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생의 선택, 그 고독하지만 고고한 삶과 희망에 관하여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팔로스버디반도. 수십 가지의 꽃과 나무들이 가득한 넓은 정원과 푸른 바다가 둘러쌓인 이곳은 따뜻한 태양 빛과 푸르른 녹색 내음, 상쾌한 바다냄새가 어우러진 곳이다.
소설 속 주인공 겐야가 머무는 기쿠에 고모의 저택. 이 아름다운 곳을 배경으로 겐야는 막대한 유산을 남긴 고모가 남긴 비밀의 흔적을 쫒아간다.
갑작스런 고모의 죽음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겐야는 변호사로부터 고모가 420억원에 해당하는 유산을 남겼다는 말을 듣는다. 고모가 유언장에 쓰려했다는 마지막 문장으로 그는 백혈병으로 죽은 것으로 알려진 사촌 레일라가 사실 유괴를 당해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7년이나 지나 흔적은 거의 없지만, 그는 마지막으로 탐정을 고용해 레일라를 찾기로 결심한다.
탐정 니콜라이에 의해 레일라가 실종된 마트안 CCTV를 발견하게 되고 그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는다.
누군가와 함께 레일라는 마트 화장실에서 나와 고모에게 웃으며 타월을 흔들며 멀어지고 있었고, 기쿠에 고모는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유괴 사건 이면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혼란스럽기만 한 겐야는 다시 고모가 남긴 비밀상자 속 편지를 살펴본다. 누군가의 눈을 피하듯 비밀스럽게 편지로 왕래했던 교코의 편지 속에 등장한 멜리사는 누구일까? 레일라와 같은 서른 셋의 나이, 정원앞 테라스에 달려있던 서른 세 개의 거베라 화분. 이는 단지 우연일까?
자신의 딸을 누군가에게 유괴하도록 해서 27년간 말못할 비밀을 지켜내며, 눈 앞에서 자식을 보지 못했던 기쿠에 고모. 그녀는 과연 무엇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던 것일까?
드러난 진실은 추악했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으로 여겨졌던 그녀의 남편 이언의 딸을 향한 이상한 행동을 그녀는 감지했지만, 그로부터 딸을 지킬 수는 없었다. 이혼을 한다해도 딸의 양육권은 남편이 갖게 될 것이므로 그녀는 딸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자신으로부터 딸을 떼어놓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북쪽 동 긴 차양이 오후의 강한 햇빛으로부터 거베라를 지켜주고 있듯,
그녀는 온 몸으로, 자신의 생을 다해 비극적인 인생을 감내하면서, 위험과 슬픔으로부터 그녀의 딸을 지켰던 것이다.
평온하고 아름다운 곳에 숨겨진 비극은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지만,
그녀의 희생덕분에 그녀의 딸 레일라는 멜리사가 되어 밝고 환한 태양빛처럼 여전히 눈부시게 빛날 수 있었다.
서정문학의 대가라 불리는 미야모토 테루의 작품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이 책은 슬픔과 안타까움, 아름다움과 행복함이 함께 느껴진 소설이었다. 인간의 삶이 희극과 비극이 함께 존재하듯, 기쿠에 고모의 비극 속에서도 그녀의 따뜻함과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답해주듯, 그녀가 소중하게 지킨 레일라의 모습을 상상하며 밝은 희망의 빛을 떠올릴 수 있었다.
꽃들끼리 이야기를 시작한 듯한 기색이라고 해도 좋았다. 겐야는 귀를 기울였다.
수목의 가지와 잎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겐야의 청각에 닿는 것은 좀 더 부드러운, 속삭이는 목소리인 듯한, 마음을 가진 생물의 말이었다. 조금전부터 겐야 안에서 조용히 계속되던 공포는 사라졌다.
겐야는 중정을 걸어가 꽃들을 바라보며,
"예쁘구나. 정말 예뻐."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 p.62
비극적 상황속에서도 레일라 주변에 존재하는 따뜻한 사람들때문에 이 책은 어둡지 않다.
기쿠에 고모를 비롯하여 그녀의 부모가 된 교코와 케빈, 그리고 이름모를 풀꽃들....
보스턴 저택의 정원에 핀 꽃들과 같은 기쿠에 저택 정원의 풀꽃들..
ㅡ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단다. 거짓말 같으면 진심으로 말을 걸어보렴. 식물들은 칭찬받고 싶어 한단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칭찬해주는 거야. 그러면 반드시 응해올 거야.
아주 어렸을 때가 몇 살 때쯤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할머니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가르쳐준 비밀 의식은 나무나 풀꽃들에게 말을 걸어 칭찬하고, 칭찬하고, 또 칭찬해주면 나무도 풀꽃들도 답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음이 있으니까. - p.159
정원앞에서 레일라에게 어떤 슬픔과 위험에서도 너를 지켜줄거라고 이야기해주었던 기쿠에 고모의 약속을 풀꽃들이 기억하고, 그 약속을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무서운 일이나 슬픈 일이 일어나도 엄마가 반드시 도와줄 테니까, 레일라는 그냥 안심하고 있으면 된다고 말이에요. 그러고 나서 기쿠에 씨는 레일라가 얼마나 영리하고, 마음씨가 얼마나 고우며, 모두에게 얼마나 사랑받는 아이인지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해주었대요. 어른이 되면 키도 크고 다들 돌아볼 만큼 예뻐질 거야, 그렇게 되도록 이 꽃밭에 부탁해보자, 꽃에게도 풀에게도 나무에게도 마음이 있어, 그것을 잊으면 안 돼, 레일라의 마음과 꽃, 풀, 나무의 마음을 말을 할 수 있어. 꽃도 풀도 나무도 말을 하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말해줄 거야. 레일라도 언젠가 꽃, 풀, 나무와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거야., 그러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도 알게 될 거고 ....." - p.393
이 책을 읽고 난 후 인상깊은 두 장면이 마음속에 콕 박힌다.
멀어지는 레일라를 보는 기쿠에의 모습.. 그리고 기쿠에 저택의 풀꽃들이 가득한 풍경들.
슬프고 안타깝지만, 아름답고 따뜻한 소설이었고, 한편의 시같은 소설이었다.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펼쳐내는 작가의 언어들은 풀꽃들의 조용한 소근거림을 전해주는 듯했다.
기쿠에의 온 생을 다바쳐 지켜온 소중한 것. 그녀의 딸 레일라의 밝은 웃음소리가 풀꽃들의 재잘거림과 함께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