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는 흔히 Cogito Ergo Sum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한 마디가 유명하다. 그는 중세 천년의 신학의 시대에서 인간 중심의 철학과 과학의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었고, 그는 근대 철학의 시조가 되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자연을 이성의 도구이자 다루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자연을 착취하는 근대화의 시초가 되었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리고 지나친 이성 중심과 객관화, 몸과 정신의 이원론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데카르트에 대한 오해를 풀고자 데카르트 최후의 저작 <정념론>을 읽게 되었다.

 

 <정념론>에서 '정념'이란 영혼 안에 있는 것이지만 몸에 의해 야기된, 지각과 감정과 영혼의 동요 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정념은 이성보다 더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견해다.

데카르트 하면 이성의 대명사인데, 실제로는 이성만을 중시한게 아니라 정념과 감성의 역할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이원론을 추구하는 영역은 신학과 존재론의 구분을 전제하는 형이상학의 영역이다. 그는 몸과 정신이 하나라고 여겼던 것이다.

 

주요한 정념으로는 경이, 사랑, 미움, 욕망, 기쁨, 슬픔 등 여섯 가지고 있고, 다른 정념들은 여섯 가지의 조합이거나 비슷한 부류라고 한다.

이 중에서도 욕망에 관심이 갔다. 다른 정념들은 현대인들이 잘 통제하는 것 같지만,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은 통제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러한 욕망에 대해서, 데카르트는 한 마디로 정의한다.

'영혼의 흔들림'.

하지만 그는 모든 욕망을 나쁘게 보는 염세주의자는 아니다. 좋은 것을 추구하는 욕망을 긍정하고, 좋은 것에 대한 추국와 나쁜 것에 대한 도피가 하나의 욕망으로 연결되는 것이 정념이라고 한다.

 

또한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사랑의 일그러진 형태가 질투이다. 질투는 누군가를 소유하고 있다는 걸 상상하는데서 시작한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잘못된 태도이다.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이 책의 결론은 "삶의 모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오직 정념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정념에 의해 크게 감동받는 경우도 있지만, 정념을 잘못 사용할 경우도 있다. 이러한 정념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지혜라 할 수 있다. 정념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숙고와 근면을 제시했다. 바른 생활을 통한 영혼의 건강함을 추구했던 것이다.

 

본인은 동양철학 전공자인데, 데카르트의 이론이 조선시대 학자들과도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선시대 학자들은 사단이 이(理)에서, 칠정이 기(氣)에서 발한다고 하며, 사단의 선한 감정이 오욕칠정의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는 관조와 절개를 추구하는 반듯한 마음가짐과 몸가짐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개인적으로 조선의 유학을 연구하면서, 데카르트라든지 스피노자와 같은 정념의 철학자들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전체적인 느낌은, 대개의 서양철학 번역본은 어렵지만, 이 책을 비롯한 데카르트의 저작들은 평이한 에세이체로 쓰여져 있어 읽기 편하다는 것이다. 물론 맥락이 분명하지 않은채 잠언 형태로 되어 있어, 맥락을 추정하며 읽어야 했다.

그래도 번역자의 번역이 깔끔해서 단어가 어렵거나 문장이 이해 안 되는 경우는 없었다.

요즘같이 철학 고전이  외면받는 시대에 서양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의 저작의 출판은 반가운 일이다.

한국에는 서양철학이 칸트와 헤겔의 독일 관념론부터 유입되기 시작해서, 지금은 다양한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의 저서가 번역되고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 스피노자, 파스칼, 라이프니츠 같은 17세기 서양철학자들의 저서도 독일 관념론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는데 기초가 될 것이다. 앞으로도 이들 철학자들의 책이 많이 출간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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