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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ㅣ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8월
평점 :
주인공인 베르호벤 카미유가 강력계 형사이기에 추리소설 분위기를 물씬 풍겨온다. 오랜만에 추리소설을 읽게 됐구나 싶어 기대가 컸으나 엄밀히 말하면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스릴러이다. 그래도 본격 수사물이라면 충분히 그 맛을 즐길 수 있으리라.
카미유의 연인인 안 포레스티에가 금은방 강도사건의 폭행 피해자가 되면서 연이어 벌어지는 3일간의 사건을 다룬 내용이다. 마치 미국 드라마 '24시'처럼 1일, 2일, 3일의 3부로 구성된다. 소제목은 진행되고 있는 현재 시간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호흡이 매우 짧은 문체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섞어 자유롭게 오가는 서술기법, 정밀한 상황 묘사, 구체적인 심리묘사와 더불어 몰입도를 증가시킨다.
안 포레스티에가 무장강도에게 폭행당하는 장면과 그 장면을 주인공 카미유가 사후에 CCTV로 확인하는 장면은 40여 쪽에 걸쳐서 묘사되어 있다. 짧은 문체로 속도감을 더 한 전개와 데생같은 작가의 묘사력은 마치 읽는 이가 직접 폭행 당해 얼굴이 퉁퉁 부은 듯한 통증을 느끼게 한다. 폭행상황이 어서 빨리 끝나기를 바랄 정도로 읽는 동안 견디기 힘들만큼 괴롭기까지 하다.
초반에 과거와 현재를 빈틈없이 섞어 놓은 서술방식도 압권이지만 극을 끌어가는 또 하나의 백미는 '시점'이다. 주인공 카미유와 그 주변으로 벌어지는 상황은 3인칭 시점(전지적 작가시점)으로, 범인은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3인칭 시점에서 독자는 등장인물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다시 범인의 관점인 1인칭 시점으로 동시에 보게 되면 독자는 더욱 초조해 지고 상황에 몰입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시점이 교차되기도 한다. 병원에 범인이 다녀간 후 카미유와 안의 대화까지 3인칭으로 서술되다가 간호사가 대화에 끼어든 순간부터 간호사의 1인칭으로 서술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의 전환'은 중간에 있는 반전을 위해 작가가 독자에게 던져주는 일종의 힌트가 아니었나 싶다. 1인칭으로 말하고 있는 '내가' 누구인지 끝까지 놓치지 말란 듯이 말이다. 또한 범인을 꽁꽁 숨겨두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강도사건 직후 용의자들의 이름이 회고되거나 직접적으로 나열되면서 독자는 1인칭의 범인이 대충 누구일 것이라고 예측 할 수 있다. 중간에 가서야 예상 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는 반전이 나올 때는 다시 앞부분을 뒤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전개가 빠른 이야기를 따라 가기도 바쁜데 읽었던 부분을 잘못 이해했다는 생각에 다시 더듬게 되는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의례 소설의 반전이라는 것이 그렇기야 하겠지만 이 부분에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연상하게 된다. 줄리언 반스가 기억의 불명확성을 집필동기로 했던 것처럼 피에르 르메트르도 기억의 왜곡과 기억이 취사선택된다는 것을 곳곳에서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인간이란 기억을 각각 다른 순서로 재배열하는 법이다." (본문 중에서)
"혹시 이처럼 불행한 옛일조차도(그는 한참 동안 어떤 표현이 좋을지 고민해본다) 미묘한 기억의 조작에 따라 미세하게 다른 빛깔로 채색되고 만 것은 아닐까? 가장 은밀한 방식으로 침윤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분명히 셈을 다 치렀는데도 예기치 않게 남아 있는 계산서의 잔액처럼 말이다." (본문 중에서)
"영원한 수수께끼 한 가지. 어떻게 해서 우리는 어떤 결론에 다다르게 되고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는가? 어떤 순간에 우리는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 의식하게 되는가? 카미유의 대답에 스며들어 있는 무의식의 몫이 얼마나 되는지는 얼른 확답하기가 불가능한 문제이다." (본문 중에서)
더 나아가 '인식의 한계' 또는 '인식의 부조리'도 작은 소재로 삼고 있다. 안 포레스티에가 폭행으로 실신 해 있다가 의식을 어느 정도 회복했을 때 죽은 듯이 그대로 엎드려 있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처세라 할 수 있다. 안이 주변상황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핸드백까지 챙겨서 일어나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을 통해 강한 충격에 의한 인식의 부조리를 표현한다. 또 그것이 누구나 강한 충격에 노출됐을 때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을 행동과 상황묘사를 통해 읽는 이에게 충분한 공감을 얻어 내고 있다. 이것은 또 다시 충격적인 상황에 처한 카미유에게 향한다.
소설의 앞부분부터 작가는 대체로 염세적인 세계관 내지 사회관을 보여 주며 유지하고 있다.
"즉, 최악의 상황에서 황당해 보일 만큼 낙천적으로 대처하는 것이야말로 그나마 가장 나은 길이 아닐까. 그러니까 안의 농담은 긍정적인 징조다. 그 농담이 조금 더 이어졌다면 아마 카미유는 그녀의 퇴원수속을 밟으러 수납 창구로 달려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희망은 이토록 비열한 기만이다." (본문 중에서)
"희망은 실로 재앙 중에서도 최악의 재앙이다. 왜냐하면 희망은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라는 니체의 말과 대등하게 연장선을 이어간다고 할 수 있다.
"비극적 숙명은 안도하는 사람을 덮치길 좋아한다. 안도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볼 때만큼 비극적 숙명이 엄습하기 좋은 순간도 없다.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은 마치 우연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개입한다." (본문 중에서)
"부조리하게도 세상은 우리의 삶을 예고도 없이 이토록 참혹하게 짓밟는다. 그에 대해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피해자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조차 없는 불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본문 중에서)
최근 들어 한국 사회에서 보여지고 있는 납득하기 힘든 뉴스와 사건사고들을 보면 사회의 단면을 지적한 작가의 지적은 매우 적확하다고 공감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세태풍자를 넘어 살인사건으로 전부인을 잃은 한 남자가 4년만에 생긴 연인을 또 다시 강도사건으로 잃을 처지가 된 것 자체가 암울한 숙명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앞서 언급한 기억의 왜곡이나 인식의 부조리 역시 주인공 카미유가 처한 암울한 숙명적 현실을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 불운한 주인공이 억세게 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어느 정도 인정할지라도 그가 처한 상황에서 자칫 현실감이 결여된다면 독자는 공감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카미유는 단순 강도사건에서 피해자이자 연인인 안에게 필요이상의 살의를 드러내는 범인의 행적에서 끊임없이 의문을 갖는다.
"실제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무언가 이상하다." (본문 중에서)
만약 독자가 추리를 하자고 한다면 이 질문에서 출발하는 것이 정답이 될 것이다. 본격 추리물이 아니기도 하겠지만 '이렌'과 '알렉스'를 읽지 않은 독자에겐 이야기가 종반으로 치달을 때까지 별다른 단서가 잡히지 않는다.
"왜 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는 어쩐지 자기가 지금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 같다는 직감에 시달린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봤자 아무 소용없다. 아무래도 이 사건은 끝이 무척 안 좋을 것만 같은 예감." (본문 중에서)
작가가 던져 준 친절한 복선 중 하나이다.
"누군가가 불시에 재난을 맞을 때 겹치는 우연이란 언제나 무작위적인 법이다. 하지만 또한 이런 우연의 겹침 덕분에 카미유에게도 안 같은 여인을 만나는 날이 찾아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싸잡아서 불평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본문 중에서)
그러면서도 초반엔 이처럼 우연을 강조함으로써 돌발적이고 우발적 사건인 듯 포장 해 간다. 흔히 소설에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모든 것의 인과관계가 명확해지는 소설 종반에 가서는 "미래는 언제나 자기를 뒤따라오는 법이죠."라며 오히려 인과를 강조하기에 이른다.
"흔히들 사람은 상황에 따라 흔들리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닥친 일이란 우리가 스스로 빚어낸 결과물일 뿐이다." (본문 중에서)
결국 주인공 카미유에 의해 사건은 해결되지만 주관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희비가 명확하지 않은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으로서 '카미유'를 보자면 누구에게나 동정 받아 마땅한 기구한 삶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카미유의 삶을 통해 보면 작품 전반에 걸쳐 작가는 독자에게 과연 희망을 던져주기나 하는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생긴다. 작가는 마치 그것을 아껴두었다는 듯이 마지막 세쪽을 남겨두고 다음과 같이 꺼내어 놓는다.
"그래, 물론 나도 알아. '희생'이라는 말,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해왔다는 말, 참 가소롭지....요즘 자주 쓰이는 말도 아니고, 옛날 연속극 같은 데서나 나올 법한 표현이지.(중략) 그러니 누가 누굴 위해 희생한다는 게 전혀 가당치 않은 일만도 아니지.(중략) 바닥까지 가라앉기를 무릅쓰고,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는 게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잖나.(미소) 요즘처럼 각박하게 이기주의만 판치는 세상에서는 차라리 사치스러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안 그래?"
작가 피에르 르메트르는 자신이 탄생시킨 카미유보다 더욱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임에 틀림없다. 전화로 사건보고서를 독촉하는 미샤르 서장과 카미유가 통화하는 장면에서는 마치 독자가 당사자가 된 듯 하다.
카미유의 부하 루이가 보고하는 다른 사건들의 내용이나 카미유와 범인의 눈에 비춰진 주변사람들의 묘사를 보면 현대의 프랑스 사회도 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현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문화와 철학의 나라이며 선진국으로 칭송되어지는 프랑스라 할지라도 현대인의 본성이 만든 무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을 통찰하는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 하다.
이렇듯 피에르 르메트르의 문체, 서술기법, 묘사력 등은 마치 한편의 영화 시나리오처럼 친절하고 선명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잘 만들어진 영화 한편을 보는 듯하다. 만약 이 작품이 시나리오라면 카메라 워킹까지도 고려된 듯한 작가의 묘사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440쪽이 넘는 분량이지만 읽다보면 어느 덧 마지막장을 넘기고 있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만 아무래도 시리즈물이다보니 앞선 작품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피에르 르메트르의 작품을, 더구나 베르호벤 시리즈를 처음 접한다면 가능한 순서대로 '이렌'과 '알렉스'부터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런 수사물에서 함께 추리하는 것을 즐긴다면 더욱 그렇다. 그래야만 살아 숨쉬는 인간 카미유의 고뇌에 더욱 근접 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본 시리즈를 각각 봐도 재미있지만 순서대로 볼 때 시리즈만이 갖는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듯이 베르호벤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베르호벤 시리즈는 추리소설의 장점인 인간심리와 본성에 대한 묘사, 스릴러의 긴장감을 두루 갖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문학에 대한 갈증도 풀어 줄 수 있는 현대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