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푸른 너에게로 간다
어득천 지음 / 지식과감성#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간결하고 함축적인 문장을 좋아한다. 장문보다 단문이 좋다. 짧지만 깊은 통찰력이 우러나오는 시인의 언어는 이 모든 것을 능가한다.

시는 머리와 가슴이 아닌, 온몸으로 쓰는 거라고 김수영 시인이 말했다. 한 편의 시가 탄생되기까지 수없이 생각을 다듬고 시어를 고르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도 숨어 있으리라.

한 권의 책은 누군가의 기억과 공간 속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소중한 매개체다. 무한한 세계 속에서 인간존재의 본질을 찾아 나서는 다채로운 여행이다.

<오직 푸른 너에게로 간다> 어득천 시인의 시집이다. 첫 시집이지만, 오래전부터 블로그를 통해 꾸준히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모든 글이 그렇겠지만, 시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렵게 쓰기 때문이다. 넘치는 은유와  화려한 기교로 구성된 언어의 미학적 마술은 종종 소통의 부재를 낳는다. 쉬운 글이 좋다. 쉽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시가 좋다. 어득천 시인의 시가 그렇다.

어시인의 시 세계는 순하고 맑다. 자연을 향한 섬세한 시선과, 무심코 스치는 일상의 자잘한 순간들을 포착해 시로 노래한다.

삶을 향한 긍정과 희망의 시선이 반짝인다. 단순하면서도 화려한 시적 상상력은 때론 날카롭다.

간결하게 압축된 시 속에 우리 인생이 들어 있다. 살며, 견디며, 사랑하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방랑자>
꽃이 피면
화사하여 살 만하고

꽃이 지면
쓸쓸하여 살 만하다

기쁨도
슬픔도 지상에 잠시 머무는 꽃

삶이란
세월 따라 저절로 살아지니
발길 따라 나아갈 뿐

꽃이 피고 지는 길
걸어가는 오늘이 축제의 날 아니런가.

- 무심한 듯, 삶을 향한  관조의 시선이다. 꽃이 피고 지듯, 생과 사는 자연의 섭리다. 내일은 오늘의 다른 이름일 뿐, 찰나는 곧 과거가 된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늘 과거 속에서 사는지도 모를 일. 그래서 오늘이 축제의 날, 맞다

<농밀하다>
새벽
마지막 별 스러질 때
어둠의 농도는 제일 농밀하다

가을
마지막 잎새 떨어질 때
계절의 농도는 제일 농밀하다

그리움
마지막 눈물 마음 적실 때
사랑의 농도는 제일 농밀하다

사람
마지막 호흡 끊어질 때
生의 농도는 제일 농밀하다

-그렇다. 절정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모든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게 삶의 아이러니다. 삶도 사랑도 죽음도...

<사람과 꽃의 향기>
우연히 만났으나
시간을 견디면 좋은 인연이 되고
인연이 되어 다시 오랜 세월 이겨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꽃이 핀다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꽃이 된다는 거
잊을 수 없는 진한 향기가 된다는 거
이 얼마나 놀랍고 행복한 일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모든 것을 포괄한다. 때론 천국과 지옥이 될 수도 있다. 꽃과 향기로 무르익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벼운 농담>
이를테면
가벼운 농담은 물고기의 부레다
날개 없는 날개다

가벼운 농담이
무거운 일상을 이끈다
짐짓, 실없는 웃음이 삶의 무게를 던다
그 부력浮力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가볍게 살자
바람에 나부끼는 솜털처럼
어쩌면
가벼운 농담보다 가벼운 인생 아니더냐

- 가벼운 농담은 삶의 무거움을 희석시키는 활력소다.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 간다'는 말처럼,  삶은 그저 농담 한 판이 아닐는지.

<하루살이 인간>
그대의
어깨가 무거워 보여요
무엇이 그댈 힘들게 하나요
천만년 살 것처럼 애쓰지 말아요

우리
하루살이로 살아요
하루만 생각하고 살아요
오늘을 마지막으로 알고 살아요

유월의 바람에 살랑이는
아카시아 잎처럼 가볍게 살아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방랑자로 살아요

하루 치만 고민해요
하루 치만 슬퍼해요

오늘 세상 누구보다 즐거운 듯 살아요

- 삶은 어떻게 사는가, 마음먹기 나름이다. 치열한 삶 속에서도 적당히 비우고, 적당히 유유자적하게 살자.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미래의 일이다. 미래의 고민은 미래에 맡기자.

<오직 푸른 너에게로 간다>
도시를
숲이라 할 순 없을까

젊은 나는
푸를 靑靑 한 그루 소나무,
예쁜 그댄
청순한 물푸레나무

은행 창구
환한 웃음의 텔러
연분홍 진달래꽃,
웃음 터뜨리며
스타벅스 앞 지나가는 한 무리 소녀
만발한 벚꽃

사무실
너털웃음의 만년과장 김 과장
그늘 넓은 느티나무,
쉬엄쉬엄 저 노인
걸어가는 오백 년 은행나무

회색빛 도시,
새벽안개 잠긴 자작나무 숲

난 오늘도
연분홍 진달래꽃 지나
오백 년 은행나무 지나
자작나무 숲,
오직 푸른 너에게로 간다

- 우리 삶의 소소한 풍경을, 꽃과 나무로 비유한 점이 시선을 끈다. 반복되는 일상 속, 회색빛 도시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으면 좋겠다.

저자 어득천 시인은 1968년 지구별에 불시착하였다. 동해 푸른 바다 넘실대고 소나무 향기 가득한 강릉에서 해의 시간에는 샐러리맨으로, 달의 시간에는 시인으로 살고 있다. "이 生이 우리 모두에게 즐겁고 여유로운 한때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