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 길 위에서 만난 나와 너,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
조아연 지음, 고요한 사진 / 하모니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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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낯선 곳에 던져지는 일. 반복되는 것들에서 벗어나는 용기. 새로움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 <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의 작가 조아연은 자신이 도망치듯 여행을 떠난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것마저 좋아 보였다. 도망에도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을 찾아 떠나는 용기. 그곳에서 작고 별 볼 일 없지만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듬뿍 담아오는 세심함. 책 곳곳에서 작가의 따스함이 묻어났다.




고백하자면, 여행 책은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별로 기대가 안 되기 때문일까. ‘나 이런 거 했소’. ‘이런 곳도 갈 줄 압니다’라고 말할 줄 알지만 내가 듣고 싶은 ‘그래서 이 여행이 나에게 어땠는지’로 가득 찬 책과의 만남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여행 에세이는 ‘그래서 이 여행이 나에게 어땠는지’로 꽉 차 있다. 신기하게도 멋진 풍경을 묘사하는(그런 묘사도 별로 없긴 하지만) 부분보다, 작가의 이야기가 눈에 와닿았다. 풍경이 멋있다, 좋다고 말하지 않고 고요한 작가의 사진을 보여주는데, 참 좋았다. 글과 그림의 리듬이 좋았다. 글을 읽으며 여행이 이 사람에게 남긴 인상은 무얼까,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하다가 ‘어! 이런 생각을 했구나’ 드러난 부분을 찾으면 그렇게 기뻤고, 애정이 듬뿍 담긴 사진을 보며 ‘참 좋았겠다. 예쁘다.’ 느끼고 책에 빠져들어 갔다. 책의 중후반을 달리는 즈음, 엄마에게 ‘엄마, 어떤 책을 읽고 있는데 나도 여행 가고 싶어졌어.’라고 말했다. 엄마는 ‘그럼 그 책은 성공했네.’라 했다. 그렇다. <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는 나도 모르는 새에 마음 깊은 곳까지 울림을 줬다.






<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는 세 가지 이야기로 나누어져 있다. [나의 여행], [너와의 여행], [당신들]. 혼자 하는 여행, 같이 하는 여행,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을 나눠 소개한다. 나에게 여행 에세이를 쓰라 하면, 시간순으로 썼을 테다. 그래서 시간 순서는 뒤죽박죽이지만 마음이 차곡차곡 쌓인 이 구성이 꽤 마음에 들었다. 나는 [나의 여행] 파트가 제일 좋았다. 작가가 기억하는 여행의 모습이 가득했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 많았던 파트다.



겨울의 끝자락 두 마리의 고양이가 있는 풍경에 내가 있었다. 온종일 뉴욕을 정처 없이 떠돌다 돌아오면 어김없이 그곳에는 두 마리의 고양이가 있었다. p.18

딱 고양이 한 마리의 온도만큼 내 마음이 따듯해졌을 뿐인데 뉴욕의 겨울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p.18





‘그 두 고양이가 있었던 그 집이 가장 뉴욕다웠다면 너는 믿을까. p.17’. 어떤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면, 그 친구가 사랑스럽고 좋아짐과 동시에 나도 그 풍경을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생길 것이다. 고양이를 기르게 된다면 절대로 패브릭 소파를 사지 말라는 진지한 조언을 보내면서도, 고양이와 함께 사는 일 중 나쁘고 힘든 일은 없다며 고양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뉴욕 어느 아파트의 로라. 따스함이 뚝뚝 떨어지는 글들이 너무 좋았다. 담담하게 그 좋음을 풀어내는 작가의 방식도 좋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 고양이가 뭉텅이로 등장하는 것도, 두 마리 고양이가 있었던 로라의 아파트가 조금 그립다고 말하는 작가님도. 마치 뉴욕 여행에 함께했던 것처럼, 함께 뉴욕을 그리워하게 되었달까.




칠레 여행에서의 멜론을 떠올리며 어린 시절 실내화 가방을 흔들며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열어 플라스틱 통에 차곡차곡 담겨 있는 차가운 수박을 먹었던 기억을 소중히 꺼내 보는 작가. 그 기억은 작가의 것이기도 했지만 내 기억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 친구를 만난 것처럼 마음이 기뻤다. 어떤 여행지에서의 기억이 멋진 경관도, 사람들이 칭찬하는 오래된 유적지도 아닌 어떤 음식으로 기억된다는 거. 누군가 나에게 태국을 묻는다면 호텔 앞에서 손짓, 발짓하며 사 온 튀김을 아빠와 나누어 먹었던 밤을 떠올리고 말해줄 것이다. 책에 쓰인 글자를 따라 기쁜 멜론을 사 먹던 작가를 상상해보곤,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 흐름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기록한 이 책이 더욱 좋아지기도 했고. 어느 따스한 여행자를 따라 나도 모르게 그 온기를 느끼고 행복해하는 나 자신이 있었다. 꼭 여행이 떠오르지 않아도, 누군가의 따스함에 기대고 싶을 때, 이 책을 다시금 꺼내 봐야겠다.



두 고양이가 있었던 그 집이 가장 뉴욕다웠다면 너는 믿을까 - P17

그래서 제주도가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당장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장소.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잠시나마 숨을 쉴 수 있었고 편안히 머무를 수 있었다. - P43

그리고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절대로 남들에게 보여주지 못할 우스꽝스러운 춤을 함께 췄다. 그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방 안에서 둘만의 축제를 열었다. 어쩌다 운 좋게 날씨가 좋은 날이면 밖으로 나가 커피를 마시거나 영화를 보러 갔다. 그리고 날씨 핑계를 대면서 미루고 미뤄왔던 유람선을 탔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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