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순례씨의 생활을 보여 주는 겉장의 삽화들에 눈길이 한참을 머문다. 그리고 한장 한장 넘겨 펼치면 알수 있다.
순례씨는 대도시가 아닌 소도시나 지방의 단독 주택에서 살고 있다.
혼자서 살아가고 있다.
누구의 도음도 없이 그리고 누군가를 돌봐야하는 상황도 아니다.
인스턴트 커피라 추측되는 종이컵에 담긴 음료를 마시는 순례씨, 화초에 물을 주는 순례씨, 허리 뒷춤에 방석을 매단 순례씨, 강아지에게 밥 주는 순례씨...그리고 순례씨의 등긁개(효자손), 젓갈병, 장화, 약봉투, 거울 등등
소품 하나 하나도 왜 이다지도 정겨운 것일까...?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바로 작가의 소개글에서...
채소
...(생략)
감자를 즐겨 먹고 푸르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오래도록 곁에 머무르는 것들이 마음에 담깁니다.
그리고,
그림 그리는 순간을 사랑합니다.
(중략)
작가님이 궁금해진다. 작가님에 관해선 검색이 안된다. 그래서 나름 상상해본다.
그는 아마도 채식주의자일것 같다. 필명이 채소라서...
그리고 함께 한 할머니를 무척이나 사랑할(?) 것 같다. 할머니의 소품을 이다지도 사랑스럽게 그려내는 것 보면 말이다.
처음 이 책을 서평단 소개글에서 봤을때는 소설 <순례주택>과 관련있는 '순례씨'인가 생각했었다. 그건 아니고 그냥 동명 이인 이야기.
최근 연로하신 여성분들의 이야기에서 실명이 등장하는 제목이 종종 있는 것 같다. 이명환 작가님의 <경옥>도 그랬고...
그냥 '할머니'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한 존재로서의 이름을 표현하고 싶은 것 같다.
나도 휴대폰 전화번호부에 슬며시 울엄마라고 저장해 놓은 글자 앞에 엄마의 이름 석자를 써 넣 는다. 왠지 뿌듯해진다.
난 이 책의 메세지도 좋았지만 그려진 소품 보는 즐거움이 참 컸다.
순례씨의 방, 순례씨의 부엌, , 그리고 순례씨의 앞마당... 그리고 그 공간들을 차지한 이불들, 액자 속 사진들, 항아리, 세숫대야, 김치통까지..흔히 보는 살림살이들이건만 그림 속에 순례시의 손길과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순례씨의 생활이, 그리고 순례씨의 삶이...
땅을 파다가,
땅에서 곡식 올라오듯이 생겨난 아이들을 위해 또 땅을 파다가,
결국은 땅 속으로 먼저 가버린 남편...
담박한 삶이란 이런 거겠지. 그 언제 이 생에서 떠난다하더라도 아쉬울 것 없는 삶...
참 쓸쓸한 것 같지만 받아들여만 하는 삶...
그래도 아침이 밝아오면
세수를 하시고
화장을 하시고
식사도 하시고
친구분들도 만나시고
운동도 하시고
고추도 따러 가시고
책을 덮는데 한숨 아닌 "큰 숨"이 쉬어진다.
그냥 오늘 하루를 또 잘 살아보자. 순례씨처럼.
살아갈 수 있는 또 하루가 나한테 주어졌으니 선물이겠지.
후회없이.
순례씨처럼.
하루하루가 모인 인생길의 순례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