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잊어버린 아이들
칼 세르만 지음, 장혜경 옮김 / 푸른숲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어렸을 때 삼촌과 함께 사는 친구들을 한참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친구들 집에 놀러 갔다가 그 삼촌들의 방에 들어가면 항상 신기한 물건들이 즐비했고 친구는 자기가 마치 그 삼촌인양 함부로 만지지 말라며 어찌나 유세를 부리던지... 하지만 그보다 더 부러웠던 것은 그네들의 삼촌이 해 준 얘기, 삼촌이 써 준 편지 같은 것들이었다. 동화책 속의 한 장면처럼 나란히 소파에 앉아 조카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풍경이라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서점에 갔다가 이 책의 저자후기를 읽는 순간(책을 사기 전 나는 항상 표지에 적힌 글은 물론 저자후기와 (역서인 경우) 역자후기를 꼼꼼히 살펴보는 편이다) 어렸을 때의 그 기억이 떠올랐다.


책을 쓴 칼 세르만은 자신이 대부(代父) 노릇을 하고 있는 친구의 딸 알레나에게 날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신기하고 재미난 이야기들을 들려줬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난데없이 알레나가 그 이야기들이 모두 진짜냐고 물었다. (솔직한 건지 냉정한 건지) 세르만은 물론 아니라고 대답했다. 알레나가 실망했을 것은 자명한 일! 그러나 세르만은 여느 어른들과는 달랐다. 대녀(代女) 알레나를 위해 정말로 세상의 진귀한 이야기를 찾으러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대단한 열정과 사랑이다. 단순히 자신의 흥미나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 그것도 남의 아이를 위해 그런 일을 벌일 정도의 사람이라면 한번 믿어 봐도 되겠구나 싶어 책을 샀다. 그리고 역시 그 믿음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 책에는 서른 가지 다른 빛깔을 띤 아이들이 등장한다. 아빠를 잃고 엄마와 함께 농장(사실 농장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작지만)을 꾸려 나가는 아이도 있고, 노벨문학상을 노리는 꼬마 작가도 있고(이 아이가 쓴 소설은 정말 어린아이가 썼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기발하고 재미있었다), 물개들에 둘러싸여 자연과 함께 사는 아이도 있고, 학교에 가고 싶은데 집안이 가난하자 절의 행자 노릇을 하며 승원에 다니는 아이도 있고... 그렇게 시간도 이 아이들을 잊고, 아이들도 시간을 잊고 저마다 행복한 삶을 꿈꾸며 사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특히 아이들의 삶을 그리는 데 자신의 시각을 너무 깊이 드러내지 않는 저자의 태도(이것이 내공이라는 것이 아닐까)와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도 해맑은 아이들과 그 가족의 모습을 절묘하게 포착해낸 사진(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 바로 세르만의 친구이자, 알레나의 아빠이다)은 이 책의 가치를 더욱 값지게 한다. 오랜만에 가슴 가득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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