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 24시 - 상
마보융 지음, 양성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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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하다. 내가 장안의 한 가운데에 놓여있는 것 같았고 장소경이라도 된 마냥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중국 소설의 스케일을 느꼈다. 중국 문학은 거의 로맨스 소설로만 접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색다른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어느 정도의 역사적인 팩트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기 때문에 지루할 줄 알았다. 그리고 책의 두께도 두꺼워서 처음에는 읽기가 겁났으나 너무 재밌어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읽은 것 같다. 심지어 할 일도 많았는데 할 일 다 미루고 이 책부터 읽었다. 그만큼 재밌는 소설이다. 읽으면서 이 책이 재밌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우선 첫 번째는 시간적인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추격전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시간적인 제한이 없어도 긴장감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긴 하겠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 24시간이라는 시간적인 제한이 존재한다. 우리는 현재 24시간이라는 개념을 쓰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시진이라는 시간적인 개념을 사용했다. 하루는 12시진이고 한 시진은 두 시간이다. 이 책이 곧 중국에서 드라마화 된다는데 그 드라마의 제목이 <장안십이시진>이다. 시진이란 뜻을 몰라서 책등에 나와있는 제목이 무슨 뜻인가 했는데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시간을 뜻하는 것이었다. 장안이 통째로 없어질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기에 정안사는 11초가 소중한 상황이었다. 정안사의 사람들이 24시간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돌궐은 24시간 안에 어떻게 테러 계획을 실행시키는지 보는 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인 것 같다. 두 번째는 끊임없는 사건들과 인물들 간의 관계다. 한 사건이 끝나면 또 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 숨 돌릴 틈이 없이 다음 장을 펼치고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답답하다고 느낄 수 있는데 또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답답할 때 사이다같은 사건이 등장하기도 한다. 독자들과 밀당을 정말 잘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각각의 사건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있다. 인물들도 그렇다. 읽으면서 인물들이 차근차근 정리되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해서 당황스러울 수 있다. 누구는 동맹 관계고 누구는 적대적인 관계다. 하지만 이 관계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아직 상권밖에 읽지 않아서(장안 24시는 상, 하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뒤 내용을 잘 모르겠지만 아마 반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세한 것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말하지는 않겠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건과 인물이 유기적인 관계를 띄고 있다. 엄청 많은 사건과 인물을 배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색하지 않게 연결한 작가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이 책에서는 모든 인물이 다 중요하다. 한 명 한 명 다 각자의 특성이 있고 각자 맡은 일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이필과 장소경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정안사는 서역의 위협에 대비해 조직된 특수기관이다. 이필은 정안사의 젊은 수장이다. 그에게는 장안이 인생의 전부다. 장안이 곧 불바다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사형수 장소경을 석방하는 과감한 결정까지 한다. 처음에는 그도 장소경을 미심쩍어 했으나 장소경의 이력과 그의 눈빛과 행동을 보고 장안을 맡겨도 되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장소경 또한 장안의 백성들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소경은 조정에 깊은 원한을 품은 사형수였다. 나도 처음에는 장소경이 의심스러웠다. 그가 지혜롭긴 했으나 가끔씩 나오는 악랄한 행동에 섬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에 확신을 느낀 순간이 있었다. 장소경과 요여능의 대화였는데 그때 그는 "난 그들(장안성 사람들)과 함께할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사적인 감정 이전에 장안성의 사람들의 안위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평범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자신의 목숨마저 바치려 한 그의 모습에 감동을 느꼈다. 장소경을 조금이나마 의심한 내가 약간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아직 하권을 읽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배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필도 장소경만큼 장안성을 지키려고 애쓴다. 아마 둘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서로를 알아봤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들은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그저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다. 그래서 고관대작들을 증오하는 장소경이 과연 이필과 함께할지, 이필도 고작 사형수라는 인간을 계속 끌고 갈지가 의문이다. 얼른 다음 편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이 작품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 있다. 바로 '선택에 대한 책임'이다. 이야기의 인물들은 모두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필은 장소경을 선택했고, 장소경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장안을 지키기로 선택했고, 요여능, 서빈 등 모두 장안성을 위한 선택을 했다. 각자 자신의 운명을 자기 스스로가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인물들은 하나같이 다 자신에 대한 행동의 책임을 진다.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그들에게 장안사는 자기 나라 그 이상의 가치를 가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열정과 투지를 보여줬던 인물들. 그들의 선택에 대한 결과에 부디 좋은 일만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과몰입). 제발 해피엔딩이길....

넓디넓은 장안을 배경으로 짜임새 있는 내용을 구성한 마보융 작가. 옛날 대당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전혀 거리감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현대적인 느낌을 더 많이 받은 것 같다. 중국판 히어로물이라고 할까나. '문학귀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빨리 다음 편 읽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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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 욥기 43장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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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핀 시리즈 다섯 번째 소설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편혜영 작가님의 <죽은 자로 하여금>을 시작으로 벌써 다섯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작품과 다섯 번째 작품의 공통점을 말하자면 바로 종교적인 이야기를 배경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의 이면과 우리 삶의 모습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라는 제목 뒤에 '욥기 43'이라고 써져 있다. 실제로 욥기는 42장까지 있다. 작가는 그 후의 이야기, 혹은 욥기와는 전혀 다른 내용의 이야기 둘 중 하나를 쓰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아직까지 전자인지 후자인지 혹은 둘 다인지 잘 모르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욥기와 비슷하기도 하고 전혀 다르기도 하다. 나는 성경책을 단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없다. 한마디로 그냥 무지한 사람이다. 그래도 '욥기'에 대해서는 알아야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친구들에게 물어보기도 했고 어린이 성경동화책을 읽기도 했다. 짧게 요약하자면 성경 속의 ''은 정직하고 하나님을 잘 섬긴 사람이다.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많은 재산과 자식들을 가진 행복한 사람이었는데 사탄에 의해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자식들을 잃었을 때도 하나님을 외쳤던 욥이었는데 정작 자신의 몸에 직접적인 상처를 입게 되자 그제야 하나님을 원망하는 그런 사람이다. 작가의 말에 '하나님은 뭐,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고요.'라는 문장이 써져있다. 나도 뭐, 같은 입장이다. 욥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 그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소설 속의 최근직 장로가 바로 성경 속의 ''과 비슷한 인물이다.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잃고 자신의 목숨마저 포기하려는 순간 하나님을 만나 구원받게 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엔 반전이 숨어있다. 그리고 전말기라는 제목에 걸맞게 (문학과는 거리가 다소 먼) 인터뷰 형식에 따라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게 된다.

목양면 목양교회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그 건물의 지하 1층에는 최근직 장로의 아들인 최요한 목사가 있었고 그는 불길 속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최근직 장로는 과거에 사고로 아내와 자식들을 잃게 된다. 그 아픔에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는 순간 하나님을 만나고 제2의 인생을 살게 된다. 그 후로 새로운 아내와 아들을 얻게 됐으나 화재 사고로 똑같은 아픔을 겪고 만다. 최근직은 최요한이 하나님이 내려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은 최근직 장로를 하나님을 직접 만나신 성스러운 분으로 여겼으며 그의 아들 또한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최근직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으며, 그의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거짓이라는 것을 아들이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방화사건의 범인을 최요한 목사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가. 최요한은 신의 은총을 받고 목사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신을 의심하고 거부한다. 그의 곁에는 이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한낱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직은 하나님을 만났다는 거짓 이야기를 퍼뜨려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목양면의 ''이 된다. 그는 처음 아내와 자식들을 잃었을 때 나무에 목을 매달려고 했다. 하지만 과거 어머니와 산을 오르다 나무에 목을 매단 시체를 함께 치웠던 끔찍하고 무서운 기억 때문에 저런 거짓말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살고자 하는 자신의 욕심과 수치심을 하나님이라는 방패막으로 숨겨버렸다. 이 이야기를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그들은 그의 이면성에 아마 최근직을 장로로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다. 가족들 이전에 자기 자신의 목숨만을 생각했던 '''최근직'. 엔딩은 다르지만 그들의 모습은 상당히 비슷하다.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는 인터뷰 형식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취조실을 배경으로 마을 사람들, 최요한의 아내 그리고 하나님까지 취조한다. 특히 하나님이 나오는 부분은 충격적이면서도 재밌었다. 내가 생각했던 하나님의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작가가 노렸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그에게 무관심하며 그가 했던 모든 선택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오직 인간 최근직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소설을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이해하기에 있어서 그리 쉬운 소설은 아니며 또한 읽는 사람들마다 느끼는 게 다를 것 같다. 이기호 작가는 종교와 신,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인간의 이면성과 비루한 삶의 모습을 정말 잘 보여준 것 같다. 나는 소설 속의 인물이 진짜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했고 크게 공감했다. 물론 나의 해석과 생각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각자 생각하는 세계가 다양하면서도 다르고, 인간의 특성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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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편지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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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턱 막힌다. 첫 장을 펼친 순간부터 책을 덮을 때까지 그들의 만행에 구역질이 났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과연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으며 실제로도 책을 그냥 덮어버린 적도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 책을 소개해야 할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글을 써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위안부'는 아물지 않은 상처이며 피해자들의 고통이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인 상태이기 때문에 말을 하는 데 있어서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다. 8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다. 이 날을 맞아 나는 소녀상 공공조형물 지정 촉구를 위한 캠페인에 서명을 했다. 피해자들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할 수 있도록,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들을 상기시켜 다시는 비극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작은 일이라도 해야 한다. 김숨의 <흐르는 편지>가 바로 이러한 의도를 담아내고 있는 것 같다. 일본군 '위안부'의 아픔을 담아내는 작업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상이 안 간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장면들을 정말 더 끔찍하게 묘사하는 게 너무 과한가 싶기도 했지만 이것이 모두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된 수단이 아니었나 싶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며,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감히 그들의 고통에 연민을 느낄 수도 없었고, 공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피하고 싶었다. 너무 끔찍해서.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들어줘야 한다. 우리가 외면하면 이 끔찍한 사실들은 없어져 버리고 만다.

열다섯 살의 일본군 '위안부' 소녀인 금자. 그녀의 일본 이름은 후유코다. 소설 속에서 ''는 절대 금자여선 안되고 후유코여야만 한다. 후유코는 일본 군인이 지어준 이름이며 '작은 숲속에서 겨울에 태어난 짐승의 새끼'라는 뜻이다.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조선 여자들을 짐승 취급한다. 나는 이 서평을 쓰는 순간만큼은 후유코를 '금자'라고 부르고 싶다. 이름도 몸도 자아도 잃어버린 금자. 금자는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아서 위안소로 들어오게 된다. 위안소에서 짐승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고 폭력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자신의 생명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그녀는 다른 한 생명을 품게 된다. 책은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금자는 아이와 함께 자신도 죽어버리길 원한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안소는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강제로 끌려온 소녀들은 자기도 모르는 빚을 지고 있고, 그 빚은 하루하루 늘어만 간다. 제대로 된 옷도 없고, 제대로 된 밥도 주지도 않으면서 의식주에 해당되는 모든 것들이 다 소녀들에게는 빚이 된다. 탈출은 꿈꾸지도 못하며 그저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들을 부러워할 뿐이다. 그녀들이 (하고 싶지 않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을 내어주는 일과 일본의 승리를 빌어주는 일 뿐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한 생명을 보호하고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소녀들은 잘못한 게 전혀 없지만 이제 소녀들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당연스럽게 생각하며 자기혐오, 자기모멸 속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금자는 아기를 낳기로 결정한다. 아기와 자신의 죽음을 바랐던 소녀가 살고자 한다. 친구가 죽고, 군인이 죽고, 주변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계속해서 목격하면서 결국에는 삶의 태도를 바꾸게 된 것이다. 우리도 살면서 뭔가를 잃어버렸을 때 찾고자 하는 의지가 생길 때가 있다. 바로 이 경우랑 비슷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흐르는 편지>를 읽으면서 '안돼, 죽지 마', '제발 살아줘'라고 마음속으로 계속 외쳤다. 위안소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 게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제발 살아달라고 빌었다. 내가 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고 찾아가서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금자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감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의 선택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녀가 살아남았기에 지금 내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금자는 어머니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써 강물에 띄웠다. 그녀에게 있어서 편지란 그리운 나의 고향, 조선의 말을 쓸 수도 있었으며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낼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 편지가 정말로 어머니에게 갔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편지는 흘러 흘러 지금 우리에게 왔다. 이제 더 멀리 흘려보내서는 안된다.

김숨 작가님의 <흐르는 편지> 덕분에 한 번 더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현대문학 블로그 글에 써져있던 '문학이 역사를 기억한다'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책과 문학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역사 또한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계속해서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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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기원
천희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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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험기간 동안 책을 읽지 못해서 책 금단현상이 나타났었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진짜 책이나 읽을까 싶다가도... 다시 책상에 앉곤 했다. 드디어 길고 긴 시험과 과제의 늪에서 벗어나 가장 먼저 읽은 책. 천희란의 <영의 기원>이다. 책 읽은 지 오래됐기도 했고 뭔가 내가 좋아할 스타일이라서 금방 읽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읽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해하는데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 가볍게 읽을만한 주제가 아니었다. 읽는 내내 '죽음'이라는 그림자와 함께했던 것 같다. 작가는 끈질기게 죽음이라는 단어를 언급하고, 모든 에피소드의 주제가 '죽음' 하나로 설명된다. 8개의 에피소드에서 죽음을 겪는 인물이 반드시 등장하고, 죽음에 대한 문학적인 표현들이 곳곳에 포진돼 있다.   

 '죽음'이라는 단어와 함께 항상 따라오는 '그림자'와 '어둠'. 천희란 작가는 그림자와 어둠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해 죽음을 표현했다. 그것을 잘 표현해냈다고 생각한 이야기 중 하나가 「창백한 무영의 정원」이다. 핏기가 없이 창백한 무영(그림자가 없는)의 정원이라는 뜻이다. 어떤 한 세계에 종말이 예고되자 다섯 명의 인물이 자살 모임을 결성했다. 오프라인에서 만난 그들은 숲속의 별장인 무영의 정원으로 자살 여행을 떠나고 멤버들이 차례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의 순간을 서로 확인한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실명이 아닌 A, B, C, D, E라는 익명으로 활동하며, 만약 그들이 죽으면 그 시체 앞에서 나머지 사람들이 익명이 아닌 실명을 읊조린다. 그들만의 의식이다. '이름이 없는 존재'가 죽어서야 이름을 되찾게 된다. 종말의 세계에서 더 이상 살아갈 의욕도 없는 '불완전한 자아'의 모습을 무명의 인간들로 표현해낸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름도 없으며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어서야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화자인 '나'가 가장 마지막으로 죽게 되는데 그 마지막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저 글자를 읽는 것뿐이었는데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그림자라는 존재에 공포감을 느끼고 있는 '나'로 이해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그림자와 한 몸이 되어 오히려 죽음과 종말에 순응하는 '나'로 보였다. 이름도 그림자도 없던 그들이 죽음을 통해서야 새로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다. '선생님'과 '효주' 이 두 사람의 편지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선생님'은 '효주'의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목격자이다. '선생님'의 증언을 통해서 자신의 엄마가 사고가 아닌 자살로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이 두 사람은 유사 모녀 관계가 되었으며 효주는 선생님에게서 위로와 지지를 얻는다. 효주는 엄마의 죽음에 대해 처음에는 원망을 느꼈지만, 이제 곧 자신이 결혼을 하고 후에 엄마가 될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 때 엄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효주는 그렇게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선생님'의 편지는 반전 그 자체였다. 효주 엄마와 자신이 과거 동성의 연인이었고 그 죽음에 '효주' 자신이 연루되어있다는 것이다. 과연 효주는 어머님의 죽음을 이해했던 것처럼 선생님의 죽음,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숨겨진 사실들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이 이야기들 말고도 수많은 작품들이 '죽음'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끔 만들어줬다. 앞에서 말했듯이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으며 사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많다. 어려운 만큼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문학 작품에서 표현했던 '죽음'이라는 것은 끝, 종말, 마지막 이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에서 '죽음'은 또 다른 시작, 구원, 빛의 느낌이다. '죽음'을 이렇게 새로운 느낌으로 표현해낸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했다.

 그녀는 죽음을 소재로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죽음을 또 다른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기, 진심으로 애도하기,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잊지 않기.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들이다.

 이해하기에 있어서 그리 친절하지는 않은 소설이었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한 소설이었다. 앞으로의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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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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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이 책의 제목이자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석은 성경 속 예수의 말을 순응주의로 해석하였다. 그는 능력도 좋고 성실한 병원 관리자이다. 그리고 그의 후배인 무주’.

무주는 선도병원의 관리부 구매 담당으로 채용되었다가 후에 혁신위원회에 발탁된다.

무주는 이때부터 시험에 들고 만다. 항상 자신을 챙겨주고 책임감 있게 일을 했던 이석이 병원 돈을 횡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무주도 이와 같은 일을 겪어본 적이 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상사가 지시하는 대로 회계 부정을 저질렀고, 그러다가 발각되자 상사의 권고에 따라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아마 그는 이 당시의 일에 대한 용서를 받기 위해서, 자신의 정직성을 복구하고자 이석의 비리를 고발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고뇌한 이유는 이석의 가정환경을 알아서다. 자신이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에(비록 그렇게 되지 못했지만) 자신의 아이에게 권위 있는 아버지가 되리라는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아버지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석을 고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과 자신의 아이,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라면 결정해야만 했다. 자신은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이석 또한 자신과 같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병원 게시판에 그의 비리에 대한 비밀 글을 올렸다. 비밀 글이 오히려 마음이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글은 오히려 전혀 다른,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오히려 직접적인 고발보다 익명의 고발이 더욱 무서운 심리적 동요를 일으키게 된다. 무주의 글이 퍼져 결국 이석은 사직 조치를 당한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석은 실버타운 건설사업 본부장 직위로 병원에 복귀한다. 여기서부터 무주의 정신적 고통이 심해진다. 자신이 그를 병원에 내쫓았던 것, 그로 인해서 이석의 아이가 죽게 되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병원을 위해 선행을 했다고 칭찬해주는 것이 아닌 오히려 공명심에 눈이 멀어 비겁하게 행동했다고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에 대해 억울해한다. 하지만 이석도 결국 병원의 부패세력 중에 한 명이었고, 결국 무주는 혼자가 되고 만다. 그는 병원에게 외면받았고, 친구를 잃어버렸고, 아이를 잃어버렸으며 심지어 아내도 잃어버렸다. 모든 것이 그로부터 떠나갔다.

이 소설은 병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절대 메디컬 소설이 아니다. 경제적 인간이 패권을 잡은 병원이라는 장소를 통해 부패된 현대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죽은 자로 하여금>에 나오는 선도 병원은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 아니다. 환자를 생각하는 병원이 아닌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곳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도 의료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에 따른 보상은커녕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고, 처벌도 강하지 않으며, 자기 병원의 이미지만 살리기에 급급해 있다. 물론 병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많은 기업, 단체들도 그러하다. 선도 병원에는 부패된 자들만 가득하고 그리고 이 병원의 대부분의 관계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방관하는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현실에 순응해 버린다. ‘이석의 순응주의는 사실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이석이 현실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순순히 명령에 따라주고, 동조하며 타락하는 방법뿐인 것이다.

나는 이석은 아니겠지하며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이 책을 읽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이 아닌가. 그랬다면 진작에 우리나라는 깨끗한 사회로 바뀌었겠지. 편혜영 작가님은 무너져가는 소도시 이인시를 통해 쇠퇴해가는 자본주의 현실을 비판했고, 이인시 안에 있는 선도병원을 통해 부패와 악으로 가득한 한국을 비판했다. 그리고 이게 현실이라는 생각에 읽는 내내 불편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작품들을 읽음으로써 다시 한 번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죽은 자로 하여금>은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윤리적, 도덕적인 가치들을 끌어내는 희망적인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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