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정원 - 제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혜영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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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접하는 아름다운 문학작품이다. 


이 책에 대한 선입관을 껴안기 싫어서 책의 말미에 있는 심사평이나 작가후기를 앞서 읽지 않았다. 책 뒷표지에 있는 간략한 서평조차도 읽지 않았다. 목차만 흘깃보고 첫 문장을 읽어 나갔다.


90여 쪽을 읽었을 무렵 덮었던 책을 다시 집어들면서 비로소 겉표지의 제목 아래 '잃어버린 엄마의 첫사랑을 찾아서'라는 부제를 발견했다.

 

혼불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이 작품을 나는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본다.


첫째, 시처럼 아름다운 어휘와 문체

둘째, 편집증적인 사랑 이야기

셋째, 한국현대사의 시대정신의 반영

 


1. 시처럼 아름다운 어휘와 문체


이 책을 보는 내내 스마트폰을 옆에 두고 있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마치 1930년대 한국문학처럼 순우리말은 물론 오래되고 생경한 단어와 비유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디지털 사전이 얼마나 빠르고 편한지 감사할 따름이다.


예를 들자면 작가는 대여섯번 등장하는 주인공 어머니의 오래된 벨벳 의자를 표현하는대도 처음엔 '우단의자'라고 쓰고, 중간엔 '비로드의자'라고 표현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벨벳의자'라고 표현한다.

어느 한 문장도 허투루 썼다는 느낌이 없음을 감안하면 작가가 하나의 사물도 다양한 어감과 감성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듯 하다.


"별들은 검은 양탄자를 밟고 와 제 이름의 금빛 의자를 찾아 앉았다. 달은 지상의 만물이 꿈을 꾸도록 은빛 이불을 덮어주었다. 뒤 숲에서는 초겨울 바람이 댓가지들을 자갈 굴리듯 이리저리 밀고 다녔다." (본문 39쪽)


이렇듯 작가는 작심한 듯 은유와 비유를 한껏 활용하여 고즈넉한 노관의 풍경과 일상, 날씨, 계절, 정물, 정황 등을 감성적으로 묘사한다. 


책의 말미에 있는 혼불문학상 심사위원장인 황석영 소설가의 심사평을 보면

 

"이를테면 '요즈음도 이렇게 소설을 쓰는 사람이 있구나' 할 정도로 구닥다리이면서 그게 또 묘한 '빈티지'의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344쪽 심사평)

 

라고 쓰고 있다.

 

작가의 문체가 곰삭은 메주처럼 조금은 옛스러울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한글과 우리말을 재료로 그토록 맛깔지게 글을 썼을 것이다.


이런 감성적인 문장들은 수사법상 은유와 비유로 구분할 수 있겠지만 이 모든 표현들은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작가의 순수한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율이 삼촌이 사랑 대청의 여덟 개의 드닫이문을 들어 처마 끝의 쇠고리에 걸었다. 그러자 대청 마룻바닥으로 겨울 빛과 먼지의 조각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오랫동안 마르고 움츠렸던 서재 안의 공기들은 새로 들어오는 햇빛을 피해 눈살을 찌푸리면서 구석으로 몰려 다녔다. 지루한 대화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서가의 영혼들은 이제 막 올리는 새 무대에 기대를 가지고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본문 45쪽)


사소하고 하찮은 먼지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라 해도 작가의 상상력은 제약이 없어 보인다.


작가의 상상력은 요정이 보내오는 편지내용에서 절정에 달한다.


소녀(테레사)가 열여섯살 생일에 잠들어 100년 후에나 깨어났을 때 유년의 기억을 돕기 위한 기록으로써 보낸다는 편지내용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동화다.


소설 속의 소설, 즉 액자소설이라 할 수 있다. 소녀의 방을 이루고 있는 4면의 벽이 모서리에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거울세계 이야기, 시계 속 시간 여행 이야기, 별과 사랑에 빠진 창문 이야기 등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나 돈키호테, 또는 판타지 영화 한 편을 보는 듯 하다.

 

이 작품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처음 등장한 소녀가 앞으로 100년간 잠들 것이라며 보내오는 이 편지들을 보면서 환타지 소설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편지의 분량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편지 내용 자체만 보면 너무도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라 너무도 마음에 들지만 심사평의 지적처럼 필요이상의 분량과 내용으로 소설 전체 구성을 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감성적 묘사와 문장에 집중을 해서인지 소설의 앞부분은 화자(話者)이자 주인공인 이요의 아버지와 할머니가 죽고, 율이 삼촌이 십여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그 이야기는 진행된다기 보다는 노관의 정경과 일상처럼 따뜻하게 박제되어 버린다. 


작가 특유의 문체에 적응되어 문장을 읽어가는 것에 속도가 붙을 때까지도 이야기는 진전이 없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노관의 일상과 정경, 정황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로 인해 전반부는 다소 지루해지기까지 한다.


시처럼 아름다운 감성으로 쓰여진 문장들은 가슴 한 켠에 숨어 있던 따뜻한 정서를 불러 일으키지만 이야기 전개를 더디게 한다.

 

더딘 이야기를 더욱 더디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스마트폰, 인터넷, 교통카드 등이 없고 자가용도 많지 않던 시대의 강원도 산골을 배경으로 그 일상이 구체적으로 묘사되니 지금의 생활감각으로는 너무 느리고, 더욱 더디게 느껴지는 것이다.

 

또 하나는 멈출 줄 모르는 작가의 넘치는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문장을 이끌어 가는 작가만의 힘이다. 상상력이 넘치니 문장도 넘치기 때문이다.

 

 

2. 편집증적인 사랑 이야기

 

뒤늦게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소설의 주된 이야기는 어머니와 삼촌의 사랑 이야기이다.

10여년 전에 어긋난 사랑을 되돌리려는 남자와 과거나 현재나 감정을 숨기고 똑같이 처세하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이 죽음을 각오하거나 초월하는 사랑의 이야기라고, 그래서 숭고한 사랑이라고 한다는 의견에는 절대 찬성할 수 없다.

 

릴케의 시와 실존주의 철학으로 포장되어 있을 뿐이지 남자의 사랑은 집착이다. '너 아니면 안돼'라는 식의 타협없는 편집증적인 집착이다.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증세가 더 진행되면 여자의 본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그려놓고 강요하기도 한다. 그러다 자살까지 감행할 정도라면 편집증은 이미 정신병이 된 것이다.

 

율이 삼촌은 자신의 옛연인이었던 요의 어머니 권정의에게 '넌 나와 함께 도망가야한다.'고 강요하며 일방적으로 약속하고 기다린다. 권정의에게 사랑하는 남자와 도망갈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면 이미 과거에 도망갔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와의 도피는 그녀의 본 모습이 절대 아니다. 권정의에게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무모다.

 

반면 사랑하는 남자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과거와 현재에 자신이 했던 무책임한 행동의 이유를 말하는 여자. 

사랑했던 남자가 피를 토하듯 이유를 물어도 절대 말하지 않다가 그 남자가 죽고나니 엉뚱한 제3자에게 고백한다. 그리곤 애달파하다가 서서히 죽어간다. 그 여자의 머리와 마음은 어지럽겠지만 그냥 위선이고 자책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남녀는 21세기인 현재에도 흔하디 흔하다. 다만 스스로 죽지만 않을 뿐. 오히려 가끔 상대와 가족을 헤쳐서 사회뉴스가 되기도 하지만...

 

남녀 문제만큼 모든 것을 결과로 설명하는 것도 드물다. 과거에 사랑했으나 그로인해 둘 다 죽어버렸다면 사랑도 인연도 아닌 것이다. 짝궁이 될 인연이 아니다. 연이 있었다면 다만 같은 운명의 굴레를 뒤집어 쓴 악연일 뿐이다. 

 

지금도 이별을 통보하는 여자는 절대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 이별을 통보받은 남자는 어떤 이유를 말해줘도 절대 믿지 않는다. 

 

이렇듯 사랑 이야기는 각 시대상과는 별게로 인류사를 관통하는 공통요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문장으로 쓰여진 촌스러운 사랑타령이 독자의 감성을 자극하고 공감을 이끌어 내는지도 모른다.

 

 

3. 한국현대사의 시대정신의 반영

 

심사평처럼 이 소설은 참으로 특이한 소설이다. 작가의 개성이 독특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연애소설이라고 하기엔 한국현대사의 시대정신이 무겁게 반영되고 있다. 지금보다 순박한 사랑 이야기를 하겠다고 7~80년대를 설정한 것은 아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총격이 있은 직후의 연회석 장면과 대통령 사진이 반복되어 나왔다. 태어난 이후 한 번도 대통령이 바뀌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온 우리에게는 전 세대의 육이오 남침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쿠데타로 십팔 년 동안이나 장기집권한 군사정권이 내부의 붕괴로 무너지다니 그야말로 하늘이 깨지고 땅이 흔들리는 일이었다." (본문 222쪽)

 

 

겉표지의 작가 소개를 보니 1961년 강릉 태생이다. 한국현대사의 격동기 한 복판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것이다.

주인공 이요의 나이와 작가의 나이가 동갑이고 고향마저 같은 것이다. 작가의 자전적 시대정신이다.

 

 

"어쨌든 혁명은 승리한 다음에는 근사하게 포장되지만 일어난 시점을 들여다보면 극심한 피폐와 험난한 과정이 숨어 있어. 폭동에서 튀는 파편의 강도를 보면 정치적 폭압의 정도를 가늠할 수가 있지. 지금 유신정권은 겉은 평평해서 그럴 듯해 보이지만 그 얼음장 밑 한 뼘 아래에는 벌써 봄의 물결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해. 민중이 결속되는 그 방향이 바로 자연의 이치이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명백한 역사의 방향이고." (본문 157쪽)


"민주적 평등이란 사회주의의 균등함하고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평등함이란 같음이 아니라 공정함입니다. 무수한 다양성에 대한 다양한 공정성이 바로 민주적 평등입니다. 같음이라니요,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논리입니까?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입니다. 자연에, 환경에 자율적으로 알맞게 적응해가도록 만들어진 과정의 피조물입니다."

손님은 어머니가 일손을 멈추고 귀 기울여주는 데 고무되어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의 획일적이고 독단적인 행태를 보십시오. 이 정권은 일본 사무라이들처럼 목을 쳐서 전 국민의 키를 똑같이 고르고 있습니다. 강도 프로크루스테스처럼 다리를 잘라내서 정해진 침대에 키를 맞추고 있지요. 이런 터무니없는, 풍자나 우화에서나 있을 법한 획일적인 독단이 실제로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이 강산은 숨죽인 비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본문 158쪽)


"지금은 시절이 안 좋아. 자네도 알겠지만 지금은 우리가 역사의 왜곡된 방향과 싸우고 있는 전시나 마찬가지지. 이런 폭압 아래에서는 문화가 제대로 꽃필 수 없어. 독재는 실생활보다 예술에 가장 독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억압과 불안, 두려움이 창조의 씨앗을 깨끗이 말려버린다고. 모험과 자유가 없는 상상력이란 얼마나 비루한가! 독재라는 좀벌레가 파먹어서 날지 못하고 지천에 버려져 있는 이 마법의 양탄자들을 좀 보라고!" (본문 287쪽)

 

아이러니일까? 짓궂은 역사의 사소한 장난일까?

작가는 대학시절부터 쓰던 소설을 바탕으로 수년 뒤에 이 소설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 책이 혼불문학상에 당선되어 세상으로 나오는 시점이 독재자의 영애께서 대통령인 바로 지금이니 말이다. 

 

 

 

4. 마무리하며...

 

이 소설엔 반전이 없다. 테레사의 정체도, 동네 아낙들이 수군거리던 노관의 마님과 작은 서방님과의 사랑 이야기의 전말도, 김경수의 등장과 연애도 모두 독자가 충분히 예상할만한 지점에서 그 인과관계가 드러난다. 


황석영소설가는 심사평을 통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탄탄한 문장 실력과 상상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고전적으로 절제되고 상징화된 아름다운 도입부가 지나고 후반부에 이르면서 '가족의 비밀'이 사건과 등장인물의 행동에 의하여 차츰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돌발적인 인물들의 발설과 충동적인 대화에 의하여 오로지 '말'로 풀어버림으로써 긴박감과 흥미를 잃게 한다는 것이다."


이 평을 본 후 주인공 요가 다리 아래서 빨래하는 동네 아낙네들의 수다를 엿들으면서 어머니의 과거를 확인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남의 집 이야기를 득의양양하게 말하는 동네 아낙들에게 감정이입하여 귀를 솔깃하던 내 모습이 보였다.


어쨌든 그러고보니 주인공 요가 한 것이 하나도 없다. 등장인물의 심리, 행동, 표정을 묘사할 때는 전지적 시점도 갖지만 대체로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유지하는 주인공 요는 학창시절을 통해서도 그 흔한 연애도 한 번하지 않는다.


학생운동을 하는 친구의 부탁으로 학보에 실을 시를 익명으로 쓰지만 자발적이지 않고 위험해지자 그조차 그만 둔다. 또 영문도 모른 체 친구에게 이끌려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영상물을 보게 된다. 그 영상을 본 후 구토를 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음에도 학생운동 같은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김경수를 은닉해 준 것도 손상기교수가 벌인 일이다. 더욱이 어수선한 시국에 미국유학을 권하는 손상기교수의 전화 한 통에 아무런 고민도 없이 도미한다. 미국에 가서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유학하다가 이십년이 지나서야 귀국한다. 

 

"지바고, 데미안, 베르테르, 나르치스까지 네가 알고 지내는 주인공들은 모두 고뇌하는 자들뿐이야. 더구나 니체니 쇼펜하우어니 하는 자들은 달변가이고. 넌 그런 행동 없는 대화에만 귀 기울이면서 책 속에서만 살고 있어. 한마디로 명작 병에 걸린 거야. 책은 그림이지. 액자일 뿐 창문은 아니야."

(중략)

"이젠 벽에 걸린 그림 액자나 드나들지 말고 실제의 창문을 뛰어 넘어! 요요,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라고! 햇살 아래로 저 바람 속을 달려봐! 산이 막으면 넘어가고 강이 막으면 건너가!" (본문 317쪽)

 

등장인물 중 하나인 김경수와의 대화를 통해 주인공 요에게 이토록 행동을 촉구한다. 이어서 김경수는 요에게 조국을 만나보라고 권하지만 요는 망설이며 자신은 시인이 되고 싶은데 조국이 다른 일을 원하면 어떻게 하냐며 걱정을 한다. 

 

그러자 김경수는 요에게 "이요군! 이 조국은 자네가 훌륭한 시인이 되길 원하네!"라며 답해 준다.

 

이 책은 요의 어린시절도, 정든 고향 노관도, 지독한 사랑이야기도, 책을 좋아하며 시인이 되고 싶지만 행동하지 못했던 요의 모습도 모두 작가의 자전적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당시에는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 시인(작가)이 되어 모두 쏟아낸 것이 아닌가 싶다.


'비밀정원'은 특이하지만 아름다운 문학작품으로 오래 간직될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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