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눈물 위를 달린다
팀 보울러 지음, 양혜진 옮김 / 놀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팀 보울러의 '소년은 눈물 위를 달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족의 의미와 가치를 재확인시켜주는 이야기이다. 짧은 단편소설이지만 10대의 심리상태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원제 'Night Runner'를 '소년은 눈물 위를 달린다'로 번역했는데 우리말 제목이 더 잘 어울리고 멋들어진다. 제목 짓는 이의 감성과 재량이 뛰어나다. 

감성과 창의력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나더러 지으라고 했다면 아마도 '야간 배달부'나 '오밤의 뜀뛰미'라고 했겠지...

줄거리 자체는 결코 평범하거나 일상적이지 않다. 일상을 묘사한 드라마라기보단 범죄 스릴러에 가깝다. 헐리우드 영화를 많이 보아 온 우리들에게 이 책의 줄거리는 어쩌면 영화로 한 번쯤 봄직하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여느 부모처럼 아들을 죽도록 사랑하지만 자기 기분에 따라 신경질적으로 손찌검을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주인공 지니 오코로는 학교에서도 친구 하나 없이 스핑크라는 아이에게 매일 맞는게 일이다.

스핑크에게 맞는 게 싫어서 - 또 부모도 때림으로 - 부모 몰래 학교를 빠진 어느 날, 집 안의 침입자가 들어오면서 겉잡을 수 없는 사태에 휘말려 든다.

그 침입자는 범죄소굴의 우두머리 중 하나였고, 그들을 집안으로 불러오게 된 것은 어머니의 칠칠치 못한 행실에 기인한다. 주인공의 시각으로 평가하자면 그것은 또 다시 무능한 가장인 아버지에게 책임의 화살이 날아가게 된다.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악당에게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주인공 지니는 밤마다 달리게 된다.

단편소설의 특징인지 영국문학의 특징인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문장이 담백하기 그지없다. 주변상황과 공간에 대한 묘사는 절제된 반면 주인공의 움직임과 동작 등은 짧은 문장으로 속도감있게 그려져 있다.

굳더더기 없는 문장과 촌철과도 같은 등장인물의 짧은 대화들은 읽는 이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 마지막 책장으로 달려가게 만든다. 


아마도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열이면 열 반드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꺼내어 놓으리라. 그 관점을 유지하자면 분명히 곳곳에 보인다. 


엄마가 나를 바짝 끌어안는다. 나는 엄마 목덜미에 머리를 푹 처박고는, 조금 전 바로 이 자리를 빨아 대던 로미오의 입술을 잊어 보려고 노력한다. (46쪽)

다른 엄마들과 함께 교문 앞에 서 있는데, 일고여덟 살밖에 안 된 주제에 나는 우리 엄마가 다른 엄마들보다 미인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여자 말이다. (48쪽)

그런데 황당한 건, 엄마는 쇠약해 보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워요." 나는 말한다.
내가 왜 간호사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나 모르겠다. 그저 듣는 사람을 당황스럽게 할 뿐인 말을.(194쪽)
 
이것은 작가가 10대인 지니의 심리적 모순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차용한 요소 중 하나로 보인다. 역시 이 책의 백미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가족에 대한 애증과 심리적 모순을 절묘하게 표현 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줄거리를 끌어가는 것에 초점이 맞았다면 여느 드라마나 영화 시나리오처럼 지니의 부모는 그냥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로 단순하게 표현됐을 것이다. 주인공 지니 역시 그런 부모 밑에서 자라서 온갖 육체적 심리적 병폐가 있는 그래서 복잡해 보이는 캐릭터로 묘사됐을 것이다. 

지니의 부모는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는 아니다. 아들을 죽도록 사랑하지만 단지 일상에 찌들어 습관적으로 자식에게 손찌검을 할 뿐이다. 극중에서 악마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부모가 아니라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여느 부모들의 모습으로 된다. 

지니 역시 모든 면에서 부모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부모를 죽도록 사랑한다. 또 그 속에서 10대답게 자신의 모순된 심리와 감정을 놓치지 않고 고민해간다.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이 두가지가 읽는 이로 하여금 이 책의 이야기에 더욱 공감되고 몰입되는 지점일 것이다.


엄마는 잠시 문이 닫히는 걸 지켜보더니 몸을 돌려 내 얼굴을 후려친다. 나는 악하고 뒤로 한걸음 물러난다.(중략)
그런데 또다시 손바닥이 날아드는 게 보인다. 이번에는 엄마의 손목을 붙잡는다.
"놔, 지니!"
"안 때린다고 약속하면"
"약속 못 하겠다면"
나는 그래도 놔준다. 하지만 엄마의 손을 계속 주시한다. 손은 여전히 옆구리에서 파르르 떨고 있다.(중략)
엄마는 내가 앉을 자리를 내준다. 내가 옆에 털썩 앉자 엄마는 팔을 뻗어 어깨동무를 한다.
"망할 꼬맹이."
"좀 닥쳐, 엄마."
엄마가 나를 바짝 끌어안는다. - 본문 중에서

아빠가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맥주 캔을 내려놓는 소리가 나지 않았으니 침대는 물론 몸에도 엎질렀을 것이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한번은 몸에 온통 토한 채 그대로 잠이 든 적도 있었다. 나는 아빠가 괜찮은지 확인하러 가지 않을 거다. 지금 당장은 그 꼴을 보아 낼 자신이 없다. 대체 내가 왜 저 개자식을 사랑하나 모르겠다. 함께 보낸 좋은 날들 때문인 것 같은데, 요즘은 그런 날도 거의 없다. 엄마도 똑같다. - 본문 중에서

이제 나는 침대에서 물러선 채 아빠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린다.
"주정뱅이 새끼, 당신은 나한테 사랑받을 자격도 없어."
나는 엄마를 떠올린다.
"당신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어떤 말도 진심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 본문 중에서

이런 이유로 결말에 가서야 부모가 모든 잘못을 인정하며 주인공을 껴안고 끝나는 영화같은 카타르시스는 없다. 비록 주인공이 심리적 모순 상태에 있었지만 이 가족이 서로 끈끈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전제에는 변함이 없었기에 그렇다.

10대의 심리와 특성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 두 가지를 볼 수 있다. 
첫 번째, 10대의 심리와 기억은 사진 같은 또렷한 이미지로 남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특성이 함축된 별명으로 부름으로써 직관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지니는 엄마와 각별한 사이인 듯한 남자를 '로미오'라고 부른다. 또한 자신을 괴롭히는 악당을 '플래시 코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반면 지니에게 친절하지만 별명을 붙이지 못한 - 특성과 이름의 연관성을 찾지 못한 간호사인 '파이드레이'의 이름은 몇 번이나 들으면서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지니는 자연 사진집 한 권을 소중히 간직하며 잠들기 전 혼자만의 시간에 들춰본다. 그 속에 담긴 고요하고 평화롭지만 인상적인 풍경사진들은 지니가 동경하는 낙원이다. 

유독 지니에게 반복되어 들리는 도시의 소음. 이 소음이 지니가 처한 상황에 따라 지루하게도, 시끄럽게도, 그립게도 표현된다. 이 소음과 더불어 어둡고 지저분한 뒷골목, 삭막한 동네 전경 등은 사진첩에서 보았던 전원의 풍경과 대비를 이룬다.

 지니의 마음에 따라 가변적인 도시환경에 비해 전원의 풍경은 절대적이다. 사진 속 풍경은 거꾸로 지니의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또한 지니의 유일한 탈출구로써 역할을 한다. 지니는 이 사진들을 자주 연상함으로써 한 번도 가 본적 없는 그 곳들을  마치 가본 듯이 더욱 더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된다. 사진 속 풍경이 자기의 것으로 되는 과정이다.

그 낙원을 엄마에게 의도치 않게 지니의 '손'이 꺼내어 줌으로써 지니의 꿈은 가족의 꿈으로 공유된다. 소통의 창구가 된다.


이 책은 뚜렷한 주제인 가족에 대한 애증과 그 심리적 모순 상태에 대해서 주절주절 떠들지 않는다. 
지니와 함께 숨차게 뛰다가 보면 내가 사춘기때 느꼈던 심리상태가 되살아난다. 
물리적 폭력이든 언어적 폭력이든 서로에게 폭력을 난무하는 가족간의 애증. 그것을 10대의 눈으로 보면서 독자 스스로 되새김질하게 만든다.

나 역시 사춘기 때 어머니와의 갈등이 극에 달했었다. 그 속에서 나 나름대로 심리적 모순을 극복해 내야 했다. 아니 극복하지 못하고 최근까지도 그 애증의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곤 애써 외면하여 저만치 멀리 치워두고 있었다. 

이 책은 이제 내가 가정을 꾸려 자식을 낳고 가장이 되어 그것을 다시 한번 꺼내어 보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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