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존재
이석원 지음 / 달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애는 나 전에 여덟 명의 여자를 만났다고 했다. 나에게는 그가 첫사랑이었지만 나는 질투 없이 그의 지난 사랑을 인정했다. 만남과 헤어짐에 가벼움이라는 건 없을 테니까. 그가 했던 사랑을 인정했고, 현실적인 방식으로, 쿨하게 - 한 달 만 사귀자, 는 그의 제안도 받아들였다. 
 
멀어지게 되면 서로를 구속하지 말자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내가 타지에 공부를 하러 가서도 전화는 이어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우울했던 기간이 거의 두 달은 되었다. 한 달 간의 만남으로, 그가 나를 기다릴 것이라고는 물론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끝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 참 많이 힘들어 했다.
 
타국에서의 다섯 달이 지나고 잠시 한국에 들어올 일이 생겨, 이것저것 일을 정리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서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고, 혼자 나가서 전시회를 보고, 책을 사고, 책을 읽고, 저녁에는 영화를 보러 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국해야 했기 때문에, 혼자서 편히 쉬고 싶은 기분이었다.
 
표를 예매하고, 시간이 남아 기다리는데, 그와 닮은 사람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었다. 옆 사람 어깨에 손을 두르고 있는 그를 -  나는 순간 잘못 본 것인가 싶었지만, 생각보다 먼저, 몸이 나를 기둥 뒤에 숨게 했다. 나는 기둥 뒤에 서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장소로 가서, 벽 한 쪽에 걸린 스크린에서 나오는 영화의 예고편을 보는 척 하면서, 그들을 살폈다. 그 사람이었다. 아직 헤어지자고 말을 하지 않은, 나 의 남 자 친 구 였 던 사 람,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그녀는 - 도 대 체 누 굴 까? 느낌으로 알 수 있었지만, 그냥 피하고 싶었다. 그를 마주치게 된다면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나도, 그 애도, 피차 불편한 모양새가 될 것이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 입장할 때도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감고 재빨리 들어갔다. 영화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줄 알았다. 정확하게 얼굴을 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그가 아니겠지, 하고 지나쳐 버리고 싶었다. 이 모든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와서 돌아가는 길,
우리는 마주치고 말았다.
 
우리는 서로, 놀 랐 다. 아니, 놀랐다고 하는 표현은 너무 진부하다. 나는 이미, 영화 시작 전에 그 심장의 떨림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 애는 정말이지, 예상치도 못한 나의 출현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왠일이야, 돌아온거야?"
"아, 아니. 잠시 들어왔어."
 
다행히도 어색한 침묵 따윈 없었다. 여기서 지체하다간 곧 여자친구가 나올 거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나의 팔을 잡고 아래 층의 계단으로 내려간다.
 
"‥ 와, 정말 놀랐어. 누구랑 같이 왔어?"
"나 혼자 왔어. - 아까, 얼핏 봤는데, 맞구나. 너 맞았구나."
"‥ ‥ 잘 지내?"
"응, 잘 지내‥ . 너도 잘 지내는 것 같다?"
"응. ‥ ‥ 얘기 들었지?"
"아니, 무슨 얘기?"
 
난 아무 얘기도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충분히 파악이 되고 있었다. 같이 온 여자가, 그의 열 번 째 여 자 친 구 라는 것 정도는. 
 
"음‥ - 그렇게 됐어."
"그래? 잘 됐네. 얼마나 됐어?"
"얼마 안 됐어. 한 달 반 쯤."
"그렇구나 ‥ . 내가 아는 사람이야?"
"아니‥ , 모르는 사람이야."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말을 꺼내려다가, 그냥 말을 삼켰다. 굳이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 미 충 분 히 우 리 는 , 서 로 에 게 식 어 버 린 것 이 다.  이 제 는 , 단 순 히 아 는 사 람 에 게 새 로 운 이 성 친 구 가 생 겼 다 는 것 정 도 의 관 심. 그 정 도 일 뿐 이 었 다. 서 로 에 게, 우 리 는 특 별 한 존 재 가 아 니 라, 이 미 보 통 의 존 재 가 되 어 버 린 것 이 다 .
 
변명을 듣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사이. 쓸 데 없 는 대화로 새로운 감정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 만 소 유 욕 은 - 나의 소유욕이라는 것에 조금 생채기가 생겨서, 마냥 평온한 척을 할 수가 없었던 게 아닐까.
 
"너 올라가 봐야겠다? 같이 온 사람 기다릴 텐데."
"응‥ 그래‥. 다음에 보면 길게 얘기하자."
"다음에 언제? 우리 언제 볼 지 모르잖아. 됐어, 잘 가."
"‥ ‥ 잘 가. 조심해서 들어가구."
 
마지막의 대화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여자친구가 볼까봐, 다시 그 커플을 마주칠까봐, 서둘러 극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던 것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우리는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한 달만 사귀자고 했었지만, 사귈 동안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사이였다. 그리고 나는 떠나고, 그는 남겨지고. 하지만 나쁜 감정으로 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돌아온다면 우리는 친구로, 다시 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역시, 아니었던 걸까.


그 아이는 이미 나에게 미안한 감정 따위, 없는 것 같았다. 단지 당황함. 그 뿐. 
 
그런 것이 다 느껴질만큼, 건조한 만남이었다. 그 애도 나에게서 느꼈으리라. 내가,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거 - 그러니까 그렇게 쉽게 보낼 수 있었겠지. 바 이 바 이 하 면 서.
 
우리는, 쿨 하 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되었다. 본성이 그런 건지, 이미 애정이 다 식어버려서인지는, 분간할 수 없지만 -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  
이렇게 나는 첫사랑과 이별했다. 완 벽 하 게. 
   
나는, 그래도 첫 사 랑 에. 무게를 둔 다. 첫 사 랑 이니까. 나의 첫사랑은, 변 함 없 이. 그 애 다. 지금은 그 감 정 이 다 사라져 버렸지만, 추억은 남아 있으니, 사랑하지 않지만 결코 미워하지도 않는다. 차라리 고맙다고 해야 할까.
 
그 애는 잊어버린다고 해도, 그래서 나와 언제나 함께 갔던 영화관에 열 번 째, 열 한 번 째 의 여자친구와 같이 와서-
나와 함께 사진을 찍었던 장소에서 사진을 찍고, 같이 앉았던 벤치에서 수다를 떨면서도, 나와 함께 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애와 함께 했던 모든 것들. 처음이니까. ‥ 하지만 그것은 이미 현 재 가 아 닌 과 거.
나 의 아 름 다 운 과 거.  


 

이렇게 나는 아픔을 딛고, 성장해 가고, 점점 무뎌지고.

 

그렇게도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었던 이에게 보 통 의 존 재 가 되 고.
나 역시 내 목숨보다 사랑했던 이를 보 통 의 존 재 로 여 기 게 되 고.

 

하지만 그들이, 내 인생에서, 내 추억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을 테니. 
나는, 나의 인생을 아 름 답 고 다 양 하 게 만 들 어 주 었 던 그들에게 감사할 뿐. 


슬퍼하거나 노여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