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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줄도 읽지 못하게 하라 - 누가 왜 우리의 읽고 쓸 권리를 빼앗아갔는가?
주쯔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금서의 역사는 문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기원전 440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 정부가 풍자 희극을 금지했던 때부터 20세기 중반 소련에서
작가들이 박해를 받던 때, 아니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금서의 아픈 역사는 계속됐다. 놀라운 점은 성에 대해 개방적이고 관용적으로 여겨지는
미국에서도 불과 몇십 년 전까지 불온서적, 음란서적이라는 명목 하에 문학적 가치를 지닌 여러 명작들을 금서로 지정하고 몰수했다는 것이다. 국왕과
정부, 종교기관, 사법부가 윤리와 질서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신들의 권위에 반하는 작품들을 향해 검열의 폭력을 휘둘렀다. 수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기회를 박탈당했을 뿐 아니라 작품이 불태워지고, 고발과 기소를 당하고, 투옥하고, 고국에서 추방당하고, 심지어
목숨의 위협을 받거나 사형선고를 당하는 등의 갖은 아픔을 겪었다. 열정을 불살라 낳은 자식같은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길 포기하거나 뜯어고치며
검열당국의 눈치를 봐야했을 괴로움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금서를 유통한 출판사들도 법적 분쟁에 시달렸으며 금서의 번역가가 살해당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용기있는 누군가들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살아남은 작품들은 훗날 명작으로서 그 가치를 재평가받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영향력이 상당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법한 작품, 문학의 새 지평에 도전한 작품들이야말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사상적 영향력과 예술성, 저항과 도전정신을 높이 살 만한 금서들, 그리고 그 저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떠돌고 정부가 영화와 드라마, 코미디에까지 도끼눈을 뜨고서 갖은 수로 개입을 일삼은 정황이 속속 드러나며,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추진되는 이 사회는 여전히 우리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충분히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 씁쓸한 일이다. 이 책의 수많은 금서의 사례들은,
진정한 문학의 가치는 아무리 짓누르고 불태우고 난도질해도 살아남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는 읽고 쓸 권리를 쟁취하고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존재할 때에만 가능한 이야기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책 속에서 #
p.10 (옮긴이의 말 중)
"나의 책들 속에서 언제나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제 와서 너희들이 나를 거짓말쟁이처럼 취급한단 말이냐!
너희에게 명령한다.
나의 책을 불태워다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1938년에 쓴 시 <분서>는 나치의 분서목록에서 자신의 책이 빠진 것을 알게 된 한 시인의
외침이다.
p.13-p.14 (옮긴이의 말 중)
한마디로 금서는 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거울이자 자유의 수준을 판단하는 잣대다. (…) 1933년 헬렌 켈러가 나치의 분서에 항의하며
남긴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당신들이 사상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
p.40-p.41
모든 것이 중단되었다. (…) 내게 남은 것은 시간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더 시간과 가까워졌다. 그것은 더 이상
예전에 내가 알았던 시간이 아니었다. …… 이제 그것은 벌거벗은 시간이었다. 시간은 자유로운 그 자체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가장 기본적이고
원시적인 상태의 시간이 내게 자신의 진정한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다. 그리고 내게 한순간도 자신을 잊지 말고 계속해서 내 앞에 두고 그 무게를
느껴달라고 했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 중, 정치범으로 강제 노역을 하던 루드비크의 생각)
p.55
솔제니친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정의로움을 느낄 수 있다면 정의는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이나 양심과 관계된 비밀,
생사의 모순과 관계된 비밀, 전쟁 승리에 관한 고통스러운 비밀, 전 인류에게 적용되는 법칙을 이야기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다. 그 법칙은 기억할
수조차 없는 수천 년 전에 생겨났으며 태양이 사라지지 않는 한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말 한마디가 이 세상 전체보다 더
중요하다."
p.113
작가[<벌집>을 쓴 스페인 작가 카밀로 호세 셀라]는 "이 소설은 삶의 단편일 뿐이다. 무언가를 감추지도 않고 대단한 비극도
아니며 선심을 베풀지도 않는다. (…)"라고 말했다. 소설의 묘사가 과도하다는 비판에 대해서 "내 펜 끝에서 그려지는 어두운 그림자가 너무
강렬하지도, 너무 진실하지도 않도록 하기 위해 내가 잉크병에 몇 번이나 물을 섞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p.114-p.115
그[셀라]는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작가로서의 고충을 밝히며 "사소한 정치적 원인으로 언어ㅡ모든 언어ㅡ가 공격자들 앞에서 웃는 얼굴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또한 작가는 "힘들지만 언제나 환영받지 못하는 임무를 지고 자유와 인간의 창의성을 높여야
한다. 그래야만 문학이 본연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라고도 했다.
p.138
그들에게 죽음은 하나의 은총이었다. 죽음만이 그들을 죽음의 공포와 끔찍한 고독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이머가 쓰러져 죽어갈 때
사람들은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았다. 상황이 그렇게 해서 끝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당시
신문에서는 이런 냉혹한 한마디로 표현되었다. '서부 전선 이상 없음.'
p.139
두 눈을 감는다. 이대로 전쟁, 공포, 비열함이 다 사라지고 젊음과 행복이 다시 깨어났으면 좋겠다. …… 문득 그녀를 손에 넣어야만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감싸고 있는 두 팔을 꼭 끌어안으면 혹시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마르크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중)
p.159
비열한 사람은 이 말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말도 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반대로 인격을 갖춘
사람은 저열한 말을 들어도 그 인격이 더럽혀지지 않는다. 진흙이 찬란한 햇빛을 더럽힐 수 없고, 땅 위의 더러움이 아름다운 하늘에 오점을 남길
수 없는 것과 같다.
(보카치오 <데카메론> 중)
p.279
한편 소설이 죄악을 고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황당한 논리라고 반박하며 "진정한 예술품은 죄악을 고발할 필요가
없으며 작품의 논리 자체로 도덕성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결론을 내리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라고 말했다. 문학작품의 역할은 비판이
아니라 표현이라는 것이 그[<보바리 부인>의 작가 플로베르]의 주장이었다.
p.384
그는 나를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붉은 가운으로 감싸서 하늘을 가려버렸어. 길 가는 사람이 "추기경의 가운 안에 들어 있는 게 뭡니까?"라고
물으면 누구든 대답할 수 있을 거야. 그 안에 국왕이 있다고!
(추기경이 실질적인 국왕임을 한탄하는 루이 13세의 말. 남의 얘기 같지가 않은 게 웃프다.)
p.418-p.419
그들에게 '윤리'란 '신앙'의 동의어였다. (…) 앞에서 열거한 금서들을 보면 교황청은 천주교에 불경을 저지른 문학작품을 주로 금서로
지정했다. 많은 작품에 '문란죄'라는 죄명을 씌웠지만 사실 로마교황청이 걱정한 것은 교회의 명예와 권위였다. (…) 진정한 음란서적들이 당시
서점에서 아무 통제 없이 버젓이 판매되고 있었는데도 <금서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