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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카페의 노래 열림원 이삭줍기 12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하는 사랑과 받는 사랑

 

 

2001년 1년을 나는 프랑스 중동부의 아름다운 고도古都 디종에서 보냈다. “한껏 자유롭게, 한껏 외롭게, 한껏 책이나 읽자”는 생각으로 지낸 1년이었다. 4월의 어느 날 《피가로》지 북섹션에 나타난 작가 한 사람이 망각의 세계에 묻혀있던 내 젊은 날의 떨림을 기억의 세계로 불러냈다. 카슨 매컬러스Carson McCullers(1917-1967). 그날 《피가로》는 빠리에서 미국의 여류작가 카슨 매컬러스Carson McCullers의 미완의 자서전 《영감과 불면의 밤들》(Illuminations et nuits blanches, 영어제목은 Illumination and Night Glare로 1999년에 출간되었)이 번역, 출판된 일을 크게 다루고 있었다. 10/18의 문고본으로 출간된 이 책에는 카슨 매컬러스가 남편 리브스와 주고받은 편지들, 프랑스에서 출간되지 않은 3편의 단편소설이 함께 묶여 있다.

프랑스에서도 그의 인기는 대단한 듯 이 책이 번역 출간되자 《피가로》지는 ‘문예’면의 한 페이지 반을 할애해 로맨틱한 분위기가 한껏 연출된 사진들과 함께 그의 삶과 작품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이는 같은 날 ‘문예’면에 막 출간된 프랑스의 대 문호 앙드레 지드의 플레이야드판 《회상과 기행》 출간 소개에 반 페이지만을 할애한 것에 비하면 파격적이랄 수 있다.

나는 서점으로 가 이 책과 함께 그의 대표작 《슬픈 카페의 노래》(La Ballade du Café triste, 영어제목은 The Ballade of the Sad Café, 1951)를 구해서 읽었다. 프랑스어로 읽는 《슬픈 카페의 노래》에 나오는, 젊은 시절 내 영혼을 사로잡았던 통찰력에 빛나는 ‘사랑의 분석’은 참으로 오랜만에 ‘흔들리는 섬광’으로 다시 내게 다가왔다.

“마을 자체가 황량하다(......) 쓸쓸하고 슬프고 세상의 다른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소외된 것 같다(......)딱히 할 일이 없다면 폭스펄즈 고속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서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의 이야기나 듣는 편이 나을 것이다”로 시작해 ‘일단’ “그렇다, 마을은 황량하다(......) 영혼은 지루함으로 점점 부패해 간다. 폭스펄즈 고속도로로 내려가서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의 이야기나 듣는 편이 나을 것이다”로 끝을 맺는 이 작품은 배경만큼이나 기이한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 마을에는 한 카페가 있는데 마을의 황량함을 어느만큼은 덜어주는 유일한 공간이다. 사실 그곳이 처음부터 카페는 아니었다. 키가 크고 골격이나 근육이 남자 같으며 짦은 머리를 뒤로 벗겨 넘긴 사팔뜨기 미스 아멜리아가 아버지로부터 이 건물을 물려받았을 때만 해도 주로 사료와 비료, 곡식이나 코담배 같은 것을 파는 생필품 가게였다. 술도 팔았다. 미스 아멜리아는 그 도시의 골목 깡패인 마빈 메이시와 결혼한 적이 있는데, 그는 180센티미터가 넘는 훤칠한 키에 근육질의 몸, 잿빛 눈, 곱슬머리를 갖고 있는 이 마을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였다. 또한 그는 인근 지역에서는 가장 평판이 고약한 “사악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온갖 나쁜 짓을 일삼으면서도 얼굴값 하느라 주위에 꼬여드는 젊은 아가씨들을 여럿 망신시킨 남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마빈 메이시가 미스 아멜리아에게 반한다. 더더욱 놀라운 일은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사람이 성실하게 변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결혼 첫날밤부터 각방을 쓰고 마빈 메이시의 노력에도 이 결혼은 열흘만에 끝난다. 그리고 마빈 메이시는 마을에서 사라진다. 악명높은 범죄자가 돼 결국은 형무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어느 날 이곳에 아멜리아의 먼 친척임을 내세우는 사촌 라이먼이 찾아온다. 그는 볼품없는 꼽추이다. 키는 140센티미터 남짓에 가늘고 휜 두 다리는 너무 가늘어 그 구부정한 가슴과 어깨 위에 얹혀 있는 혹의 무게를 지탱하기 조차 힘들다. 머리통은 너무 컸고 움푹 들어간 두 눈에 작은 입술 윤곽이 뚜렷했다. 얼굴은 양순해 보이면서도 좀 뻔뻔스러운 구석이 있다.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미스 아멜리아는 라이먼을 내쫓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잘 보이려 애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가게는 이 마을의 중심이 된 카페로 탈바꿈 하는데 여기에는 라이먼이 지니고 있는 특이한 성향, 평범한 사람들에게선 쉽게 볼 수 없는 자질이 한몫 톡톡히 한다. 그는 “보통 어린아이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성향, 즉 자기 자신과 세상의 모든 것들 사이에 즉각적으로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재능을 갖고 있다.”

이 카페는 “칠흑같이 어둡고 고요한 겨울밤에도 따뜻하고 아늑해서” 이 마을의 중심이 되었는데 불빛이 어찌나 환한지 5백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카페가 마을의 중심이 된 것은 이런 따뜻함이나 실내 장식들, 그리고 밝은 불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카페를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데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모종의 자부심과 관계가 있다. 이 새로운 자부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이란 결국 값어치가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생은 단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한 하나의 길고 어두운 싸움일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점이다. 세상 돌아가는 방식이 그렇듯 모든 유용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으레 값을 치러랴 하고, 오직 돈으로만 살 수 있다(......)그러나 인간의 삶에는 아무런 값도 매겨져 있지 않다. 삶은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졌고 아무런 값도 매겨져 있지 않다(......)삶의 가격은 얼마일까? 주위를 둘러보면, 때때로 삶이란 전혀 가치 없거나 만약 있다고 해도 아주 미미한 것으로 보일 때가 있다.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도 내가 처한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 자신이 결국 가치없는 인간이라는 자괴감이 밀려오지 않는가.” 그런데 이 카페는 이 마을의 모든 사람들, 아이들에게까지 “새로운 자부심”을 심어준다. 이 카페에 오기 위해 단돈 1센트만 있어도 되지만 사람들은 이 카페에 오기 전에 세수를 하고 정중하게 문지방에서 신발을 털었으며 아이들조차 예의바르고 조심성 있게 행동했다. “카페에 있는 동안만은 단 몇 시간 동안이라도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이 세상에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는 쓰라린 생각을 조금은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6년이 지난 어느 날 형무소에 있던 마빈 메이시가 출옥하여 이 마을로 돌아온다. 라이먼은 미스 아멜리아의 애원에도, 마빈 메이시의 경멸에 찬 홀대에도 메이시의 마음에 들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라이먼의 뜻대로 메이시는 미스 아멜리아의 집에 들어와 살게 되고 그러던 어느 날 아멜리아와 메이시 사이에 생사를 건 결투가 벌어진다. 미스 아멜리아의 승리가 목전에 있는 순간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비명이 카페 안을 뒤흔들었다(......) 미스 아멜리아가 마빈 메이시의 목을 조르던 순간 꼽추는 앞으로 튀어 올라서 마치 매의 날개라도 단 듯 공중을 가로 질렀다. 그는 아멜리아의 널찍하고 단단한 등에 뛰어내려 사나운 짐승의 발톱같이 날카로운 손가락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난장판이 벌어지고 구경꾼들이 제정신을 차렸을 때는 싸움은 꼽추로 인해서 마빈 메이시의 승리로 끝난 후였다. 그날 밤, 마빈 메이시와 라이먼은 카페의 귀중품을 챙겨 사라진다. 사탕수수 시럽, 과일 잼, 증류기, 응축기, 냉각기 등등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못 쓰게 만들었다. 그 후 미스 아멜리아는 멍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표정의 폐인이 되고 카페는 문을 닫고 마을은 예전의 황량함으로 되돌아간다.

이들의 삼각관계에 대한 카슨 매컬러스의 ‘사랑의 분석’은 이렇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체험이다. 그러나 함께 하는 체험이라는 게 두 사람이 똑같은 체험을 한다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받는 사람이 있지만 완전히 별개에 속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쌓여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고독한 것임을 영혼 깊숙이 느낀다. 이 새롭고 이상한 외로움을 알게 된 그는 그래서 괴로워한다. 이런 일로 사랑을 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딱 하나 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사랑을 자기 내면에만 머무르게 해야 한다. 자기 속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 강렬하면서도 이상야릇하고, 그러면서도 완벽한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이란 반드시 결혼반지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젊은 남자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 아이, 아니,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인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사랑을 받는 사람에 대해 얘기해보자.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지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증조할아버지가 되어서도 20년 전 어느 날 오후, 치하 거리에서 스쳤던 한 낯선 소녀를 가슴에 간직한 채 계속해서 그녀만을 사랑할 수도 있다. 목사가 타락한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 받는 사람은 배신자일 수도 있고 머리에 기름이 잔뜩 끼거나 고약한 버릇을 갖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랑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지만, 이는 그의 사랑이 점점 커져 가는 데에 추호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어디로 보나 보잘 것 없는 사람도 늪지에 핀 독백합처럼 격렬하고 무모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도 있고, 의미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순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의 가치든 사랑의 질이든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서만 좌우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려는 게 바로 이때문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간단명료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사랑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증오하는데 그럴만한 큰 까닭이 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최소한의 어떤 관계라도 맺으려 열망해 끊임없이 그를 홀딱 벗기려 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고통만 있더라도.”

아멜리아는 라이먼을, 라이먼은 메이시를, 메이시는 아멜리아를 사랑한다. 동시에 라이먼은 아멜리아를, 아멜리아는 메이시를, 메이시는 라이먼을 증오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갈라지는 한 사랑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사랑이란 행위는 사랑과 증오로 이뤄진다. 이게 내가 젊은 시절 이 작품을 읽은 방식이다.

한 때 이 마을에서 황량함을 걷어냈던 미스 아멜리아의 카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아멜리아가 직접 빚어내는 술이다. 아마도 〈술에 대한 경배〉로 이만한 대목이 또 있을까.

“미스 아멜리아의 술에는 무언가 아주 특별한 게 있다. 혀끝에서는 정갈하면서도 짜릿한 맛을 내고, 일단 뱃속으로 들어가면 화끈한 기운이 오랫동안 몸을 훈훈하게 녹이는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백지 위에 레몬 즙으로 메시지를 쓰면 글씨가 보이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종이를 잠시 동안 불에 대고 있으면 글씨가 갈색으로 변해 그 내용을 분명히 알아 볼 수가 있다. 위스키가 바로 그 불이고 메시지는 한 인간의 영혼 속에 쓰인 글이라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아멜리아가 만든 술의 진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무심히 흘려버렸던 일들, 마음속 깊이 은밀한 구석에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불현듯 모습을 드러내고 마침내 이해가 되는 것이다. 직조기와 저녁 도시락, 잠자리, 그리고 다시 직조기, 이런 것들만 생각하던 방적공이 어느 일요일에 그 술을 조금 마시고는 늪에 핀 백합 한 송이를 우녕히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손바닥에 그 꽃을 올려놓고 황금빛의 정교한 꽃받침을 살펴볼 때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 고통처럼 날카로운 향수가 일게 될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눈을 들어 1월 한밤중의 하늘에서 차갑고도 신비로운 광휘를 보고는 문득 자신의 왜소함에 지독한 공포로 심장이 멈추어 버리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미스 아멜리아의 술을 마시면 이런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고통을 느낄 수도, 기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결국 이 경험들이 보여주는 것은 진실이다. 그 술을 마시면 영혼이 따뜻해지고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슬픈 카페의 노래󰡕의 마지막에는 한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사형수들이 한 쇠사슬에 함께 묶여 노역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12명의 사형수들’이 붙어 있다.

“폭스펄즈 고속도로는 마을에서 4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데, 바로 이곳에서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이 일하고 있다(......)죄수들은 동이 트면 교도소 호송차에 실려 와 떼 지어 내렸다가는 8월의 잿빛 황혼이 드리워질 때 다시 짐승 몰이 하듯 몰려 차에 실려 가버린다. 그곳에서는 온종일 진흙땅을 파는 곡괭이 소리, 강렬한 햇빛, 그리고 땀 냄새가 있다. 그리고 그곳엔 매일 노래가 있다. 누군가 침울한 목소리로 콧노래 비슷하게 한 소절을 시작하면, 마치 질문에 대답하듯 얼마 후 다른 목소리가 어울리고 곧이어 모든 죄수들이 합창을 한다. 노랫소리는 눈부신 황금빛 햇살 속에서 더욱더 우울하게 들리고 그 가락에는 슬픔과 즐거움이 미묘하게 뒤섞여 있다. 노랫소리는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 그 소리들이 열두 명의 죄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또는 드넓은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이 노래는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주고 희열과 공포로 몸서리치게 한다. 그러다가 서서히 노랫소리가 잦아들어 한 가닥 외로운 선율만 남게 되면 다시 침묵 속에 거친 숨소리와 태양, 그리고 곡괭이 소리만 남을 따름이다.” 이 부분을 에피소드로 읽을 경우와 작품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읽을 경우 작품의 의미는 크게 갈린다(젊은 시절에는 이 부분을 놓치고 읽어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매컬러스는 1959년의 한 글에서 정념에 찬 개인적인 사랑(옛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 에로스적인 사랑)이 형제애(아가페적인 사랑), 남자들의 사랑보다 열등하다면서 "《슬픈 카페의 노래》에 등장하는 미스 아멜리아가 보여주는 꼽추 라이먼 사촌에 대한 기이한 사랑에서 내가 보여주려고 애썼던 게 바로 이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전에는 이 작품을 “도시 자체는 황량하다......이 도시에서 할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까지만 읽고 나머지는 에피소드로 읽었는데 이번에는 “영혼은 지루함으로 점점 부패해 간다. 폭스펄즈 고속도로로 내려가서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의 이야기나 듣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들이 부르는 비통하면서 동시에 기쁨에 찬 노래는) 마음을 열게 하고 듣는 사람을 황홀함과 경악으로 꼼짝 못하게 하는 음악이다”를 지나 끝까지 읽고 특히 ‘12명의 사형수들’을 뒤에 붙인 까닭을 곰곰이 따져 보는 식으로 읽는 방식을 달리 해볼 수도 있겠다 싶다. 12명의 사형수들은 이 지방 출신의 흑인 일곱명과 백인 다섯명이다. 아마도 매컬러스는 흑백의 화합을 갈망했으리라. 책읽기는 읽을 때 마다 서로 다른 작품 해석의 한 방식이다.

《영감과 불면의 밤들》에는 미국 남부 지방 출신의 매컬러스가 흑인문제를 흑인의 입장에서 다룸으로써 KKK단의 위협을 받은 일이 나와 있고 흑인 작가 리차드 라이트가 매컬러스야말로 백인에 대해 말할 때처럼 흑인에 대해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남부 작가라고 평가한 일도 기록되어 있다.

글을 쓸 수 없어 (50세의 나이에!) 구술로 만들어진 《영감과 불면의 밤들》은 매컬러스 자신 뿐 아니라 작가들의 천형과도 같은 저주받은 삶을 절망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어느 날 떠오르는 계시와도 같은 영감은 그의 체험과 절묘하게 결합하여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지만 뒤따르는 삶의 고통은 불면의 밤으로 이어진다.

영감의 순간과 불면의 밤이 서로 다른 세계가 아니라 같은 세계의 겉과 속이라는데 작가들의 비극이 있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의 마지막에서 비프 브래넌을 통해 ‘일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의 무한한 가능성을 말한 적이 있지만 매컬러스는 《영감과 불면의 밤들》에서도 자기의 삶이 ‘일’과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책머리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작품의 영감 그리고 갑자기 찾아오는 고통스런 삶’의 다른 말이며, “그의 삶을 드러내는 행복과 고통의 연쇄”이다.

 

☞《슬픈 카페의 노래》 인용은 장영희 교수가 번역한 열림원(2005)판을 쓰고 부분적으로 손을 봤다. 이외에도 정현종(문예출판사), 안동림(신구문화사), 윤시원(산호)의 번역본이 있다. 정현종 시인의 번역본을 함께 읽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카슨 매컬러스의 다른 작품도 번역돼 있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공경희 옮김, 문학세계사, 2005), 《고딕소녀》,(엄용희 옮김, 열림원, 2006), 단편집 《불안감에 시달리는 소년》(이소영 옮김, 열림원, 2008).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의 <북 리뷰>에도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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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예찬 - 문학에 나타난 그리움의 방식들 예찬 시리즈
왕은철 지음 / 현대문학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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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철, 《애도예찬》, 현대문학, 2012

 

전북대 영어영문학과 왕은철 교수가 2010년 봄부터 2011년 가을까지《현대문학》지에 〈사랑과 죽음, 그리고 애도〉라는 꼭지로 연재한 글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습니다.《애도예찬》입니다. 왕 교수는 문학이 애도의 한 방식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난 뒤 애도하는 방식을 다룬 이 책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등, 쿳시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세익스피어의 《햄릿》,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히로시마 내 사랑》등 열일곱 명의 작가 또는 그들의 작품들을 세밀하게 들여다봅니다.

 

캐서린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히스클리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진정한 애도는 애도의 거부”입니다(《폭풍의 언덕》). 사랑하는 사람 모리스를 살려만 준다면 그를 포기하는 일을 포함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는 세라, 신은 그의 기도를 들어줍니다. 그는 살아 돌아옵니다. 세라는 그 일이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그를 만나서는 안 되니까요.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세라는 급성폐렴으로 죽습니다. 이제 애도는 모리스의 몫입니다. “진정한 애도는......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벽장’ 속에 고스란히......남겨두는 것일지” 모릅니다(그레이엄 그린, 《사랑의 끝》).

 

프로이트는 애도란 우리가 떠나보낸 사람들에 대한 감정적 애착을 단절하고 자유로운 리비도를 새로운 대상에 재투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헤어진,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 속에 남겨두고 다시/새롭게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게 가능한 일인지요. 사랑하던 사람을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해버리고 나서라면 몰라도 기억 속에 그 사랑의 흔적을 온전히 남겨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왕 교수가 다룬 작품의 인물들을 보면 하나같이 애도에는 끝이 없습니다. 애도기간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틈만 생기면 여지없이 찾아드는 게 애도입니다. 허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생긴〈구멍〉이 어찌 메워지겠습니까, 메워진 듯 보일 뿐이지.

제가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의 사진으로 시작하여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다룬 〈슬픔의 깊고 큰 구멍-적군을 사랑한 한 여성의 애도〉를 이 책의 백미로 꼽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2010년 가을에서 다음 해 이른 봄까지 한국에서 구제역으로 매몰된 소, 돼지는 3백만이 넘었고, 조류독감으로 매몰된 닭, 오리는 5백만이 넘었습니다. 살처분, 생매장의 현장은 끔찍했습니다. 애도의 대상이 인간만은 아니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쿳시의《엘리자베스 코스텔로》를 다룬,〈존재가 존재에게 남기는 空洞-홀로코스트와 동물들을 위한 애도〉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미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잊을 수 있느냐고 들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은 석 달 또는 3년이 지나면 웬만큼은 잊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열정적인 사랑에 이르는 것은 도파민, 페닐에텔아민, 옥시토신 같은 호로몬 덕분이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나면, 길게 잡아도 3년을 안 잡습니다, 이들 호르몬의 역할이 끝나고 또 이들에 대한 항체도 생긴다고 합니다. 이제 가슴은 뛰지도 않고 사랑은 시들해집니다.〈애도기간〉이라는 말이 오래전부터 있는 것으로 보면 이런 유물론적인 주장을 그냥 무시할 수만은 없을지 모릅니다. 금슬 좋았던 부부들 가운데 한 편이 세상을 뜨는 경우가 그렇지 못했던 부부들의 경우보다 재혼율이 높다는 것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왕 교수의 지적처럼 애도를 다루는 거의 모든 문학작품들이 애도기간은 무한정이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프로이트의 주장, “애도란 우리가 떠나보낸 사람들에 대한 감정적 애착을 단절하고 자유로운 리비도를 새로운 대상에 재투자하는 것”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문학작품 속에서와는 달리 우리의 현실에서는〈애도기간〉이 유한한 경우가 많고, 유한한 애도기간을 갖는 사람들이 헤어진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는 말입니다. 호르몬 분비에 좌우되지 않는 사랑이 사람들 사이에는 엄연히 존재하고,〈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극단적이며 폐쇄적이며 자기 파괴적이기 까지 한 사랑, 끝까지 가야만 하는 사랑도 분명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글은 네이버의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 의 <북리뷰>에도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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