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방랑 - 랭보 시집 대산세계문학총서 123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지음, 한대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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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선술집]에서 - 저녁 다섯 시

 

여드레 전부터, 내 반장화는 찢겨 있었지,

길거리 자갈돌에.. 샤를루아로 들어가던 길.

― [초록 선술집]에서, 버터 바른 빵과

반쯤은 식어 었을 햄을 나는 주문했다네.

 

행복에 겨워, 나는 초록 식탁 아래로 다리를

뻗고, 벽 장식 융단의 아주 순진한 주제들을

바라보았지. ― 그런데 정말 근사했네,

엄청나게 가슴이 큰 처녀가 눈빛도 생생하게

 

― 이 여자, 입맞춤 하나로는 놀라지도 않지! ―

웃음 지으며, 버터 바른 빵에 미지근한 햄을

채색 접시에 담아 왔을 때,

마늘쪽 냄새 향긋한 장미색과 흰색의

 

햄을, ― 그러고는 커다란 내 맥주잔을 채워주었을 때,

늦은 햇살 하나로 금빛 물든 그 거품과 함께.

                                                           아르튀르 랭보

70년 10월

(랭보, 《나의 방랑 - 랭보 시집》, 한대균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68면)

 

“1870년 10월, 1854년 10월 28일생이니, 랭보는 이제 만 16세가 되는 달에 이 시를 썼습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물에서 태어나는 비너스〉처럼 여성혐오증을 보이는 시는 아니지만 읽기에 따라서는 사뭇 에로틱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입니다. 무전여행 수준의 빈털터리 방랑의 어느 날, ‘초록주막’이란 이름의 허름한 주막에 들어가 테이블에 앉아 지친 다리를 쭉 뻗습니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의 알록달록한 그림을 보며 긴장감이 풀려 마음의 아늑함에 빠지는데 〈가슴이 엄청 크고 발랄한 눈빛의 아가씨가 생글거리며〉 ‘색깔 좋은 접시에’ 담은 빵과 햄, 맥주 한잔을 가져옵니다. 이제 마음의 아늑함은 몸의 아늑함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환상 속에서이지만 랭보는 관능적 쾌락감에 한껏 빠져듭니다. 아가씨가 그의 ‘커다란 맥주잔’에 채워준 것이 맥주가 아니라 〈그녀의 거품〉이라고 표현할 만큼 황홀하게, 깊숙이. ☞ [더 읽기]”

 

[더 읽기]

 

‘환상곡’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랭보의 대표적 방랑시편 〈나의 방랑〉을 연상시키는 또 하나의 방랑시편입니다.

이 시에 나오는 자갈길에 찢어진 ‘내 반장화’가 말해주는 방랑의 형편은 ‘터진 주머니’가 달린 낡은 ‘내 외투’, ‘커다란 구멍이 하나’ 나 있는 ‘내 단벌바지’, ‘찢어진 신발’이 말해주는 〈나의 방랑〉의 방랑의 형편과 정확하게 겹칩니다.

 

현실에서의 방랑의 형편은 일치하지만 현실세계와 상상/공상/환상의 세계를 버무리는 수법은 두 시가 다릅니다. 〈나의 방랑〉은 시 전편에 걸쳐 앞에서 말한 현실세계의 사정과 상상의 세계의 형편(‘하늘 밑’, ‘뮤즈’, 큰곰자리‘, ’칠현금‘)이 섞여서 나옵니다. 시 전편에서 현실과 상상의 세계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초록 주막]에서〉에서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첫 두 연은 온전하게 현실세계이고 후반부 3행시 두 연은 포장은 분명 현실세계인데 상상/공상의 세계를 끌어들여야만 시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초록 주막]에서〉의 첫 두 연은 앞서 말한 대로 방랑생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870년 10월 시도한 두 번째 가출은 벨기에의 브뤼셀까지 가는데 첫 번째 가출 때처럼 호주머니 사정은 전혀 여의치 않습니다. 벨기에의 시골 샤를르로와의 한 주막(주막의 이름은 [초록 주막] 또는 [초록 주막에서]입니다)에 들어섭니다.

 

일주일 내내 자갈길을 걸어 반장화는 찢어먹었습니다. 버터 바른 빵과 이미 식었을 햄을 주문하고 주막 식탁 앞 의자에 주저앉아 다리를 바닥을 향해 쭉 뻗습니다. 워낙 피곤했었나요, 온몸이 풀리는 게 아늑해지고 아득해집니다. 벽에는 알록달록한 그림들을 수놓은 태피스트리가 걸려있습니다. 그림들이래야 우리나라 1960-70년대 시골 이발소 그림을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가슴이 엄청 크고 발랄한 눈빛의 아가씨가 생글거리며 빵과 햄을 담은 색깔 좋은 접시를 가져옵니다.

이상이 초반 두 연의 서사입니다. 여기서 〈아가씨의 출현〉이 둘째 연 마지막과 셋째 연 첫 두 행에 걸쳐 있다는 점은 지적해둬야 합니다. 미리 말하면 이 시에서는 ‘아가씨의 출현’이 현실을 지나 상상의 세계로 들어오는 문턱입니다.

후반부 두 연의 서사는 이렇습니다.

 

음식을 가져온 아가씨 인상이 만만치 않습니다. 키스 한 번 한다고 겁먹을 인상이 아닙니다(이미 상상/환상의 세계에 들어섰다는 표지입니다). 수줍다기보다는 섹시한데다 충분히 당돌하다는 느낌입니다. 아가씨가 색깔 좋은 접시에 담아온 빵과 햄, 나는 굳이 ‘햄’만 다시 들먹입니다.

 

“반쯤은 식었을 햄” - “미지근한 햄” - “마늘쪽 냄새 향긋한 장미색 흰색의 햄”

 

미지근한 햄까지는 현실세계인데 마늘쪽 냄새를 풍기는 장미색 흰색의 햄은 이미 현실세계를 넘어섰습니다. ‘냄새’(마늘 냄새)와 ‘색깔’(장미색과 흰색)과 ‘물질’(햄)의 뒤섞임, 어울림(연구자들은 여기에서 적절하게 보들레르의 〈만물조응〉을 언급합니다), 나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마늘쪽 냄새 향긋한 장미색 흰색의

햄을, ― 그리곤 내 커다란 맥주잔을 채워주잖아,

지다 남은 햇살에 금빛으로 물드는 제 거품으로.”

 

아가씨가 내 맥주잔을 채워주는 게 맥주의 거품이 아니라 아가씨 자기의 거품입니다.

 

〈내 커다란 맥주잔〉과 그 잔을 채우는 〈아가씨의 거품〉, 직전으로 돌아가 〈햄〉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반쯤은 식었을, 미지근한 〈햄〉과 마늘쪽 냄새 향긋한 장미색 흰색의 〈햄〉은 이미 같은 햄이 아닙니다. 맥주의 ‘거품’이 아가씨의 ‘거품’으로 바뀌었듯이 ‘햄’ 또한 아가씨의 ‘햄’으로 바뀌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늑한 기분과 아득한 느낌이 하나 되면서 나는 상상/환상/공상의 세계로 넘어섭니다. 아가씨는 내가 수작을 걸어도 저항하는 게 아니라 도발하면서 오히려 내 욕망을 자극합니다. 색깔 좋은 접시는 알록달록한 태피스트리가 걸린 주막 안 배경과 대비되고 마늘 냄새를 풍기는 장미색 흰색의 햄은 아가씨의 육감적인 몸/살로 바뀝니다. 빈 ‘커다란 맥주잔’은 채워줘야 할 〈텅 빈 내 욕망〉이고 ‘거품’은 내 욕망을 채워줄 〈아가씨의 넘쳐나는 욕정〉입니다.

 

아마도 이 시는 랭보가 현실의 이면에 감춰놓은 공상의 세계를 제대로 찾아내 읽는다면 그의 시들 가운데 가장 에로틱한 시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시를 읽는 재미로는 최상의 것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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