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딘성으로 가는 길 -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의 기억과 약속을 찾아서
전진성 지음 / 책세상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fact)과 진실(Truth)은 다르다. 역사적 진실은 개개의 사실 속에 담겨 있지 않고 오히려 사실들의 이면에, 그 틈새에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역사는 저마다 상이한 기억을 지닌다.'


인류 역사는 전쟁과 함께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로부터 크고 작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대부분 영토 확장을 기반으로 한, 명목상 이념전쟁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전쟁세대가 아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전쟁은 대부분 역사서나  문학을 통해서 본 간접경험이다.  그걸 바탕으로 전쟁을 기억한다.


그렇게 보면, 전쟁 관련 소설은 많지만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소설은 그리 많지 않다.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 강> 이나  안정효의 <하얀 전쟁>등, 이를 통해 베트남전의 실상을 대략 짐작할 뿐이다.


베트남전쟁은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띤 전쟁이다. 단순히 반공주의 대 공산주의로 이원화된 대립 구조로 볼 수 없는 ' 20세기 모든 갈등 요소가 뒤범벅이 된 전쟁이다.'


베트남이  자주 국가 통일을 위한 민족 해방 전쟁을 수행한 것이라면, 미국은 냉전시대의 이념전쟁을 수행했다.


베트남 역사와 전쟁 발발 원인


베트남의 근 현대사는 우리 역사와 비슷하다.  베트남은 과거 1000년 이상 중국의 통치를 받았고, 수차례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침략으로 오랜 기간(62년) 식민통치를 겪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이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베트남을 다시 점령했다.


일본 패망 후, 호찌민이 이끄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혁명을 일으켜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외세가 개입된 포츠담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남. 북으로 분할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옛 식민지를 회복하고자 재침략했다. 북베트남과 프랑스 간 8년에 걸친 전쟁이 벌어졌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프랑스의 항복으로 제네바협정(1954)이 체결되고, 1956년 총선을 실시하기로 했다.


남베트남 정부는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고, 북베트남 공산주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지자 총선을 거부했다.  이에 미국이 개입했다. 다시 북베트남과 미국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베트남전쟁이다.


대한민국 파병의 이면


미국의 참전 명분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것이었다. 중국을 비롯, 주변 국가가 공산화될 가능성을 시사한 일종의 도미노 이론을 내세웠다. 이런 명분 없는 전쟁에 미국의 동맹국 대다수는 외면했다.


한국군 파병은 남베트남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이었으나, 실은 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정부는 파병에 따른 금전적 이득을 앞세워 자발적이거나, 비자발적 강제 차출로 파병했다.


베트남 전쟁의 가려진 이면에는 박정희 군부정권과 미국의 거래가 있었다.  '당시 군부정권은 월남 파병에 정권의 생명을 걸었고, 파병을 통해 경제 안보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강준만 2004).

베트남전은 한마디로 돈을 벌기 위한 전쟁이었다. 정부는 파월장병들의 목숨을 담보로 달러와 바꾸었고, 이를 통해 경제발전의 초석을 이룬 셈이다.


베트남전 실상


베트남전은 뚜렷한 전선도 없고 후방도 없는 '마을 전쟁'에 가까웠다. 전투 과정에서 베트콩과 양민 구분이 안됐다. 베트콩이면서 양민이 되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이런 특수성 때문에 수많은 무고한 양민이 학살당했다. (베트남 중부  빈안에서 1000여 명이 넘은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전쟁 중 무자비한 악역을 맡았던 파월장병들의 심리를 우리 과거사와 연결 지어 분석한다. 제국주의 (일본)로부터 폭력의 역사를 겪은 피해자의 억압된 분출구의 일환으로 본다. '한국인에게 폭력이란 피해자를 가해자로 역전시키는 감정의 연금술이었던 셈이다.'


베트남전은 1965년부터 8년간 이어졌고 미국의 패전으로 끝났다.  베트남은 92년 만에 통일된 사회주의 독립국가를 형성했다.  


 미안해요, 베트


1999년 한국 시민사회가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죄를 목표로 벌여온 슬로건이다. 오래전부터 정부와 민간인 단체를 중심으로 베트남 파월 군 주둔지에 학교를 짓는 등 장학사업을 꾸준히 벌여오고 있다.

베트남 학살 외신 보도가 처음 터졌을 때(1999) 베트남 정부는 "한국과 베트남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으며, 과거사의 불행한 일을 현시점에서 거론하는 것은 베트남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우리 정부는 베트남 학살에 대해 사과의 뜻을 표명했다. 그러나 베트남 정부는 '약소국인 한국이 미국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참전한 것이니 과거사에 대한 일체의 논의에 반대한다' 했다. 과거사에 연연하기보다는 실리를 중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75년 베트남전이 종전되면서 전쟁의 기억은 서서히 잊혀 갔다. 세대 간 단절은 망각을 가져왔다.

베트남전은 왜 잊힌 전쟁이 되었을까? '베트남전 파병은 사실상 명분이 부족했고 피해도 컸고, 수혜의 배분 또한 그다지 정당하지 않았으므로, 진실의 판도라 상자가 열리면 극심한 사회적 갈등이 야기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박정희 유신정권을 포함하여 군부독재정권들은 베트남전의 기억을 아주 단순한 형태로 박제화하고는 민족사의 벽감에 고정시켜 놓았다.'


국가에 의한 집단적, 의도적 망각이다. 진실을 드러내는 건 불편한 법이다. 베트남전은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나.

 

<빈딘성으로 가는 길>은 참전용사들의 기억과 증언을 토대로 베트남전의 실상을 알려준다. 저자는 가해자의 입장에 일방적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경계한다. 상반된 두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당시 우리 정치, 사회, 나아가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 다각도 시선에서 바라본다.

 

근래 <겨레 21>에 베트남 민간인 학살 관련 보도가 이어지면서 베트남전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파월장병들은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다. 그러나,


'피해자의 측면을 강조한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의 침묵이 좌절감의 발로이자 고통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의도적인 선택이라면, 가해자는 침묵만으로는 과거를 숨길 수 없다.'

 

과정이야 어떠하든, 결과적으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잘못된 일이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과 가해를 정당화해선 안된다. 진정한 화해와 용서를 모색하는 길이 곧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