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그림자 - 김혜리 그림산문집
김혜리 지음 / 앨리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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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기자의 그림 에세이.
독자에게 친절히 설명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일기처럼 단정하고 담담하게 쓴 책이다.
난 책을 휘리릭 읽는다.
맘에 드는 문장은 열번이고 곱씹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줄 치거나 메모하지도 않는다.
흔히 바람직하다고 교육계에서 권장하고 있는 그 모든 독후활동에도 회의적이다.
독서라는 무한대의 영역에 대해 어떤 한계도 긋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독서는 부담없어야 하고, 즐거워야 한다.
어차피 그때의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만
책은 내안에 축적된다.
그럼에도 이 블로그를 쓰는 건
그래, 모순이고, 때로 힘들다.
다만 책을 읽던 그 때의 느낌을 최소한의 양으로
잡아 놓고자 하는 것?
작가도 말한다.
존 어빙의 표현을 빌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는 소리'라고.
작가의 글이 미술품의 매혹에 관해 결국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걸
처음부터 얼마간 알고도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그림과 마주친 어떤 날, 특정한 시각의 빛과 공기에 의해 우연히 드리워졌던 작품의 그림자에 대해
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림자는 언제나 현존의 증거다.
회화의 기원은 한 처녀가 전장으로 떠나는 연인 대신 간직하고자 그의 그림자 테두리를 따라 그린 실루엣이었다.
피터팬의 웬디는 영원한 소녀 피터에게 그림자를 꿰매어 줌으로써 현실에 착지시켰다.
웬디, 그녀는 나의 알리바이다.
그림자 테두리를 따라 그린 실루엣.
글을 쓰고 나면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민망함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
언어와 그 표현의 한계를 알면서도 다시 글을 쓸 수 밖에 없는 것
찰나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남겨 두려는 것
현존의 증거이니까. 존재증명, 또는 부재증명?
누가 뭐라고 주장하건,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미칠 수 있는 최선의 작용과,
예술이 인간에게 끼칠 수 있는 가장 큰 영향은, 구원이나 계몽이 아닌 영감(inspiration)뿐이라고
믿어서였다고.
책 속 그림과 글 중 내 심장을 훑고 간

것이 아래의 그림이 전부가 아니나
다음과 같이 고졸하게 남겨둔다.

 

도르예 커스텐 신노 '봄날의 쾌활한 뱀'
'리바이어던'에 나오는 '우로보로스'라는 뱀을 본 적 있니?
제 꼬리를 삼켜 하나의 환을 이루는 홀로 완전한 자.
그는 독인 대신에 치유제이고, 여인이자 사내이며, 지혜이자 정념이야.
끝이 곧 시작이고 시작이 곧 끝이며, 스스로 잉태하고 스스로를 죽이지.
뱀이 되고 싶어. 사랑받지 못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도록.
 
조르주 피에르 쇠라 '에덴 콩세르'
유화 앞에서 지독히 신중한 쇠라는 종이와 콩테를 잡으면 낭만에 휘둘린다.
색점이 또렷또렷한 유화와 달리 그의 소묘 선은 우단의 표면처럼 결을 형성할 뿐 분별하지 않는다.
무른 콩테 크레용과 짜임새가 불규칙한 미샬레 종이.
쇠라가 이용한 두 재료는 서로를 감싸고 저항하며 최소한의 터치로 형태와 빛의 분포, 분위기를 묘파한다.
거미가 자아낸 실로 짠 베일처럼 고개를 돌리면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쇠라의 소묘와 유화는 입자를 그린다는 목표는 같지만, 상이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결국 쇠라의 집요한 점묘화는 그의 소묘가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답을 뭇사람에게 입증하기 위해
짐짓 나열해 보인 풀이과정의 식처럼 느껴진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 '청색과 금색의 야상곡 - 낡은 배터시 다리'
교묘한 생략으로 완성된 야상곡. 이 화폭에 귀를 기울이면 어느새 한줄기 강물로 흘러가는
풍부한 펼침화음이 들려오는 것 같다. 화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빛이 사위고 그림자가 깊어지면 사소한 디테일은 사라지고 자질구레한 모든 것이 퇴장한다.
사물은 위대하고 강력한 덩어리로 보인다.
단추는 보이지 않지만 옷은 남는다. 옷은 보이지 않지만 모델이 남는다.
모델이 보이지 않게 되면 그림자가, 그림자조차 사라지면 마침내 그림이 남는다.'

 

발튀스 '캐시의 몸단장'
훗날 히스클리프와 스스로를 동일시하지 않았냐는 비평가의 질문에 발튀스는
'나는 캐시와도 동일시했다. 위대한 서양미술의 다수는 뭔가를 재현하는 예술이 아니라
동일시하는 예술이었다.'라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무뚝뚝한 화가가 뭐랬건 '캐시의 몸단장'은 한 명의 창작자가 다른 예술가의 팬으로서
열애하는 텍스트와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한 방법을 보여준다.
하긴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때가 있었다.
소솔과 그림 속 세계와 현실을 가르는 벽이 훨씬 부드럽고 투명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던 시절이.

 

오노레 도미에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
꿈에서 깨어나 제정신을 차린 알론소 키사노는 비참해진다.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열망했을 때 와주지 않았던 비극은,
기막히게도 그가 모든 로맨틱한 각오를 버리자 불현듯 찾아온다.
모든 허물과 민폐에도 불구하고 산초는 돈키호테를 사랑했다.
우리가 예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노먼 록웰 '집을 떠나며'

농사일로 거칠어진 아버지와 대처의 대학으로 떠나는 아들이 허름한 트럭에 걸터앉아 있다.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차표와 아래쪽에 보이는 침목으로 보아 장소는 간이역이며,
날 세워 다린 아들의 양복바지 위에는 어머니가 싸 준 도시락과 이별을 슬퍼하는 개의 머리가 얹혀 있다.
이 그림의 드라마는 시선의 교차에서 나온다.
부자는 각자 반대방향을 보고 있다.
젊은이는 홍조 띤 얼굴로 목을 길게 빼고 다가오는 미래에 넋을 빼앗겼고,
어깨를 늘어뜨린 아버지는 약해지지 않기 위해 모자를 꼭 쥐고 있다.

 

조앤 이어들리 '아이들, 글래스고항'
빈민가 아이들을 그린 이어들리의 작품에서 전후 다큐멘터리 사진과 영국 키친 싱크 리얼리즘의 미학을
연상하는 것은 온당하다. 그러나 여기에 '이 참상을 보라'식의 지적은 없다.
곤궁한 일상을 영위하며 매일 아침 끓어오르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재미난 일을 찾아 뛰쳐 나오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일일이 불평하지 않는 강건함과 기묘한
스토이시즘이 있다. 삶의 특정 시기에만 열렸다 닫히는 인간 정신의 특별한 구역,
그것이 불러 일으키는 감정은 귀여움과 연민이 아니라 차라리 존경이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개'
공포의 근원이 하늘에서 오는지 땅에서 오는지조차 불분명하고 사방을 둘러봐도
개를 구해줄 지푸라기 하나 없다. 순종의 표시로 귀를 뒤로 젖힌 개가 주시하는 오른쪽 허공에는
어렴풋한 음영이 어른대는데 상상력을 발동하면 인간의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의 눈빛에는 원망도 호소도 없다.
그저 영문을 모른 채 곧 내려질 심판에 한없는 신뢰를 보낼 뿐이다.
그것이 자기를 끝장낼지언정.
돌이켜보건대 우리 모두도 한 번쯤은 이 개처럼 연약하고 맹목적이었다.
고야의 '개'는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깊은 우물에 빠져 허덕였던 인생의 연약했던 한 철을 상기시킨다.
또한, 신의 뜻과 그 종착점을 알지 못한 채 오늘도 걷고 있는 이 길의 풍경을 멈추어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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