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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땅
김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평점 :
눈을 뗄수없는 치밀한 묘사로 시작되는 김숨 작가의 이번 신간은 강렬한 이미지 그대로 잊혀지고 찢겨진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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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반이 된 고려인 강제이주.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과 더불어 연해주에는 여행 금지 조치가 내려졌고, 11월 새벽 갑작스럽게 연해주에 정착해있던 고려인들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태워졌다. 이는 스탈린의 소수민족 이주 정책으로 연해주, 극동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켜 버린 것. 고려인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유다. ⠀⠀⠀⠀⠀⠀⠀⠀⠀⠀⠀⠀⠀⠀⠀⠀⠀⠀⠀⠀⠀⠀⠀⠀⠀⠀⠀⠀⠀⠀⠀⠀⠀
성냥을 긋고 긋는 소리, 양철 그릇들이 허공에서 자지러지는 소리, 게딱지 같은 빵 껍질 뜯어 먹는 소리, 코고는소리, 맥없이 앓는 소리, 널빤지 뒤틀리는 소리. 그리고 마침내 석탄더미 같은 어둠 저편에서 “엄마, 우린 들개가 되는 건가요?”라는 열병을 앓는 듯한 소년의 목소리가 소설의 도입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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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니라 말이나 가축을 실어 나르는 3.5평 열차 한칸에 27명의 고려인들. 소설의 서사는 지문보다 그들 개개인의 고통으러운 사연과 지옥같은 역사를 입체적인 목소리로 이어간다. 마치 까만 장막안 연극을 보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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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에 이어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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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 지린내, 눅눅해진 건초가 썪는 냄새, 굿릿한 살냄새, 케케묵은 목화솜 냄새, 땀과 때에 찌든 옷냄새, 보드카 냄새, 담뱃잎 타는 냄새, 염장 청어 냄새가 뒤섞여 열차 공기중에 떠돈다.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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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안으로는 생사 확인 조차 불가능한 오물투성이 열악한 열차안에서도 음식과 이불을 나누고, 머리를 땋아주고, 죽은 아이를 위해 염을 해주며 서로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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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을 받아줄 땅을 찾아 떠도는 소설속 고려인의 아픈 여정은, 우리도 모든 사람이 한곳에 정착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모두 어디선가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커다란 세계 속 이주열차에 타고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는 난민 같은 존재라고 말한 저자의 철학이 그대로 담겨있다. ⠀⠀⠀⠀⠀⠀⠀⠀⠀⠀⠀⠀⠀⠀⠀⠀⠀⠀⠀⠀⠀⠀⠀⠀⠀⠀⠀⠀⠀⠀⠀⠀
김숨작가는 전작 <한 명> <흐르는 편지>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었고 구상과 집필에만 꼬박 4년, 다시 개고하는 데만 2년 6개월을 쏟아부은 이번 소설로 다시한번 숭고한 문학적 의미를 남겼다. 고독한 작가님이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날들이 오기를..
(김숨은 필명. 본명은 김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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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가 뿌리 뽑히고 삶이 왜곡돼 일생을 떠돌며 살았던 카레이스키들의 이야기 (작가의 책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