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 인문학자와 함께 걷는 인상파 그림산책
이택광 지음 / 아트북스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말은 그것을 '잘 안다' 내지는 '잘 알고 싶어한다'는 말과도 같다. 나는 여러 미술사조 가운데 인상주의를 가장 좋아한다. 하지만 오래 전 들은 미술사 교양강의만 가지고는 자신있게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부족하다. 그래서, 지난번 모네 미디어 전시를 보고 나서 기념품숍에서 제목이 눈에 들어왔던 이 책을 바로 주문하여 읽어보았다.

사진과 영상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눈에야 너무도 건전하고 아름답게만 보이는 인상주의 회화지만, 당대에는 소재 선택에서부터 구도, 색채, 제작방식까지 하나같이 파격적인 '아방가르드'였다. 그래서 인상파 화가들은 전통적인 미술가의 무대인 살롱에서 외면받았고 대부분 재정적 환경이 좋지 못했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일부는 꿋꿋이, 일부는 어쩌다보니 그 선구자적인 역할을 떠안고 걸어나갔다. 이 책은 인상파의 주요 무대였던 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화가들이 어떤 개별적 사연 속에 근대의 증인이자 새로운 시각의 주인으로서 걸작들을 남겼는지를 이야기한다.

책에는 내가 익히 아는 모네와 르누아르, 드가, 세잔 외에도 인상파인 줄 몰랐던 피사로와 시슬레, 이름부터 낯선 카유보트, 메리 커샛, 베르트 모리조 등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과 인생이 인상주의의 탄생부터 종언까지 이야기의 흐름 속에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인상파의 대표주자인 줄로만 알았던 르누아르가 도중에 인상주의와 결별하고 고전주의로 복귀했다는 사실이 내겐 좀 놀라웠고, 세잔의 말기 작품은 내가 알던 세잔보다도 훨씬 더 파격적이어서 그야말로 추상화에 가까웠으며, 내가 몰랐던 인상파 최초의 후원자이자 화가 카유보트의 작품들은 생각 이상으로 훌륭했다. 역시 나는 인상주의를 잘 몰랐구나 싶었다. 여성혐오주의자였다는 드가와 여류화가 메리 커샛, 그리고 마네와 또다른 인상파 여류화가 모리조의 썸스러운(?) 친구관계도 흥미로웠다. (요즘 말로 소울메이트 정도 되려나.) 곳곳에 삽화로 배치된 거장들의 작품은 눈을 즐겁게 한다.


# 책 속에서 #

p.5
19세기 파리는 근대화의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이 변화의 순간순간을 스냅사진처럼 찍어낸 것이 바로 인상파의 그림들이었던 셈이다.

p.41
마치 우리가 관광지에 가서 찍는 사진처럼, 모네의 그림이 담아내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여가를 통해 발견하는 '즐거운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모네의 그림에 등장하는 기차는 이런 여유로운 나들이를 가능하게 만들어준 문명의 이기인 것이다.

p.140-p.141
예술가는 언제나 가난한 동네를 찾아 철새떼처럼 떠돌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몽마르트르가 그랬고, 몽파르나스도 마찬가지였다. 집세가 저렴해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것이 이들 지역을 예술가의 고향으로 만든 원인이었던 것이다.

p.150-p.152
터너가 그랬듯이, 모네도 비평가들과 관객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 분노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로 새로운 그림의 패러다임이 탄생했다는 걸 뜻한다. 외부의 사물이 아니라 내부의 정서를 드러내는 것이 그림이라는 사실이 점점 확인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
인상파에게 풍경화는 야외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나에게 남긴 인상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이다. 상상도 아니고 묘사도 아니다. 사물의 인상을 다시 사물화하는 것이 인상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p.219
초기에 드가는 마네와 함께 보들레르의 시학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보들레르가 말한 '근대적 삶의 영웅주의'가 여기에 배어 있다. 이 영웅은 엄밀히 말해서 신화적 영웅이라기보다 근대적 일상에서 서사시를 만들어가는 존재를 의미한다.

p.242-p.243
일상의 풍경을 낯설게 만들어서 되돌아보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이것이 미학의 역할이다. 19세기 파리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다만 이들은 카메라 대신 그림을 통해 이런 욕구를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p.321
드가는 대상을 그렸다기보다 기법 자체를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 화가의 주관이 실리는 그 욕망의 배치가 고스란히 파스텔이라는 매체에 실려서 나타난다. 이 지점에서 파스텔은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가 말하는 것처럼 사물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사물을 '대리'하는 다른 사물로 바뀐다. 조금 어렵지만, 인상파 화가들이 말년에 추구한 것들은 이런 현대 미학에서 핵심적으로 다루어지는 내용들이라고 하겠다. (…) 이제 그림은 더 이상 주제의식과 아무 관계가 없는 '독자적인 장'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p.349
세잔이 예술의 목적을 영원한 자연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뜻은 각양각색의 주관을 통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볼 때마다 다른 자연의 양상을 모두 구현하는 것, 그 속에 바로 자연의 영원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세잔의 생각이었다. (…) 세잔은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을 연결하는 하나의 교두보를 만든 혁신가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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