국의 실세가 되어버렸다.
* 참고 자료:
- 한상일 <쇼와 유신>, 까치, 2018
- 에드워드 베르,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2002
- 권성욱 <중일전쟁: 용,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2014
- 마쓰모토 겐이치 <기타 잇키>, 교양인, 2010
* 3편은 '쇼와시대로의 변화(3): 군부 체제와 테크노크라트 그룹'이라는 제목으로 1930년대 말부터 1945년 패전까지 일본을 이끌던 정치권력 계층에 대한 자세한 부분을 작성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