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에 다가서기
강영조 지음 / 효형출판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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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탄생하는 것이다”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8> 『풍경에 다가서기』

이진숙 kmedichi@hanmail.net | 제201호 | 20110116 입력 height=0 marginHeight=0 src="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Article/@reporter" frameBorder=0 width=0 marginWidth=0 scrolling=no>
클로드 로랭의 ‘이집트로 도피 중 휴식을 취하는 예수 일가가 있는 풍경’. 황량한 자연 풍경과 폐허를 고대 문명을 동경하듯 묘사하고 있다. 효형출판사 제공
“왜 요즘 젊은 화가들은 풍경화를 안 그릴까”라는 우문에 던진 한 지인의 현답. “그릴 만한 풍경이 없는가 보지.” 창 밖으로 눈길을 던지니 빽빽한 빌딩 숲. 날선 기하학적 도형의 현란함이 하늘 끝까지 차있다. 그러고 보니 도시 조형의 기하학적 패턴의 아름다움을 그린 그림들은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굳이 풍경화라고 부르지 않는다. 21세기는 풍경화를 잃어버린 시대인가. 아니다. 때로는 ‘이발소 그림’이라는 형태로도 풍경화는 여기에 있고 여전히 우리에게 위안과 안식을 주고 있다. 조경학자 강영조의 『풍경에 다가서기』(효형출판사·2003·1만8000원)에서 나는 풍경화를 이해하는 몇 가지 흥미로운 코드를 발견했다. 실제 풍경을 기획하는 데 관심이 있는 조경학자의 시선은 실제 풍경과 풍경화의 관계를 아우르며 미술사학자들과는 또 다른 풍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서양 풍경화의 역사는 이렇게 말한다, 태초에 풍경화가 있었다고. 아름다운 풍경을 형용하는 ‘그림 같은(picturesque)’이라는 단어는 ‘그림(picture)’이 먼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화가가 발견하고 구성해낸 아름다운 풍경화로 풍경 감상법을 눈에 익힌 사람들이 실제 풍경에서 그림 같은 풍경을 발견해내고 더 나아가 그런 풍경을 만든다. 17세기 클로드 로랭의 풍경화를 사랑한 사람들이 100여 년이 지난 후 풍경화 같은 정원을 만들어낸 것이 영국식 정원이다.

풍경화가 일찍이 발전한 동양에서는 자연에 대한 시문학의 예찬이 풍경화에 선행한다. 중국의 ‘소상팔경’에서 시작된 한국의 ‘관동팔경’, 일본의 ‘오오미팔경’ 등의 선정과 이와 관련된 그림들은 문학적 상상력으로 고안된 풍경 감상의 패턴이 적절한 지점과 조우하며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들은 좋은 풍경을 선별하는 눈을 만들어준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풍경화 속에서 체험했던 풍경을 창문 너머의 정원 공간에 그대로 실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조경학에서 말하는 풍경의 탄생이다. 신선경을 재현한 백제의 왕궁이나 사대부의 별서 정원, 영국의 풍경식 정원 등은 모두 화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이상적인 풍경을 현실의 정원으로 만든 것들이다. 이것들은 다시 한번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풍경의 예제들로 풍경 감상법의 일차적인 교과서가 된다. 저자의 주장대로 풍경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탄생하는 것이다.

지구가 탄생한 이래로 자연은 늘 거기 있었다. 무심한 자연이 풍경으로 탄생하는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예술가들의 새로운 시선’, 예술가들이 고안해낸 일종의 풍경감상법 덕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서양에서 풍경화는 17세기에 시작된다. 시민적 자부심과 향토심이 깊었던 네덜란드 작가들은 풍경화에 독자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서양의 풍경화가 풍경의 시각적인 전유에 중점을 두는 반면, 동양의 산수화는 단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풍경 속에 들어가 즐기는 와유(臥遊)를 위한 그림이다. 원근법의 구속을 받는 서양화에 비해 훨씬 자유로운 풍경감상법을 담고 있다. 저자는 정선의 그림 속의 풍경감상법을 세세히 펼쳐 보여준다. 정선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누각들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지점과 시점을 암시한다. 정선의 그림 속에는 둘러보고, 올려보고, 내려보고, 지나치며 보고, 넘어보고, 사이로 바라보고, 마주보는 다양한 풍경감상법이 구현돼 있다. 와유적 풍경 감상이란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사용하듯이 보는 것”이다. 풍경은 시각·청각·촉각·후각, 그리고 지역 음식을 먹는 미각까지 동원된 입체적 감상의 대상이 된다.

이로써 풍경은 그저 볼 수 있는 시각상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된 공간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풍경화가 구현한 다양한 풍경감상법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풍경화가 인류가 공유한 근원적 체험의 파장 안에 있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원한 ‘조망’과 정자나 누각 등 ‘은신’할 수 있는 건물 등이 있는 풍경을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원시의 인간이 견지하고 있던 생존을 위한 시각 행동이 현대인에게는 미적 체험의 규준”으로 자리바꿈했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힘겨운 투쟁 속에 있던 원시 인류의 고독감은 미지의 자연을 시각적으로 자기화하고 일체감을 느끼고자 하는 욕망의 시선과 결부된다. 바라보는 주체가 정립된 다음에야 자연은 풍경이라 이름이 붙으므로 저자는 풍경은 ‘결연의 미학’, 즉 관계의 미학 속에 있다고 한다. 자연 속에서 안식처를 찾으려는 욕망이 작동함으로써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풍경화에는 ‘낙원에 대한 동경’이 공통적으로 담기게 된다. 낙원은 두고 온 고향처럼 늘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풍경화 속의 풍경은 늘 언젠가는 가보고 싶은 곳이다.

한국의 성인들에게 고향 풍경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물으면 대략, ‘울타리가 쳐진 초가집, 까치밥이 달린 감나무’ 등을 떠올린다. 대도시에서 태어나 아파트 놀이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공동주택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두고 온 고향에 관한 모든 것을 함축한 그림이 바로 박수근의 그림이다. 황토빛 흙의 색감과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질감, 다소 둔탁하고 사물처럼 보이는 인물들 역시 고향의 풍경적 요소를 이룬다. 박수근이 국민작가인 이유다. 풍경의 탄생에서 결정적인 요인은 풍경 자체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풍경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 즉 사람들 속에서 갖는 의미다. 박수근의 소박한 전근대적인 풍경은 고향이라는 이름과 결부되며 계속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현대 미술에서는 풍경화가 거의 사라졌다. 19세기 말 사진의 등장과 더불어 고전적인 풍경화가 힘을 잃은 측면도 있지만 마구잡이개발로 말미암아 풍경 속에서 의미를 찾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작가들은 풍경을 발견하는 대신 직접 풍경을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크리스토와 잔클로드, 로버트 스미슨, 월터 드 마리아 같은 대지미술가들은 자연물에 인공물을 더해 새로운 풍경을 창조했다. 자연에 부가된 인공물은 자연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풍경에 마음을 의탁하고 낙원을 꿈꾸던 과거 풍경화와는 큰 거리가 있다. 오감만족적 풍경 체험은 역시 잃어버린 과거의 것이 되고 말았나 보다.

낯선 나라에서 스타벅스나 맥도날드의 간판을 보고 반가움을 느끼는 것은 원초적 풍경 체험의 변형이다. 말이 안 통해도 거기에서는 먹어본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 낯선 거리를 친숙한 것으로 바꾼다. 그러나 이로써 동시에 풍경의 개별성은 상실되고, 특정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나의 개별성도 무화된다. 창 밖으로 펼쳐진 빽빽한 빌딩 숲을 바라보며 다시 물어본다. 박수근의 그림 속에 담긴 고향 풍경은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까. 나와 유의미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풍경, 우리에게 안식과 위안을 주는 풍경은 어디 있는 것일까. 지인은 대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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