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무경, 유식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 카르마총서 5
한자경 지음 / 예문서원 / 200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자경 교수의 저서 <유식무경: 유식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는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인 유식(唯識) 사상을 서양 근대 철학 및 현대 현상학의 틀로 분석한 연구서이다. 


이 책은 "오직 식(識)만 존재하고 외계의 객관 대상[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의 명제를 증명하는 데 집중한다. 


인간의 마음을 8식(안·이·비·설·신·의식·말나식·아뢰야식)으로 나누고, 인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분석한 후, 우리가 인식하는 외부 세계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아뢰야식)에 축적된 업의 종자(種子)가 발현된 결과물임을 논증해 나간다. 


저자는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 등을 끌어와 불교의 유식설이 단순한 종교적 교리가 아닌 정교한 '인식론'임을 밝힌다. 


<성유식론> 등 전통 논서를 기반으로 개념의 논리적 타당성을 엄밀하게 추적하면서도 인도 유식학을 서양의 인식론 및 현상학적 사유와 비교하여 서술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이 책은 학술서이자 논문이기도 하지만, 철학적·서술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비판적 논점을 지닌다 하겠다. 


1. 유식학의 '관념론화' 위험 

유식은 본래 '언어적 분별을 떠난 깨달음(수행)'을 지향하는 실천적 사상이다. 그러나 저자가 칸트나 현상학의 틀로 이를 지나치게 재단하다 보니, 유식학이 한낱 서양식 '주관적 관념론(Idealism)'이나 독아론으로 오해될 소지를 낳는 측면이 있다.


2. 수행적 맥락의 약화 

유식학에서 '무경(無境)'을 깨닫는 것은 지식적 동의가 아니라, 선정과 실천을 통한 존재의 대전환(전의, 轉依)을 뜻한다. 서술이 지나치게 인식론적·이론적 분석에 치중되어 있어, 불교 본연의 실천적·종교적 생동감이 박제화되었다는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3. 도식적 비교 철학  

불교의 아뢰야식과 칸트의 선험적 자아는 그 발생 배경과 궁극적 목적이 완전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둘을 무리하게 유추 적용하는 과정에서 두 사상 고유의 독창성이 서술 과정에서 다소 왜곡되거나 단순화되는 우려도 초래하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총평하자면, 이 책<유식무경>은 불교를 맹목적 신앙이 아닌 '이성적 철학'의 반열로 끌어올린 역작이다. 서술의 명료함과 철학적 치밀함은 독보적이지만, 불교의 실천적 역동성을 서양 철학의 인식론적 구조 속에 다소 가두어 버렸다는 점은 독자가 염두에 두고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대목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불자라면 유식학에 대한 학술적 연구서로서 읽어볼 필독서라고 할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풍수화 - 원형사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김용운 지음 / 맥스미디어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수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고(故) 김용운 교수의 저서 <풍수화(風水火): 원형사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는 삼국의 지정학적 운명과 민족적 무의식을 날카롭게 파헤친 방대한 스케일의 문화·문명 비평서이다. 


이 책의 핵심은 민족의 초기 역사와 풍토 속에서 고착화된 집단적 무의식, 즉 '원형(Archetype)'에 있다. 저자는 한·중·일의 민족성을 각각 자연 현상인 바람(風), 물(), 불(火)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 한국(風 - 바람): 한국의 원형은 신바람과 끈기다. 대륙과 해양 세력 사이에 끼인 반도라는 지정학적 특성상, 평소에는 유교적 원리주의에 갇혀 지내다가도 위기 상황이 오면 '신바람'과 집단적 에너지를 분출하며 극복해 왔다. 


• 중국(水 - 물): 중국의 원형은 거대한 대륙을 집어삼키고 동화시키는 '물'이다. 어떤 이민족이 침략해 와도 결국 중화 사상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흡수해 버리는 실용주의적이고 유연한 성격을 뜻한다. 


• 일본(火 - 불): 일본의 원형은 폭발적인 '불'이다. 화산과 지진이 잦은 풍토적 불안감 속에서, 철저한 강자 중심의 '대세사관'과 칼의 문화(무사 정권)를 형성했으며, 한 번 타오르면 맹렬하게 외세를 모방하고 팽창하는 속성을 지진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단순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 세 나라의 뿌리 깊은 무의식적 갈등 구조를 시각화하여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감정적 대립을 멈추고 서로의 원형을 이해하는 '상생의 돌파구'를 제안했다는 점에서 실천적 가치가 있다 하겠다. 


지형학, 언어학, 신화학, 카오스 수학을 넘나들며 동아시아 역사를 이토록 거대하고 일관되게 설명해 낸 저작은 한국 지성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보적인 성취일 것이다. 


이 시대의 진정한 학자 김용운 교수의 <풍수화>는 한·중·일 삼국이 서로를 향해 세우는 날 선 대립의 이면에 어떤 '문화적 유전자'가 작동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탁월한 문명 진단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