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 추억을 잃어버린 모든 이에게 우리시대 대표 문인들이 전하는 특별한 수업 이야기
김용택.도종환.양귀자.이순원 외 지음 / 황소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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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명의 문인들이 들려주는 수업은 나의 학창시절과 스승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기분좋고 즐거운 장면 보다는 얼굴이 새빠개질 정도로 부끄럽고 죄송한 기억들이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야간자율학습을 땡땡이 치거나 수업시간에 휴대폰 게임을 하고, 도시락을 까먹은 일들. 그때는 "조용히 해라"라는 선생님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죄송스러운지. 아마 선생님들은 "요즘 학생들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라며 한숨을 푹푹 내쉬지 않았을까.

철없던 시절엔 이해하지도,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던 선생님의 말이 이제서야 하나 둘 깨우침을 주는데 그건 문인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들이 떠올린 특별한 수업과 선생님의 모습은 내가 겪은 일과 비슷하기도 하고 때론 특별했다.

책은 1,2부로 나뉘어졌는데 개인적으론 1부가 더 쉽게 읽히고 기억에 오래 남았다. [삼오식당]으로 내게 익숙한 이명랑 작가는 고 2때 만난 미술 선생님을 추억한다. 그녀는 그림을 그릴때 한번도 '잘 그린 그림'에 뽑히지 못했다. 선생님이 칭찬하는 그림은 누가 봐도 예쁜 그림 이었고, 이명랑씨의 그림은 그 기준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 원하는건 하늘은 파랗고 나무는 우뚝 서 있고 잎은 풍성하고 초록빛을 머금은 그림이었다. 하지만 이명랑씨는 왜 하늘은 꼭 새파랗고, 나무는 잎이 풍성해야 하는지 이해할수 없었다. 모든 학생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예쁜 그림을 그려야만 하나?

이런 의문을 가지며 그녀는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걸 표현했지만 매번 안 좋은 소리를 들었고, 급기야 한 선생님은 "네 마음이 비뚤어져서 그런 그림이 나오는거야"라는 말까지 한다. 아마도 그 선생님은 수업 종이 치자마자 자신이 한 말을 잊었을 테지만, 한 소녀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쉽게 잊히질 않았다. 

하지만 고 2 때 만난 미술선생님은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지만 내 눈에는 보이는거, 그걸 그리는게 진짜 그림이야"라는 말을 해주고 그녀의 그림을 칭찬해준다. 그 선생님의 말이,보여준 행동이 한 소녀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는 것을 우리는 알수 있다. 학창시절에 선생님의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할수 있다. 아이들에게 부모님외에 자주 접하게 되는 어른은 바로 교실에서 만나는 선생님 이니까.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미래가 바뀔수도 있다는걸 감안하면, 미술선생님은 꼭 와야 할 시기에 이명랑씨에게 나타난 셈이다.

언제나 강해보였던 노처녀 선생님의 느닷없는 '눈물의 기도'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무게를 느끼게 해줬고, 특별한 문학 수업을 갖게 해준 선생님을 닮고 싶었던 조해진씨의 사연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단 한명의 학생에게라도 영향을 주고 롤모델로 꼽히는 선생님은 참으로 행복할 것 같다. 비록 자신은 완벽하지 않다고 여길지라도, 그래서 부끄러워 지더라도 말이다. 

권태현 작가의 사연은 입시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씁쓸한 이야기지만 오로지 내신 1등급을 위해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점수와 연결되지 않는 과목은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세상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교육은 없거늘, 우리의 교육현실은 학생들에게 비인기 과목이 있다는걸 가르친다. 나도 그랬고 교육현실이 바뀌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쭉 그럴 것 이다. 음악,미술,체육 수업에 영어 단어를 외우고 문제집을 풀고,가장 중요한 고3 때는 아예 자습시간이 되는 풍경 말이다. 나중엔 비인가과목 수업 시간은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분위기 였고, 간혹 수업을 하려는 선생님이 있으면 여기저기서 볼멘 소리가 나왔다. 

권태현 작가의 학창시절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체육 시간엔 여러 핑계를 대며 빼 먹었고 불필요한 시간이라고 여겼다. 그런 상황에 화가 났는지 선생님은 아이들을 철봉대 앞으로 불러세웠고, 제대로 하는 이가 없자 "철봉대를 붙잡고 울어본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 말이 아이들의 가슴에 크게 와닿기 보단 웃음을 유발한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모의고사 점수가 낮아 우는 아이들에게 철봉때문에 운적이 있냐니. 하지만 권태현씨는 오랜 시간이 지나고 사회의 쓴 맛과 미래에 대한 고민때문에 방황하던 시기에 그 말이 지닌 의미와 무게를 알아차린다. 내게도 그 말이 뜨겁게 다가온다. 나 역시 10대 시절에 저 말을 들었다면 웃어버렸겠지만, 지금은 웃을 수가 없다.

김종광 작가가 떠올린 세가지의 추억은 서글프고 안타까웠다. 특히 수학시간에 친구의 답을 채점하고 그에 따라 채벌이 행해지는 모습은 비인간적 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내가 학생일때도 체벌이 흔했고 수학,영어 단어 틀린 갯수에 따라 맞으며 공부를 했었다. 가끔은 사랑의 매가 아니라 선생님의 분풀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썩 좋은 기억은 아니다. 그런데 김종광 작가의 이야기는 훨씬 강도가 쎘고 무섭기까지 했다.  

그는 이제 학생이 아니라 교단에 서는 선생님이 되었고, 한 학생에게 분필지우개를 던져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긴 힘든 건,수업의 반을 '조용히 해라'라는 말을 해야하는 선생님들의 고충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도 의도치않게 벌어진 사건을 통해 학생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미안함과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을 것이다.

김나정 작가의 '걸레 좀 가져와라'는 나의 초등학교 4학년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는데 평소 무섭기로 소문난 선생님 덕분에 상황을 모면하게 된다. 그 과정이 안쓰러우면서도 표현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났는데(선생님이 대걸레를 가져오라고 시키자 자신을 때리려는 줄 알고 제일 약한 녀석으로 골랐다는 부분처럼), 이 작은 아이가 겪었을 심적 고통이 느껴져서 꼭 껴안아주고 싶었다. 선생님의 현명한 대처로 그녀는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됐고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는 사연이었는데 문득 옛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 4학년때 우리 반 여자 반장은 군기를 꽉 잡고 있었다. 반장도 여러번 했고 카리스마도 있어서 아이들이 잘 따랐지만, 그건 무서웠기 때문도 있었다.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고 덩치도 작았지만 이상하게도 반장의 말은 곧 법 이었다. 반장의 눈 밖에 난 아이들은 왕따를 당하고 피해를 봤지만 아무도 반항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반장에게 심부름을 시켰고, 그 사이에 반 아이들에게 반장의 행동에 대해 물었다.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를줄 알았는데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두려워 말을 못했던 아이들은 하나 둘 피해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고, 반장이 돌아오기까지 계속됐다. 그때의 조용하지만 뜨거웠던 교실 분위기는 지금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그 후로 선생님과 반장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반장이 행동이 달라졌고 아이들과 잘 지냈던걸로 기억된다.  

지금 생각하면 반장이 뭐가 그렇게 무서웠을까 싶기도 한데(꼬맹이들에게 권력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냐만) 어린시절엔 이 작은 교실이 세계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친구들의 관계는 어른의 세계보다 더 중요하고 힘의 균형 싸움도 꽤 치열했다. 그 세계를 균형있게 유지시켜주고 바른 길로 가게 해주는게 선생님의 또 다른 역할 같다. 한명 한명 관심을 가져주고 전체를 바라볼줄 아는 시선을 가져야 한다. 고등학교 시절엔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걸 안다. 학원 선생님보다 학교 선생님의 자리가 더 어렵고 중요한 것 처럼 말이다.

때론 누군가의 말과 행동이 다른 이에게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런면에서 한창 자존심도 강하고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예민한 시기에 만나는 선생님은 그래서 중요하다. 물론 교단에 서 있는 선생님 말고도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다양한 선생님과 수업을 배우게 된다. 그렇게 인간은 끝없는 배움의 길을 가고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잊지 못할 수업이 있을테고,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의 그 순간은 언제였는지를 곰곰히 생각하고 떠올려 봤다. 괜스레 가슴이 저릿저릿하고 아픈건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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