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학교 - 이정록 시집
이정록 지음 / 열림원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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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어머니와 한 몸이 돼, 아들은 오른손만 빌려드렸을 뿐 오롯이 엄마가 써내려간 시집《어머니학교》를 낸 이정록 시인이 이번에는 시집 《아버지학교》를 냈습니다. 아버지의 경우에도 엄마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아(우연한 기회에 운 좋게 얻어들은 극비사항에 따르면), 시인은 쉰 살이 된 올해 쉰여섯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아 단 수무엿새 만에” 이 시집의 시를 몽땅 써냈습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교수가 지난번 시집 발문에서 “《어머니학교》가 하나의 성장서사가 된다”고 정곡을 찌른 바 있는데 이번에는 시인 스스로가 “두 시집을 나란히 읽어보니 〈성숙시집〉같다. 생의 여로가 그렇게 이어진 듯싶다”고 합니다.

 

 

이정록 시인의 여러 지인들이 진반농반으로 하듯, 시인의 체질을 엄마에게서 물려받았다면 올곧은 천생 진국인 성품은 아버지의 다음과 같은 평생의 가르침 덕분인 듯합니다.

 

“모든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유머러스하면서도 슬기로운 삶으로 치면 《어머니학교》가 한층 윗길이지만 곧 죽어도 사내의 삶으로 치면 단연 《아버지학교》입니다.

72편의 시를 실었던 엄마시집에 비해 아버지시집은 56편밖에 싣지 않았지만 있어야 할 덕목은 다 갖췄습니다. 56편의 시를 다섯 부분으로 나눴는데 소제목만 봐도 어떤 시집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끌립니다.

 

1. 가슴은 식어야 넓어지는 겨

2. 똥구덩이에 빠져도 기죽지 마라

3. 큰 걸음으로 건너가라

4. 아버지의 마음 한쪽을 상속받았습니다

5. 얼음지붕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얼음으로 살아야 한다.

 

산문 3편이 묶인 한 부분이 있는데 이곳의 소제목은 딱 엄마 취향을 닮았습니다.

 

6. 사랑을 하면 가슴팍에 짐승이 돌아다니고 귀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학교》,《아버지학교》두 시집은 무더운 여름에도 잘 읽힐 시집입니다. 강추합니다.

 

털신

아버지학교 52

 

군청 앞 백화식당에서 글 쓰는 벗들과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고 있는데, 흘깃흘깃

나를 훔쳐보던 도우미 아주머니가 제 옆에 앉았습니다.

미남을 알아본다고 친구들이 농을 쳤습니다. 저를 아세요?

여쭙는 순간, 십여 년 전의 안개천지라는 식당이 떠오르고

사십여년 전의 뾰족구두가 떠올랐습니다.

이 자字, 경 자, 연 자 쓰는 분을 아세요?

네, 아버님이십니다. 정말 닮았다 했어요. 근데, 요즈음 뵐 수가 없어서요.

작년 봄에 돌아가셨어요. 순간, 낯빛을 파르르 떨며 무릎을 꿇고는

제게 술잔을 건네는 거예요. 한 손으로 편하게 받아요.

이 잔은 아버님께 올리는 겁니다. 저도 무릎 꿇고 잔을 건넸지요.

한 손으로 따르란 걸 두 손으로 올렸지요. 아들로서 올리는 거예요

찡긋 웃어 보였지요. 돌아가신 날짜랑 선산도 알려드렸어요.

당연히 어머니에겐 비밀로 부쳐야죠. 하늘나라로 부치는

어머니의 편지가 끊기면 많이도 심심하고 궁금할 테니까요.

그분을 뵌 지도 십수 년이 흘렀네요.

요번 기일에 내려오면 군청 앞 백화식당에 들러보세요.

찾아갈 때에는 저처럼 뿔테안경에 파마머리로 가세요.

제 나이 쉰이고, 아버지는 쉰여섯에 떠나셨으니 속을 거에요.

그분 연세도 일흔이 넘었으니 주름졌다고 실망하진 마세요.

만나면, 아직도 경 자, 연 자, 쓰는 분이 그리워요?

개구쟁이처럼 몇 번이고 물어보세요. 저는 주로 청바지를 입어요.

저도 들러볼게요. 그럼 하루에 두 번이나 왔냐고

기뻐하시겠지요. 그 옛날처럼 돌아서서 눈물 찍으시겠죠.

참, 그분은 이제 뾰족구두 대신에 털신을 신어요.

어머니처럼 눈자위가 젖어 있고요.

(이정록, 《아버지학교》, 열림원, 2013, 92-93면)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애이불비哀而不悲,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고 했습니다. 속으로는 슬퍼도 겉으로는 슬프지 않은 척, 아프지 않은 척해야한다는 말이지요.

 

아버지가 오십대에 다니시던 술집의 아주머니를 아들이 오십대가 돼 만나는 자리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애인(실은 아들도 아는 아주머니, 〈삐딱구두〉참조)을 아들이 만나 술잔을 주고받는다는 줄거리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시는 그러나 제대로 된 산문으로 늘어놓으면 웃음과 눈물을 함께 보장할 수 있는 한 편의 스토리가 됩니다. 이 도우미 아주머니, 어린 시절, 아버지가 집에 데리고 들어왔던 〈삐딱구두〉입니다. 대를 이은 길고 긴 인연입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어머니학교》에 실린 다음 시를 읽어보세요. 더 절절한 스토리가 가능합니다.

 

삐딱구두

어머니학교 66

 

뭔 일 저질렀나?

늦기는 해도 외박은 없던 양반인데 말이여.

일이 손에 안 잡혀. 물동이를 이어도 똬리가 쪽머리에 걸치고

고추 순을 집어도 가지째 꺾어대야. 아니나 다를까 저물녘에

개똥참외처럼 노란 택시 한 대가 독 오른 복어처럼 들이치더구나.

반가운 마음하고 속상한 마음을 썩썩 비벼서 한마디 쏴붙이려는데

삐딱구두에 명태알 같은 스타킹이 택시 뒷문에서 나오는 거여.

먼저 내린 아버지가 양산을 펼쳐주며 눈꼬리에 은방울꽃을 매달더구나.

들고 있던 연장을 휘둘러도 시원치 않을 판에 내가 뭔 죄를 졌다고

땀 닦고 치마에 검불을 떼어내며 머리를 조아렸는지 몰라.

아버지가 누추한 내 몰골에 혀를 차더니, 작은댁 출출할 테니

조기 굽고 닭 잡아서 뚝딱 밥상 차리라고 으름장을 놓더구나.

머리로는 쥐약에 살충제를 간간하게 섞어서 국 끓이고

된장 독 구더기만 꺼내다가 호박전을 부쳐주고 싶었다만

이 악물고 소찬이나마 정갈하게 한 상 차려 올렸지.

뭔 구경났다고 빡빡머리 새끼들은 어미 입성 한번 보고 그쪽 한번 보고

그 양반은 애들 차례로 불러서 동전닢 뿌리며

구정물에 양조간장 치듯 싱긋싱긋 웃어대는데 환장하겄더라.

숟가락 놓자마자 삐딱구두를 툇마루 옆 토끼장으로 불렀지.

토끼가 먼저 울었는지 붉은 눈으로 쳐다보더구나.

앞길이 창창한 처자가 우리 집에 제 발로 들어와줘서 고마워.

논은 열일곱 마지기고 밭도 몇 뙈기 있으니 밥은 굶지 않을 거여.

종갓집이니 제사와 시제는 당연하고 한식 차례도 잘 부탁하네.

내가 밭이 성해서 삼삼 이녀 골고루 뒀으니 후손은 걱정 말게.

이미 들었겄지만 시어머님이 두 분이니 공경심이 곱으로다 필요할 거여.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있으니 꼭 들어줬으면 하네.

자네는 이제부터 농사짓고 밥하고 빨래하며 살아가야 할테니

그 필요없는 삐딱구두와 양산은 나에게 선물로 줌세.

나도 고것만 있으면 읍내 제일은행원도 사귈 수 있겠구먼.

어뗘? 빛바랜 양산과 구두 한 켤레를 비싼 논밭하고 맞바꾸면

괜찮은 거래 아닌감? 내가 말의 시치미도 거둬들이질 안 했는데

바깥마당으로 나가서 기다리던 택시에 겨들어가더라고.

한 시간 안에 저 여우를 다시 태우고 나가게 될 거라고

택시기사와 내기를 걸었거든. 돈을 걸었지만 어떻게 받겄어.

삼십 년도 더 지난 얘기여. 지금 읍내 제일은행에 손녀가 다니는데

들를 때마다 나 혼자 머쓱하고 불콰해지고 그랴.

그때 삐딱한 인연을 바꿔치기 했으면 어찌 됐을까, 하고.

(이정록, 《어머니학교》, 열림원, 2012, 113-115면)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활과 리라>에도 올려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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