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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라임오렌지나무
J.M. 바스콘셀로스 원작, 이희재 만화 / 양철북 / 2019년 11월
평점 :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어린 시절 읽었던 책들 가운데서 아직도 이름이 기억나는 손에 꼽히는 책들 중 하나가 바로 이 책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입니다.
추억 속 그 책이 만화 버전으로 출판되어 아이 손에도 들려지게 되었어요.
처음 책을 보고는 선뜻 손이 가지 않더라고요.
막 사춘기에 접어들 시기, 감수성이 충만한 때에 만났던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는 '눈물', '슬픔'으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표지와 제목만 보고도 그 때의 감정이 치밀어 올라 딸아이가 다 읽고 나서야 책장을 넘겨 보았습니다.
아무 사전정보 없던 딸아이는 만화책이라는게 마음에 들어서인지 단숨에 읽어나가는데, 뒤통수에 대고 한마디를 해줬죠.
"그거 엄청 슬퍼, 눈물이 많이 날 거야"
그리고 읽는 중간 중간 계속 "우는거야?" 라고 물으며 아이의 상태를 지켜보았어요.
지금 딸아이의 나이에 엄마가 느꼈던 슬픔의 무게가 너무 커서 자칫 아이 또한 그럴까 걱정이 되어서요.
하지만 염려와 달리 아이는 시크하게 "마지막에 눈물이 나더라" 하며 책장을 덮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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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와의 세대차이를 확인하며 수십년이 지나 다시 만나게 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그렇게 읽기 시작했습니다.

만화로 표현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다시 읽는 일은 여러가지 점에서 어린 시절 소설로 읽었던 것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더라고요.
먼저 주인공 제제의 외모를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되었지요.
라임 오렌지 나무와 대화하며 슬픔을 나누었던 제제를 여리고, 약한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희재의 이번 책에서는 장난 악마가 씌었다며 집에서 뿐만 아니라 동네에서도 골칫덩어리 취급당하는 주인공 제제가 잿빛 피부에 못말리는 꼬마 악동으로 그려져 있거든요.
그리고 너무 어려 아직 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할 꼬맹이가 그렇게도 심한 매질과 학대를 당하는 것을 그림으로 보니 더욱 참담한 기분이 들었어요.
이처럼 이미지의 힘은 매우 커서 활자로 읽을 때보다 제제에게 더 빠르고, 깊게 감정이입이 되더라고요.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도 저보다 어린 동생과 놀아주고, 먹을 걸 챙기는 기특한 모습을 보이고,
맨날 빈꽃병을 바라보는 선생님이 안쓰러워 꽃을 선물하려는 마음을 먹는 걸 보면서는
제제가 얼마나 놀랍고, 사랑스러운 아이인지 깨닫게 됩니다.

어리고, 가난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이지만 아이는 마음 한 구석의 따뜻한 심성을 잃지 않고, 당차고 똘똘한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제제를 진심으로 대하고, 가까워진 몇 안되는 사람들- 글로리아 누나, 거리 악사 그리고 뽀르뚜가 아저씨- 만이 제제안에 숨겨진 보석들을 발견합니다.
어렸을 때는 제제와 라임 오렌지 나무의 우정만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제는 제제 곁을 지켜준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마음이 끌리네요.

물론 가난과 학대로 몸도 마음도 상해 있을 때, 밍기뉴가 제제의 영혼을 어루만져 준 것이 사실이지만,
제제가 굶은 배의 허기를 채우고, 자신이 원하는 걸 해 볼 기회를 얻고, 깊은 위로의 포옹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제제 곁에 있었던 따뜻한 마음의 사람들 덕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라임 오렌지 나무가 잘렸을 때가 아니라 제제가 뽀르뚜가 아저씨의 죽음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어른이 된 제제가 어린시절 철이 일찍 든 자신을 회고하는 장면에서 눈시울을 붉히게 됩니다.
그래서 같은 책을 시간을 두고 여러번 읽어야 한다고 하는가 봅니다. 열 두 살의 나와 마흔 줄의 나는 그 동안 변한 외모만큼이나 달라져서, 책에서 얻는 감동과 여운 역시 사뭇 달라진 걸 느끼게 됩니다.
부모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면 아이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아이의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제제를 그냥 못말리는 악동, 더없는 장난꾸러기 취급만 했다면 제제가 따뜻한 심성을 가지고 다른 아이를 돌보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거든요.
제제의 숨겨진 고운 심성을 발견하고, 칭찬하고, 감동했던 사람들이 제제를 어루만져주지 않았다면 제제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걸 즐거움으로 사는 망나니로 자라지 않았을까요?
자신처럼 부모에게 두들겨 맞고, 배고픈 아이를 찾아 위로하며 빵을 사먹이는 제제의 모습을 보면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아이들의 미래를 속단하는 일은 정말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처참했던 유년의 기억을 뒤로하고 멋진 인생을 살아가는 제제의 인생역전 스토리를 보며 아이를 어떻게 길러가야 할지에 대해서도 지혜를 얻게 됩니다.
12살 나이에 만난 제제가 어린 인생에 선물을 안겨주고,
세월이 흘러 또 다시 새로운 선물을 안겨줍니다.
아이들에게만 읽힐 일이 아니라 엄마도 아빠도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전에 몰랐던 숨은 보석들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실 거에요.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