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소녀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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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낯선 나라인 과테말라. 그곳에서 오랫동안 벌어진 내전을 난 알지 못했다. 뉴스를 통해 몇번 본적은 있지만 관심을 두지 않았고 한귀로 흘려보냈었다. 그러다 이 책을 읽고나서야 그 끔찍한 전쟁에 대해 자세히 알게됐고 온 몸에 소름이 돋을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사소한 일에 불평하고 불만을 쏟아내는 동안 과테말라에선 인종청소와 함께 죄없는 목숨이 사그라들고 있었던 것이다. 36년 이라는 긴 시간동안 벌어진 전쟁. 지구는 또 하나의 전쟁을 통해 많은 피와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평화 라는 말은 단지 이상주의자들이 하는 말일까. 동화책 속에서만 발견할수 있는 단어인걸까. 전쟁에 관한 기록을 볼때마다 '인간은 대체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지 못하는걸까'라는 자괴감이 밀려든다. 희망의 씨앗이 싹 틔는 모습을 발견하면 무참히 짓밟고 파괴와 탄압이라는 씨를 뿌리는 그들. 이성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살육과 약탈만이 가득한 그곳. 바로 거기에 나무소녀가 있었다. 보지 않아야 것을 보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고, 경험하지 말아야 할 일을 겪었다. 너무도 끔찍하고 잔인해 눈을 질끈 감아버리게 만드는 그 모든것을 겪어야만 했다. 

작가는 말머리에 "하기 힘든 이야기를 용기를 내어 들려준 실제 나무소녀에게 이 책을 바친다. 나무소녀는 과테말라에서 어느 길고 긴 밤, 안전한 장소에서 많은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라고 적었다. 한 소녀가 용기있게 증언해 준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우리는 똑똑히 볼수있게 되었다. 그것은 충격과 비극의 아수라장 이었다. 

나무소녀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진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살림이 풍족하진 않았지만 사랑하는 부모님과 오빠, 동생들이 있었기에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나무소녀가 살고있는 마을은 부귀영화를 바라지도 않고 자연이 주는 은혜에 감사하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무소녀의 15번째 생일날 비극은 시작되었다. 갑자기 나타난 정부군은 축제 분위기를 험악하게 바꾸며 행패를 부렸고, 이에 항의하는 오빠를 끌고 가 버렸다. 반군과 정부군의 싸움은 이 작은 마을에 불운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이 원한건 전쟁이 아니었다. 정부군의 편도 아니었고 반군의 편도 아니었다. 그저 땅을 일구며 살고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며 사는게 그들의 꿈이었다. 하지만 정부군은 젊은 남자나 남자아이, 에스파냐어를 하는 사람,반군에 동조한 사람을 막무가내로 잡아가기 시작했고 무차별적인 살인을 저질렀다. 살인에 정당한 이유는 없었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너무도 쉽게 총을 쏴댔고 폭력을 휘둘렀다. 그들에겐 아이나 여자, 노인들은 고려의 대상이기 보다는 쉽게 죽일수 있는 장난감 이었다. 마음의 양심은 아예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그들은 한마디로 미치광이였다. 

나무소녀는 그렇게 가족과 이웃들을 잃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 살해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총탄에 픽 픽 쓰러지는 아이들을 봐야만 했다. 시장에 물건을 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을이 불타는것을 목격했고 결국 부모님과 동생의 시체를 묻어줘야만 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동생 알리시아만이 나무소녀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지만, 동생은 충격 때문에 말을 잃어버렸다. 모든 것을 앗아가버린 무의미한 전쟁. 정부군과 반군이 쓸고간 자리엔 마을이 아니라 무덤이 생겼고 깊이를 알수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 모든게 꿈이었으면, 지독한 악몽이었기를 바랬을법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알리시아를 데리고 피난길에 오르다 만난 임산부는 길에서 아이를 낳고 정신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출산을 도와준 나무소녀는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길을 떠나야만 했다. 군인들이 오는 소리 때문에 아이의 엄마를 도와줄수가 없었고 잘못하면 다 죽을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나무소녀가 모진 마음을 먹었더라면 아이를 떼놓고 도망칠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기가 먹을 우유를 구해오기 위해 마을로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고, 마을에서 벌어진 학살 현장을 목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알리시아와 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기를 알리시아에게 맡기고 마을로 들어선 나무소녀. 친절한 사람들은 소녀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잠시나마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은 이 마을을 피바다로 만들었고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했다. 여자는 강간한 다음 죽이고, 아이들은 데리고 놀다 죽이고, 노인들과 남자들도 차례차례 죽였다. 쉽게 살인을 저지르는 그들의 모습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나무소녀는 다행히 나무에 올라 목숨은 건졌지만 결국 아이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이틀동안 나무위에 있느라 생긴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이 모든 상황을 봐야만했던 정신적 충격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수치심에 다시는 나무에 오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할 정도로 분노와 죄책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자신에겐 숲이 신성한 안식처이고 나무가 좋다던 아이가 이런 결심을 한것은 너무도 슬프고 비참한 일이다. 왜 이 아이가 죄책감에 빠져 허우적대야만 했는가. 왜 끝없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살아남기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는가. 모든걸 내 책임으로 돌리는 자책감은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컸다. 

"이렇게 살려면 살아남는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는 소녀의 말은 그래서 더 가슴아프게 다가온다. 친구들과 뛰어놀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흠뻑 취해야 할 나이에 이런 생각을 한다는것 자체가 비극이다. 특히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아이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부족한 식량과 물건을 얻기위해 하루종일 돌아다녀야만 했고 미래는 없어보였다. "내가 하루 더 살아남는다면 다른 누군가는 대신 죽어야한다.내가 식량을 구하면 다른 누군가는 주린 배를 쥐고 자야한다."는 것을 생각할 정도로 빈곤한 생활이었다. 

하지만 나무소녀는 좌절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이미 웃음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미소를 돌려주기위해 놀이를 시작하고 학교를 연 것이다. 축구공 하나 때문에 아이들이 뛰어놀고 웃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걸 보며 가슴이 뭉클했다. 어른들이 하지 못한 것을 나무소녀가 해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을 하지 않았던 동생 알리시아도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것도 큰 수확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나무소녀가 다시 나무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전보다 더 강해진 나무소녀. 그녀가 보여준 용기와 삶에 대한 철학은 비록 어린 나이지만 내게 많은것을 시사해줬다. 부디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 행복해졌으면 한다. 더이상 잃어버릴것이 없는 소녀에게 '희망'과 '행복'이라는 말은 온전히 다가가고 실제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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