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테로와 나 을유세계문학전집 59
후안 라몬 히메네스 지음, 박채연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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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LIII. 우정

 

우리는 너무 잘 안다. 나는 그를 자기 마음대로 가게 내버려 두지만 그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간다.

왕관 소나무가 있는 곳에 가면 내가 그 나무를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그 거대하고 빛나는 나무 꼭대기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플라테로는 잘 알고 있다. 또한 내가 잔디 사이로 나 있는 오래된 우물로 가는 오솔길을 좋아한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키 큰 소나무 언덕에서 추억에 젖어 물줄기를 바라보는 것이 내게는 축제라는 것도 안다. 내가 플라테로 등에서 잠이 들었다 깨어 보면 늘 내가 좋아하는 경치가 내 앞에 펼쳐져 있다.

나는 플라테로를 어린아이 다루듯 한다. 길이 좀 험하거나 짐이 무겁다 싶으면 내려서 같이 들어주곤 한다. 뽀뽀해 주고 놀리기도 하고 화나게 만들기도 한다. 플라테로는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에 삐치지는 않는다. 플라테로는 나와 똑같고 다른 당나귀들과 다르다. 내 생각에 우리는 꿈도 함께 꾸는 것 같다.

플라테로는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처럼 군다. 불평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플라테로의 행복이라는 것을 안다. 플라테로는 당나귀들과 사람들을 피해 내게 온다.

(후안 라몬 히메네스, 《플라테로와 나》, 박채연 옮김, 을유문화사, 2013, 93-94면)

 

“모이노가 까무잡잡한 나귀이며 까노가 하얀색의 나귀이듯 플라테로는 은빛 나귀의 일반적인 지칭입니다. ‘나’의 플라테로는 한 마리 나귀가 아니고 내가 함께 했던 플라테로인 많은 젊은 수컷 나귀들입니다.

《플라테로와 나》에는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의 ‘나’의 고향 안달루시아 지방 모게르를 배경으로 한 이런저런 관계들, 세상의 변천, 내면의 풍경, 자연의 풍경이 서정적 산문시로 때로는 기쁨에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때로는 아픔에 눈물이 쏟아지도록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우정〉은 서로를 진정으로 잘 알며 어떤 경우에도 서로를 믿는 플라테로와 나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나’는 플라테로와 함께 있을 때 플라테로를 내 몸의 일부인양 잊을 정도입니다. ‘나’와 플라테로는 ‘나’와 ‘너’가 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인 셈입니다.

 

2013년 12월말 대한민국에서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는 마음이 편하지 않고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는 간 데 없이, 세상이 너와 나, 내 편 아니면 적으로 갈라지도록 모르는 척 지나친 당나귀보다 훨씬 미련하고 천박한, 나를 포함한 인간들 때문입니다.”

 

[더 읽기]

 

후안 라몬 히메네스(1881-1958)는 스페인 20세기 시인의 한 사람으로 195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산문시집 《플라테로와 나》는 20세기 스페인 문학의 산문시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산문시들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고 아픈 구석도 있지만 모두가 찬란하도록 아름답고 슬프도록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밝은 빛이 감싸고 있습니다.

 

시인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그의 산문시 두 편을 더 소개합니다.

 

LXI. 엄마 개

 

내가 이야기한 그 암캐는 사냥꾼인 로바토의 개야. 너는 그 개를 잘 알겠지. 왜냐하면 우리가 야노스 거리를 지날 때마다 그 개와 잘 마주쳤잖아. 기억나지? 5월 석양의 구름처럼 황금빛과 흰색 털이 섞여 있던 그 개 말이야. 그 개가 새끼를 네 마리 낳았어. 그런데 우유 배달 아줌마 살룻이 그 새끼들을 마드레스 거리의 자기 오두막으로 데려갔대. 왜냐하면 자기 꼬마가 아팠는데 돈 루이스 강아지 수프를 먹여야 한다고 그랬대나? 플라테로야, 너는 로바토의 집과 마드레스 다리 사이에 타블라스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 거야.

사람들이 말하기를 로바토의 개는 그날 하루 종일 마치 미친개처럼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도로를 기웃거리고, 흙담을 기어오르고, 지나가는 사람들 냄새를 맡는 등 안절부절 못했다는구나. 사람들은 저녁기도 시간까지도 그 개가 오르노스 거리의 감시인 집 곁에 놓인 석탄 자루 위에서 석양을 보며 슬프게 울부짖는 걸 보았대.

너는 엔메디오 거리에서부터 타블라스 거리까지 얼마나 먼지 알지? 그 개는 그날 밤새도록 네 번이나 그 길을 왔다 갔다 했다는구나. 그리고 한 번 올 때마다 입에는 새끼 한 마리씩을 물고 왔다고 해. 날이 밝아 로바토가 문을 열자 엄마 개는 문지방에서 잔뜩 불은 붉은 색 젖꼭지를 물고 있는 새끼들을 꼭 품고서 행복하게 자기 주인을 바라보았다는구나.

(후안 라몬 히메네스, 《플라테로와 나》, 박채연 옮김, 을유문화사, 2013, 127-28면)

 

배달 아줌마 살룻의 자식을 위한 지극정성을 이해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남의 새끼를 삶아서야 되겠습니까. 흰 털이 섞인 황금빛 개에게는 이 무슨 날벼락입니까. 밤새도록 새끼를 입에 물고 엔메디오에서 타블라스까지의 먼 길을 네 번씩이나 오가는 개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그리고 “문지방에서 잔뜩 불은 붉은 색 젖꼭지를 물고 있는 새끼들을 꼭 품고서 행복하게 자기 주인을 바라보”는 모습도.

 

LXII. 그 여자와 우리들

 

플라테로야, 아마 그 여자는 가고 있을 거야. 어디로 가냐고? 그 까맣고 외로운 고속열차를 타고 흰 구름 사이를 뚫고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겠지.

나는 너와 함께 아래쪽 노랗게 익어 춤추는 밀밭 사이에 있었어. 그 사이사이에는 7월이 이미 잿빛 왕관을 씌워 준 양귀비가 피 흘리듯 군데군데 피어 있었지. 그리고 기차 연기 같은 흰 구름은 정처 없이 흘러 다니며 간혹 햇빛과 꽃들을 가리곤 했어. 기억나니?

그때 작은 금발 머리에 검은 베일을 쓴 여자를 보았지! 그녀는 마치 사진틀 같은 차창에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초상화 같았어.

어쩌면 그 여자는 “저 상복을 입은 사내아이와 은색 당나귀는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우리가 누구겠어! 우리지......그렇지, 플라테로?

(후안 라몬 히메네스, 《플라테로와 나》, 박채연 옮김, 을유문화사, 2013, 129면)

 

도시적 이미지와 전원적 풍경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녹여낸 시입니다.

 

‘금발’ 머리와 ‘검은’ 베일 / ‘은색’의 플라테로와 ‘검은’ 상복의 나. 색의 배합이 자연스레 ‘한 여자’와 ‘플라테로와 나’를 등치 시켜 ‘플라테로와 나’를 둘이 아닌 하나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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