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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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숙과 어머니>

어머니가 나를 낳았을 때, 할머니는 사위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 , 그리고 딸. 아들을 바랐던 적은 한 번도 없던 아버지였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한사코 미안하다고 말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갓 태어난 자식이 딸이라는 사실에 실망하지 않았다. 딱히 아들을 바랐던 적도 없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아니었나 보다. 그들은 다음에는 아들 낳으면 되지’, 혹은 아빠가 외롭겠네, 아들 하나 낳아야지하는 등의 이야기를 조언이랍시고 해댔다. 아니, 우리 아버지가 외로운 걸 왜 댁들이 걱정하나요? 자식 하나 더 낳으면 우리 어머니 몸은 누가 챙겨 줄 건데요? 나는 목구멍까지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며 그저 웃었다. 어머니, 아버지, 두 언니 중 누구도 나에게 이라는 이유로 내색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나는 눈치를 봐야했다.

아버지의 친척들은 모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니까, 큰 아버지 댁에 모이면 딸이라곤 우리 셋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는 식사 때에 우리끼리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가만 보고 있지 않으셨다. 숟가락, 젓가락 같은 작은 것이라도 나르라고 하였다. 오빠들이 큰 상을 펼치고, 옆에 둥그런 작은 상을 펼치면 우리는 셋이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저들끼리 떠들다가, 밥을 먹을 때가 되면 숟가락, 젓가락을 상에 올려놓고 밥그릇, 국그릇을 나르곤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남자들은 큰 상에, 우리와 어머니들은 작은 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어머니들은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곤, 둘러앉아 화투를 치고 있는 아버지들에게 예쁘게 깎은 과일 안주와 맥주를 갖다 주었다. 우리에게, 어머니들에게, 아버지들에게, 이러한 명절의 분위기와 풍경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외할머니 댁에서는 어머니의 형제들이 모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모두 저마다의 명절을 지내고 마지막에 들러 하룻밤 자고 갈까 했기 때문이었다. 큰 이모, 작은 이모, 어머니 셋이서 외할머니 댁에 모이는 것은 따로 시간을 내어야만 가능했다. 나와 언니들은 우리도 결혼하면 지금처럼 붙어있지는 못하겠구나, 하고 서로의 소중함을 가끔 다시 생각해보곤 했다.

 

<김지영과 나>

나는 초등학교를 나왔고, 김지영은 국민학교를 나왔다. 김지영이 졸업하고 나서 나는 꼬박 10년도 더 뒤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도 나는 김지영이 겪은 경험을 공감한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초등학교는 변해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며칠 전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같이 알바를 하는 남자가 일을 하는 데 했던 말을 전해주었다.

그쪽은 여자치곤 참 당차네요.’

친구는 여자치곤 이라는 말이 참 싫었다고 했다. 딱히 대꾸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남자는 사장님, 다른 알바생이 있는 곳에서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씨는 얼굴도 예쁘고 일도 잘하는 데 사람 말을 무시하네.’

뭐라고 대답해야 했을 까? 그쪽은 남자치곤 말이 많네요? 친구는 애써 웃으며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그리곤 나에게 너무 답답하고 싫다고 토로했다. 나 또한 그 남자 알바생에 대한 현명한 대처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말하는 내 자신이 참 씁쓸했다.

이대녀, 된장녀, 김치녀. 몇 십년 전부터 시작된 여성을 향한 혐오가 담긴 단어들은 아직도 사회 속에 아무런 제재도 없이 존재한다. 여자치곤 ~하다, 는 말은 칭찬으로 포장되어 쓰이고 있다. 나도, 어머니도, 친구도, 82년생 김지영 씨조차도, 처음부터 사회에 만연한 이 문제를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생활 속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있는 여성에 대한 차별을 우리는 점점 깨닫고 있다. 지금 문제를 의식하는 이들도 이 책을 통해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의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의식, 인식들이 모여 변화의 첫 발자국을 내딛도록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앞으로 10년 뒤, 혹은 더 이른 시간 뒤의 초등학생들은 김지영 씨, 그리고 나와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자치곤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씁쓸한 심정으로 침묵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이런 시절도 있었다며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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