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땅에서, 우리 이금이 청소년문학
이금이 지음 / 밤티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흔한 딸 맘들이 그러하듯이 나에게도 로망이 있다. 딸과 둘이서 떠나는 모녀여행에 대한 로망.

언젠가 이 지긋지긋한 바이러스 세상이 끝나고 다시 자유롭게 비행기가 뜰 수 있을 때. 아직은 어리고 귀여움이 더 많은 10세 내 딸이 내 키만큼 자라고(그런 날은 빨리 올 것 같지만_-_), 자기 짐 정도는 충분히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 때. 둘이 떠나서 알콩달콩 추억을 만들고 돌아올 수 있는 모녀여행을 꿈꾼다.

이번에 읽게 된 이금이 작가님의 소설 <거인의 땅에서, 우리>에는 이렇게 모녀가 함께 떠나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것도 흔해빠진 여행지가 아니라 장소는 무려 몽골! 그 중에서도 그들이 대부분을 보낸 곳은 지평선만이 끝없이 펼쳐진 고비사막!

그.리.고.
현실의 나는 언젠가 떠날 모녀여행에 대한 로망만을 꿈꾸고 있는데, 소설 속에는 오히려 현실 딸, 현실 엄마가 있었다. 아... 사춘기 중학생 딸아이와 떠나는 길이 꼭 즐겁기만 한 건 아닐 수도 있겠구나... (깨달음)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보면서도 '나는 별빛보다는 환한 전등 빛 아래서 팬픽을 쓰거나 SNS를 하거나 동영상을 보는 게 더 재미있다'는 딸 다인이와 너 때문에 단체 생활에서 민폐일까봐 신경 쓰여 죽겠다는 엄마 숙희.

그도 그럴 것이 엄마 숙희가 '글무지개'라는 고등학교 문학동아리 모임 7명의 친구들과 떠나는 모임에 딸 다인이가 갑자기 꼽사리를 끼게 되었던 것이다. 또래 친구도 없이 혼자서. 친구들 다 타본 비행기 한번 못 타봤다고 투정부리던 다인이가 첫 해외여행이라고 설렜던 것도 잠시, 목적지는 유명한 관광지도 화려한 도시도 아닌 몽골의 사막이라니.

소설은 15살 다인이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1부 거인의 땅에서'와 엄마 숙희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2부 신기루', 이렇게 두 가지 시선으로 쓰여져 있다. 처음에는 그런 사실을 몰랐던 상태에서 주르륵 읽어나갔다.

1부에서는 여행 내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를 닮은 가이드 바타르와 잘 되고 싶은 마음뿐인 다인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어른이 된 지금의 내 마음으로는 '다인이는 국적도 다른 바타르가 진짜로 그렇게 좋나 왜 저러나' 싶기도 했지만ㅋㅋ 돌이켜보니 나도 중학생 때 2박 3일의 극기훈련을 가서 겨우 이틀 동안 봤던 교관이 좋아져 헤어질 때 진심으로 아쉬워했던 마음이 생각났다. 아. 정말 그랬네. 까맣게 잊고 있었네. 작가님은 어쩜 이렇게 그 시절 그때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잘 알고 계실까.

2부에서는 이제 나이 50을 바라보는 엄마 숙희의 마음 속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인이의 시선에서 보였던 엄마 숙희는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오빠만을 챙겨주던 엄마, 감성이라고는 없는 엄마, 공부가 제일 중요한 엄마, 문학동아리랑은 세상 어울리지 않는 엄마였다. 그런데 숙희는 왜 그런 포지션을 맡아야만 했을까. 숙희가 동경하면서 동시에 질투하는 '듣보작가' 춘희는 어떻게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

주르륵 다 읽고 덮었던 책을 독서일기를 쓰기 위해 다시 펼쳐 읽어나가는 와중에, 초반에 써 있었지만 별 생각 없이 지나쳤던 어떤 말이 눈에 띄며 갑자기 마음에 콱 박혔다. 엄마한테 다인이가 나도 여행에 따라가겠다고 조르다가 방해만 될테니 안 된다는 답을 듣고 그러면 안 따라가는 대신 용돈 얻어내기 작전에 성공한 상황이었는데.

"그런데 여행을 얼마 앞두고 갑자기 엄마가 마음을 바꿔 나를 데려가겠다고 한다."

특별할 것 없는 저 말이 갑자기 눈에 띄게 된 건, 뒷부분을 통해 숙희가 어떤 마음으로 다인이에게 여행을 제안했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앞두고 갔던 병원에서 자신이 자궁암 초기라는 걸 알게 된 숙희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다인이와 함께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흘려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던 열 여덟 나이에 자궁암으로 엄마를 잃었던 숙희. 그래서 그때부터 자신의 삶은 너무 힘들어졌고 또 많이 달라졌다고 믿어왔던, 그래서 자신의 아이들만은 절대 그런 상황 속에 놓이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살아왔던 엄마 숙희였기에 자신도 똑같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을 것이다. 병을 이겨내지 않고 삶을 포기해버렸던 엄마에 대한 원망까지 다시 떠오르면서...

다행스럽게도 숙희는 사막이라는 여행 장소를 통해서, 얽혀 있던 친구와의 감정 정리를 통해서, 딸과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묵은 상처를 조금씩 보듬을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
나는 주희를 무시했으며 춘희를 동경했다. 그리움과 부러움, 우러러봄이 동경의 빛이라면 좌절, 질투, 애증은 그 그림자일 것이다.

+
"실은 고3 때 가출했던 기는 어무이한테 반항하느라고 그런 기다. 내는 사춘기가 그제사 왔거든. 어무이가 내한테 맘대로 살라 카는 게 무책임한 기라고 생각했다. 그런 어무이를 괴롭히고 싶더라. 딸이 인생 망친다 카는데도 초연한 얼굴로 그 잘난 인생철학 지껄일랍니꺼, 하고 말이다. 그래서 어무이 패물 들고 집 나갔다 아이가. 한 달만에 돌아오니까 우리 어무이, 야단은커녕 그동안 배곯았을 기라고 사골을 한 들통 고더라. 그때 알았다. 우리 어무이는 그렇게 생겨 먹은 기고 자기 본성대로 살고 있는 기라는 걸. 내한테는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길밖에 없었다. 어무이를 사랑하든지, 미워하든지."

+
춘희의 설렘과 흥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과시도 허세도 아닌 진심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지겨워하며 빠져나온 길에 새로운 기대를 품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나는 춘희와의 이별을 듣는 순간 휩싸였던 기분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 애가 품고 있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부러움과 시샘이었다. 그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환이기도 했다.

+
"그런데 아줌마도 여자애였잖아."
그렇다. 우리도 여자아이였던 적이 있었다. 지난밤까지 선명하게 기억했던 그때가 거인족 시대 일인 것처럼 까마득했다. 갑자기 코끝이 시큰했다.

+
"지 엄마가 얼마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지 알면 그게 진짜 힘이 되는 기제." 춘희가 했던 그 말이 맞는다.

+
내가 그날, 모래 언덕에 앉아 울었던 건 두려움 때문이었다. 눈앞에서 신기루가 홀연히 사라지는 걸 본 순간 내가 믿고 있던 것들이 실은 신기루처럼 허상이었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덮쳐 왔다.


------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면서 엄마 숙희는 자신이 믿고 있던 것들이 허상이었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울었다.

믿는 대로 살아온 것이 자기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그나마 덜 두려웠겠지만 엄마로서, 자기가 믿었던 방식대로 아이를 키워왔던 엄마로서 만약 그게 허상이고 틀린 것이었다라고 한다면 그건 정말 얼마나 두려운 일이 될까. 같은 엄마로서 숙희의 그 마음에 깊이 공감을 하면서 읽었다.

하지만 딸 다인이는 엄마 숙희가 두려움으로 바라봤던 신기루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엄마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야?"
"너 먼저 말해 봐."
"나는 신기루."
"왜?"
"그냥. 없는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해. 여행하는 동안 신기루를 세 번 봤잖아. 그런데 볼 때마다 느낌이 다 달랐어."
"어떻게?"
"모래 언덕에서 봤을 때는 처음 보는 거라 신기하기만 했어. 그리고 길 잃어버렸을 때 신기루를 두 번 봤잖아. 그때마다 진짜 호수인 줄 알고 막 좋아했다가 아니라서 엄청 실망했고. 그래서 처음에는 없는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속임수 같아서 나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진짜 물하고 게르를 만나고 길도 찾고 나니까, 만약에 그때까지 신기루를 한 번도 못 봤으면 어떻게 불안하고 무서운 걸 이겨 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리고 엄마,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사막에 신기루가 없으면 너무 지루하고 심심할 거 같지 않아?"


엄마 숙희는 자신의 엄마에게 일어났던 과거의 일에서 자유로워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기루를 보며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믿고 있던 게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다인이에게 신기루란 신기한 것이고, 있는 그대로의 것이고, 나아가서는 희망 같은 거였다. 음. 확실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가 조금 느껴지려고 한다. 아이는 나와는 다르다는 것. 숙희는 자신이 겪은 일을 아이에게 되물림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런 의식적인 노력이 아이들에게 오히려 벽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아이들이 자기 생각대로 나아가려는 앞에 자꾸 막아서는 벽. 그보다는 춘희처럼, 엄마가 행복한 시간을 살면서 자신을 믿고 있다는 마음을 알게 될 때 아이들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

<거인의 땅에서, 우리>는 2012년에 나왔던 소설 <신기루>의 개정판이라고 한다. 소설을 읽으며 '듣보', '제맛', '성덕', '꾸안꾸'... 같이 요즘 쓰는 말들이 곳곳에 담겨 있는 걸 볼 때마다 웃음이 났다. 찰떡 같은 제목으로 이름만 바뀐 게 아니라 2022년 버전으로 완전 탈바꿈 했을 개정판을 준비하시며 작가님께서 또 얼마나 공을 많이 들이셨을까. 처음 버전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문장 하나하나 안 바뀐 문장이 없을 것 같다.

또 문득, 이 시기에 이 책을 다시 출간하고 싶으신 이유도 있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행을 마음대로 떠나지 못하는 우리들을 위해 책으로나마 떠나볼 수 있도록...??
나도 한 방 제대로 맞았다. 여행.이 너무 가고 싶어졌다. 그것도 몽골 여행.
거인의 땅에 가면 나도 뭔가 느껴지는 게 있을까. 안 가봐서 모르겠다. 가서 느껴보고 싶다.
그때 같이 떠날 '우리'는 과연 누가 될까.
딸에서 엄마가 되어버린 나와 언젠가 엄마가 될지 모르는 딸과의 여행도 좋겠고
세월의 흐름에 겉모습만 변했을 뿐 속은 그대로인 친구들과 함께여도 좋겠다.
아, 그래도 친구들 여행에 딸을 데려가는 것만은 하지 말아야지.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며 제 진심을 담아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