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르카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5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민용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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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한 유부녀

 

리디아 카브레라와 그녀의 흑인 소녀에게

 

그리고 나는 그녀를 강으로 데리고 갔는데

아가씨라 믿었으나,

남편이 있었지.

산티아고 축제의 밤

거의 약속이나 한 듯 했지.

불들은 꺼졌고

귀뚜라미들이 빛을 냈지.

거리의 마지막 모퉁이에서

그녀의 잠든 두 젖가슴을 만졌더니

그것은 히아신스 꽃다발처럼

돌연 피어났지.

풀 먹인 치마 내는 소리가

칼 열 자루가 찢는

비단 조각이 내는 소리처럼

내 귓전에서 사각거렸지.

은색 달빛도 비추지 않지만

그 아래에선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선

사방에서 개들이 짖어대고 있지.

*

찔레 덩굴과 갈대 가시나무,

골풀을 지나,

그녀의 머리칼 밑 진흙 위에

오목한 자리를 만들었지.

나는 넥타이를 풀었지.

그녀는 옷을 벗었지.

이 몸은, 권총을 찬 혁대를.

그녀는 네 겹 상의를.

수선화도 소라도

그녀의 살결만큼 삼삼하진 않고,

달빛에 비친 크리스탈도

그토록 눈부시게 빛나진 않지.

절반은 열기가 가득하고,

절반은 냉기가 가득해서,

놀란 물고기처럼 그녀의 허벅지가

내 밑으로 미끄러져 들었지.

그날 밤 나는 가장 근사한

말달리기를 했지,

고삐도 등자도 없는

자개 빛 암말을 타고.

그녀가 내게 한 말들을,

사나이로서 난 되풀이하지 않겠어.

이성의 빛이

나를 신중하게 하지.

나는 모래와 입맞춤으로 뒤범벅이 된,

그녀를 강으로부터 데려왔지.

공중에서는 백합들이 미풍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었지.

 

나는 지금의 내가 그렇듯이

사나이답게, 진짜 집시답게 행동했지.

나는 담황색의 반짇고리를

그녀에게 선사했는데,

그러니까 내가 강으로 데려갈 때

아가씨인 척한

유부녀와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로르카 시선집》, 민용태 옮김, 을유문화사, 2008, 188-90면. 번역은 수정)

 

“내전 상태에 있던 스페인, 1936년 8월 16일 프랑코 장군의 민병대원들에게 끌려가 38세의 나이에 주검도 없이 사라진 가르시아 로르카, 20대 후반에 발표한 시들을 모아 출간한 《집시 이야기 민요집》(1928년)에 실린 〈부정한 유부녀〉는 그에게 대중적 명성과 개인적 당혹감을 동시에 안긴 시입니다. 이 시에는 출렁이는 관능, 노골적인 에로틱한 표현, 구체적인 성애의 이미지 게다가 완벽한 서사구조 등 온갖 요인들이 넘쳐납니다. 이 요인들이 바로 대중들을 열광하게 하지만 이 요인들의 이면을 독자들이 읽어내지 못하자 시인은 당혹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시를 에로틱 포에지로 뿐 아니라 그 안쪽에 숨어 있는 로르카의 비극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사회성 강한 정치시로 읽어낼 때 우리는 가르시아 로르카와 제대로 만나는 것입니다.”

[더 읽기]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의 〈부정한 유부녀〉는 이미 말했듯이 전 세계적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막상 로르카 자신은 난처해했습니다. 집시풍의 자유로움과 에로티슴이 넘쳐나는 이 시에 대중들이 열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첫째 연.

 “그리고 나는 그녀를 강으로 데리고 갔는데

아가씨라 믿었으나,

남편이 있었지.”

 

시작부터가 집시들의 성적 자유로움을 물씬 풍기는데, 불란서의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이야드〉판 《로르카 전집》의 〈주〉를 보면 이 3행은 로르카의 창작이 아니라 스페인 남부 시에라 네바다 지방의 노새 몰이꾼들이 콧노래로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의 한 부분을, 의식하지 못한 채 차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수호신인 산티야고(불어로는 생 작크)의 축제의 날 밤, 늠름한 집시는 집시여인을 유혹하고 그녀 또한 집시답게 뒤로 빼지 않고 당당하게 응합니다. 성희의 묘사가 노골적입니다.

둘째 연.

성애의 과정이 구체적이고 에로틱하게 묘사됩니다. 집시는 우선 풀숲을 지나 강가 으쓱한 곳에 편하게 누울 오목한 자리를 만듭니다. 둘은 각자 스스로가 옷을 벗습니다.

 “수선화도 소라도

그녀의 살결만큼 삼삼하진 않고,

달빛에 비친 크리스탈도

그토록 눈부시게 빛나진 않지.

절반은 열기가 가득하고,

절반은 냉기가 가득해서,

놀란 물고기처럼 그녀의 허벅지가

내 밑으로 미끄러져 들었지.”

 그리고 집시는 집시여인을 근사하고 다이나믹한 암말에 비유합니다. 황홀한 말타기에 열중합니다. 둘째 연의 마지막 두 행에서는 백합 향내가 진동하다고 함으로써 에로틱의 절정을 암시합니다.

 셋째 연.

‘반전의 드라마’가 개입합니다. 예상과는 달리 집시는 집시여인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유부녀임을 밝히지 않았다는 트집을 잡아 반짇고리를 선물로 주면서 둘 사이를 끝냅니다.

 겉보기에 더 없이 ‘싱싱한’ 에로티슴을 보여주는 시이지만 로르카는 이미 첫째 연에서 죽음의 빛을 깔아놓고 있습니다.

스페인 최대의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휘황찬란한 불빛이 없습니다. 청각적으로 에로틱의 진수라 할 수 있는 “풀 먹인 치마 내는 소리”가 〈죽음〉을 상징하는 “칼 열 자루가 찢는 비단 조각이 내는 소리”에 비유됩니다. 더 나아가 로르카에게서 〈번식〉을 뜻하는 “은색 달빛도 비추지 않”습니다. 달빛을 쬐지 못하는 나무들, 자라기는 하지만 이미 이 ‘성장’에는 생산성이 거세돼 있습니다.

 첫째 연의 이런 맥락을 감안하고 둘째 연으로 넘어가면 여기에서 펼쳐지는 남녀상열지사가 상호적이 아니라 일방적인 것이 아닐까 머뭇거리게 됩니다. 이 의구심은 세 번째 연에서 현실이 됩니다. 집시가 집시여인에게 준 반짇고리를 ‘선물’이라고 했는데 이제 이 선물은 ‘화대’로 전락하고 집시여인은 ‘창녀’ 취급을 받습니다.

 나는 앞에서, 로르카는 멋진 에로틱 포에지를 쓰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 자기의 비극적 세계관을 숨겨놓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로르카는, 시인으로서든 인간으로서든,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섰습니다. 그에게는 일반 시민보다는 집시가 ‘약자’입니다만 집시라고 해서 다 같은 집시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에서 ‘약자’인 집시 가운데에서 다시 ‘강자’와 ‘약자’가 나뉩니다.

 〈마초 집시와 집시여인〉.

 이 시는 유부녀였더라도 유혹했을 게 뻔하면서도 성적 욕망을 해소한 다음에 오는 허망함, 그녀가 유부녀라고 밝히지 않았다는 트집으로 그 허망함을 분노로 바꾸고 함께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집시여인을 창녀로 전락시킴으로써 더 심한 ‘약자’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면서 반대로 자신은 상대적으로 ‘강자’ 자리를 차지하는 비열하고 치사한 마초적 집시를 까발립니다. 이 시는 유부녀이면서도 결혼했다고 하지 않은 집시여인의 부도덕함을 드러내는 시가 아니라, 같은 집시이면서 그 가운데서 다시 더 처참한 ‘약자’ 쪽으로 내몰리는 집시여인의 슬픔, 참담함을 보여줍니다.

 이 시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에 로르카가 당혹스러워 한 것은 대중들이 시의 이면에 숨겨놓은 이런 〈시적 장치〉를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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