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
정지돈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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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라니... 나도 서울과 파리를 많이 걸었다. 그리고 심지어 정지돈이 파리를 걷고 있었을 때 나도 파리를 걷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 친근감을 느끼며 책을 읽었다. 2019년 9월, 그때의 파리가 그립고 책을 읽으니 파리에서 라임을 안 타본 게 아쉽네. 하지만 라임은 무서우니깐 안 아쉽나... 한편 나는 작년에 서울과 대구를 열심히 걸었다. 그건 산책이라기보다는 운동에 가까운 걷기였다. 목적지가 정해져 있었고 먼 곳이어도 내 두 발로만 가겠다는 다짐을 품고 집을 나섰다. 백수였고 가진 돈이 없었지만(지금도 여전히 없지만) 시간은 많던 시절이었다.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던 불안과 우울도 걸으면서 조금씩 떨쳤다. 혼자 걸어서 가끔 무서운 순간은 있었지만 외로운 순간은 없었다. 익숙한 장소여도 교통수단 없이 내 두 발만으로 가본다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고 혼자였기에 그것을 오롯이 감각할 수 있었다.


“걷는다는 것이 권력이 없고 지위가 낮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리베카 솔닛의 말이다. 걷는다는 것은 돈이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동시에 쾌적한 곳을 평일 낮에 걷는다는 것은 돈이 지나치게 많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다시 리베카 솔닛의 말을 인용하면 “사람들이 안 걷게 된 것은 걸을 만한 장소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걸을 시간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걷는 행위는 빈곤한 동시에 부유하다.”(p.11)


그리고 이제는 정말 걸을 시간이 없다^^ 그때 열심히 걷길 참 잘했어!! 이렇게 될 줄 알아서 열심히 걸었고, 더 걸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여담이지만 작가가 되는 데 가장 필요한 재능은 착각이다. 문장력이 좋거나 머리가 좋거나 인내심이 있거나 책을 좋아하거나 기타 등등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수 있다, 라는 착각이다. 이건 굉장히 슬픈 지점이다. 만약 작가를 만드는 요인이 남다른 언어 감각 같은 실질적인 재능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착각과 자신감이라면, 많은 작가들이 왜 그렇게 덜되어먹은 건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뭔가를 해내는 인간들의 성취 중 많은 경우가 단지 자기 확신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은 세상이 왜 이렇게 엉망인지 알려주는 것 같다. 자기 확신은 완벽한 픽션인데, 사실 인간은 픽션적 존재고 세계(역사)는 픽션의 실현과 재현의 교차로 이루어지므로 픽션에 대한 확신이 그것을 실현시켜주는 원동력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p. 42)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는 데도 착각과 자기확신이 필요한가. 시인과 소설가는 착각이 아니라 그냥 쓰면 되는 거 아닌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수 있다'라는 착각이 아니라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행위 자체가 시인이나 소설가를 만드는 거 아닌가. 그런데 결코 혼자 만들 수 없는 영화의 경우 착각과 자신감과 자기확신은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 중요한 재능이 없어서 다른 일을 찾았지.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가능하다고 착각하고 그걸 자기 확신으로 밀어붙여서 스탭들을 설득시키고 기어코 찍어내는 일. 그 과정에서 겪는 온갖 모진 수모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꼭 이렇게 찍어야 한다는 자기 확신과 당위가 내게 없었다. 사실 영화라는 건 세상에 꼭 만들어질 필요는 없으니까. 영화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이 장면을 꼭 이렇게 찍어야할 이유는 없단 말이다. 역시 나는 착각하는 인간은 아니야.... 동시에 나는 자신감을 조금 얻었다. 결국 다 좆밥이구나! 단지 자신감과 자기확신으로 가득찬 사람이 해낸다는 사실은, 당장 내게 (착각을 포함한) 재능이 부족해도(나 역시 좆밥이어도) 그냥 해보자라는 희망을 준다.


출퇴근 시간 2호선을 타고 강남을 오간 사람은 알 것이다. 지옥철이 은유나 수사가 아님을. 지옥은 사회가 필연적으로 생산하는 일종의 상태다. 일시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생산되는 이러한 상태는 인간들로 하여금 다른 삶 또는 상태를 꿈꾸게 한다. 다시 말해 지옥은 사회의 필수 요소이며 엔진이고 동력원이다. 사회와 지옥은 너무 긴밀히 접합되어 있어 지옥을 떼어내면 사회가 망가진다. 이를테면 지옥철이 없고 차가 막히지 않는 출퇴근 시간, 모든 사람이 원하는 시간만큼 일하고 자유롭게 이동하는 사회는 사회가 원하지 않기에 불가능하다. 나인 투 식스를 유지해야 하는 필수적인 이유에 대한 담론은 사회의 유지를 위해 우연히 구성된 픽션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하철은 독서하기 가장 좋은 공간이다. 픽션에서 픽션으로 갈아타기. (p.167)


다시 월요일이 돌아왔고 출근이고 지옥이다. 보기 싫은 얼굴들을 봐야하고 쏟아지는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일주일 중 5일의 9시간 이상을 지옥에 내어주어야 한다. 정말 다들 이렇게 살아온건가, 아직도 현실이 믿어지지 않지만, 정지돈은 지옥은 사회의 필수 요소이며 엔진이고 동력원이라고 말하니, 에휴... 따지고 보면 나도 직장인이 된 이후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이것저것에 관심을 가지는 등 얼마 안되는 자유 시간을 더 다채롭게 보내려고 노력하게 됐다. 이전에 출퇴근의 지옥이 없던 시절엔 일상은 평온했으나 종종 무기력했고 의욕만 있었지 행동으로 이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매일 탈출을 생각하며 퇴근 후 다른 일을 모색하며 무엇보다도 행동한다! 일은 지옥이 맞지만 살짝 귀엽게 바꿔 말해보자면 메기 같은 것이랄까. 하지만 지금 우리 어항엔 메기가 너무 많아... 지옥이 없는 세상까진 아니더라도 그 비중이 줄어들길. 마무리는 늘 그렇듯이 주4일제가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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