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방랑 - 랭보 시집 대산세계문학총서 123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지음, 한대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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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서 태어나는 비너스

 

양철로 만든 녹색 관에서 솟아나듯, 갈색 머리털에

포마드를 잔뜩 바른여자의 머리 하나가,

낡은 욕조에서, 천천히 그리고 멍청하게,

제대로 수선도 안 된 손상을 입고 떠오른다.

 

이어서 살진 회색 목덜미, 튀어나온

넓은 어깨뼈, 꺼지고 솟아오른 짧은 등,

이어서 퉁퉁한 허리 살이 날아오를 듯하고,

피하지방은 얄팍한 판지 조가들 같다.

 

등살은 약간 붉고, 그 모든 것이 이상하게도

끔찍한 맛을 낸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돋보기로 살펴야 할 기이한 것들......

 

허리에는 두 낱말이 새겨져 있다. 클라라 비너스

- 그리고 그 온몸이 꿈틀거리며 커다란 엉덩이 내미는데

항문에 돋은 종기로 징그럽게 예쁘다.

(랭보, 《나의 방랑 - 랭보 시집》, 한대균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48면)

 

“나는 비너스 하면 우선 보티첼리의〈비너스의 탄생〉(1485년, 그림)을 떠올리는데 16세에 첫 시를 발표하고 21세에 절필한 시인 아르튀르 랭보, 그가 열여섯 살 때 만들어 낸 비너스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비너스가 ‘물(거품)에서 태어난 여신’이라는 점에서는 보티첼리와 랭보의 비너스가 같지만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미의 여신의 환대와 바람둥이 서풍의 신, 제피로스의 수작을 받으며 바다에서 조개를 타고 뭍으로 나타나고 랭보의 비너스는 ‘함석 관’을 연상시키는 ‘초록색 낡은 욕조’에서 망가진 모습으로 떠오릅니다. 비너스가 겉모습처럼 속마음도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보티첼리가 〈정숙한 비너스〉를 창조했다면, 랭보는 ‘끔찍한 냄새’를 풍기며 ‘큰 엉덩이,/ 항문에 종기가 돋아 징그럽게 아름’다운 〈클라라 비너스〉, 실은 ‘클라라 비너스’ 상표 마네킹을 패러디하며 비너스를 조롱합니다.

 

[더 읽기]

 

낡은 욕조에서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차례로 떠오르는 여자는 갈색 머리에 포마드를 잔뜩 바르고 있고 상체는 뒤틀려 기형입니다. 끔찍한 냄새를 풍기며 항문에 종기가 돋은 큰 엉덩이는 징그럽게 아름답습니다. 허리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클라라 비너스”. 라틴어 어원을 찾아가면 클라라clara는 ‘천상의’, ‘찬란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 생긴 모습과는 달리 ‘천상의 비너스’라는 이름이 생뚱맞기도 합니다.

 

많은 랭보 연구자들은 욕조에서 떠오른 여자, 클라라 비너스를 창녀로 여겼습니다. 이 시가 쓰일 당시 유럽에서는 기둥서방들이 창녀들 팔에 자기 이름을 문신해 넣는 것이 유행이었다 합니다. 클라라의 경우 다르기는 합니다. 이름이 있는 곳이 팔이 아니라 허리이고 기둥서방이 아니라 창녀 자신의 별명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연구자들은 한발 더 나갑니다. 아름다움의 여신, 욕정의 여신 비너스를 창녀에 비유하다니, 이를 랭보를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로 생각할 수 있는 근거의 하나로 삼지는 않았지만 여성혐오자라일 수는 있다는 혐의를 갖게 하는 중요한 단서로는 삼았습니다.

 

이 시를 되풀이 읽으면 한국어로 번역된 첫째 연의 마지막 행 “수선도 제대로 안 된 손상을 입고 떠오르니avec des déficits assez mal ravaudés”가 시 전체가 인체 부위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조 안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한 여자의 이미지 구성을 방해합니다. 생명체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시구가 지나치게 사물을 묘사하는 듯해서일 것입니다. ‘망가졌으나 제대로 손보지 않은 몸’ 정도의 뜻일 텐데 황현산, 한대균, 곽민석 교수는 다음과 같이 비슷하게 한국어로 옮기고 있습니다.

 

“수선도 제대로 안 된 손상을 입고 떠오르니,”(황현산, 미출간)

“제대로 수선도 안 된 손상을 입고 떠오른다.”(한대균, 2014)

“제대로 수선도 안 된 손상을 입고서 떠오른다.”(곽민석, 2010)

 

내가 이 시의 한국어 번역을 부탁했던 황현산 교수께서는 “클라라 비너스”에 〈마네킹의 상표라고 생각해야 할 듯〉이란 〈주〉를 덧붙여 보내주셨습니다. 〈클라라 비너스〉가 창녀의 별명이라기보다는 마네킹의 상표이고 욕조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실은 망가진 마네킹일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 시의 해석에 중요한 장을 마련할 언급입니다..

랭보가 마네킹 상표가 ‘클라라 비너스’라서 비너스를 떠올린 것인지 그 상표와는 상관없이 그 뒤틀린 이상한 모습에 지독한 냄새까지 풍기는 물에 잠겨 머리만 내놓고 있는 마네킹을 보고 정숙하고 아름다운 기존의 비너스를 능멸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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