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시를 줍다 - 양성우 시화집
양성우 시, 강연균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옛사랑에게

 

우연이라도 너를 만나야겠다.

무척 오랜 뒤에도 잊을 수 없는 한 사람.

만나서 두 팔로 너를 힘껏 껴안고 싶다.

그때는 네가 귀 기울여 듣고자 해도

내 입으로는 한마디 말하지 않으리.

내가 어찌 마음의 어둔 길을 걸었는지를.

그래도 내 안에 가득히 설움이 차오르면

눈물 대신 겉으로는 환하게 웃어야지.

너는 내 영혼의 변하지 않는 긴 그림자.

너와 나의 하루가 아무리 고단해도

사랑만 있으면 사는 것이 아니던가.

어느 곳에서라도 몹시 그리운 너를 만나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다.

(양성우, 《길에서 시를 줍다》,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26면)

 

“이런저런 기로에 서면 ‘그’는 어느 길을 선택할까 짐작해봤습니다. 이해관계에 빠져 허우적댈 때는 ‘그’에게 부끄럽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잘 살아온 구석이 조금은 있다면 ‘그’가 잘 이끌어준 덕분입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를 만나 고맙다는 말을 건네지 않고 죽을 수는 없다고 믿었는데, 삶이라는 게 ‘살아갈 나날’이 아니라 ‘남아있는 나날’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조바심이 엄습했습니다. 억울하기도 하고 복받치기도 했지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머리를 무릎 사이에 깊이 묻었다 들어 두리번거리니 굳이 말을 건네거나 나누지 않아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멀리서라도 그윽이, 하염없이 바라볼 수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천 년 전부터 잊은 적이 없는, 천 년 후에도 잊을 리 없는 그의 이름은 〈옛사랑〉입니다.”

[더 읽기]

 

2007년 〈랜덤하우스코리아〉의 시화집 시리즈의 한 권으로 출간된 《길에서 시를 줍다》는 그 시리즈의 다른 시집들과는 달리 품절되지 않고 아직은 살아있는 시집입니다. 김남조, 도종환, 정호승 등 다른 시인들은 ‘시선집’을 냈는데 양성우 시인은 ‘신작시집’을 출간했습니다. 이 시집은 이전에 낸 시집들과는 달리 ‘사랑’을 주제로 한 시들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옛사랑에게〉,

“우연이라도 너를 만나야겠다”로 시작해 “어느 곳에서라도 몹시 그리운 너를 만나/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다”로 끝나는 이 시는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시작과 끝에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 ‘그리움’에 대한 시인의 반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화자는 ‘그리움’을 이 시의 처음과 끝에서 〈만나다〉(‘만나야겠다’, ‘만나’)로 드러냅니다. 처음에는 우연이든 고의든 어쨌든 만나야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하지만, 마지막에서는 만나겠다는 의지는 약해지고 만나고 싶다는 희망사항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만남의 구체적인 방식도 〈바라보다〉로 물러섭니다.

첫 행의 ‘만나야겠다’가 아직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그리움’을 만나는 방식이라면 마지막 행, ‘바라보고 싶다’로 바뀐 〈만남의 풍경〉은 ‘여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그리움’을 만나는 방식입니다.

 

첫 행 이전에 생략된 부분은 둘째 행에서 마지막 두 행 사이를 채우고 있는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일 겁니다. 어떻게든 만나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느냐, 너에 대한 그리움으로 내 삶은 내내 폐허였다, 보상하라 등등. ‘옛사랑’에게 자기가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확인시키는 허망한 일로 밤을 지새우겠지요.

 

‘여생’을 사는 사람의 모습인 첫 행 다음의 풍경은, 시행을 따라 읽으면 이렇습니다. 평생을 잊지 못하지만 단지 한 번 껴안아 봤으면 좋겠다(이뤄지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 살았느냐 묻는다 해도 입을 열지 않겠다, 쏟아져 나올 말들은 온통 ‘그리움’일 테니까, 힘들 게 살았다 복받친다고 왜 그걸 그대에게 이야기하며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겠느냐, 그냥 웃을 뿐. 그리고 바라볼 뿐.

 

첫사랑, 그대를 향한 사랑, ‘그리움’과 ‘서러움’이 다이지만, 그 ‘그리움’과 ‘서러움’ 덕분에 내가 잘 살아왔음을 시인/화자는 깨달은 모양입니다. 60대 중반에.

 

〈겨울공화국〉이나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으로 양성우 시인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오늘 나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옛사랑에게〉는 의외일 수 있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사랑’이 남녀 간의 사랑의 맥락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달관까지 내닫지는 않았어도 벼린 맛은 한결 덜합니다.

 

“여보게

우리들이 만일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

사나운 자의 총 끝에 쓰러지거나

쓰러지며 쓰러지며 부르짖어야 할 걸세

 

......

여보게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컫게 하고,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 온 몸을 버둥거려야

하지 않은가

여보게”

(〈겨울공화국〉 마지막 부분)

 

뭉클하게, 뭉툭하게 후비는, 1980년대의 그의 시집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이런 시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시인의 이런 변화, ‘있어야 함’ 쪽에서 ‘있음’ 쪽으로 더 가깝게 자리를 옮긴 게 세상을 보는 그의 눈길이 달라져서는 아닙니다. 그의 시에서 차지하는 ‘그리움’의 크기가 커졌고 시인이 ‘벼린 맛’ 뒤에 숨겨 놓았던 ‘따뜻함’을 편하게 겉으로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겨울공화국〉의 시혼이 세월을 지나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있는지는 다음 차례입니다.

 

다음 두 시는 이 시집에서 일부러 뽑은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시입니다만 이 시 들도 남녀 간의 사랑의 맥락에 갇혀있지는 않습니다. 해설은 군더더기일 뿐이겠습니다.

행복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랑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을지라도

티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랑하다가 죽어서 전설이 되는 사람은

더욱 행복하다.

언제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사람은.

오늘은 두꺼운 얼음 위에 맨살로 누워도

사랑을 찾아서 어디론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양성우, 《길에서 시를 줍다》,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20면)

 

죽도록 너를 사랑하다가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시작과 끝이 없는 것.

네 안에서 고스란히 영혼을 태운 뒤에는

이름 없는 들꽃 한 송이로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도

뜨거운 내 마음을 아무도 누르지 못하리.

죽도록 너를 사랑하다가

어느 날 아침 내 몸이 안개처럼 흩어져버릴지라도

뜨겁고 붉은 내 마음을 아무도 누르지 못하리.

그래도 너와 나의 운명의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니.

언젠가는 아득히 홀로 가는 먼 길을 어찌하리.

사랑한다는 아픔이여.

(양성우, 《길에서 시를 줍다》,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21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