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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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전 즈음, 남편이 좋아하는 빵을 사 두었다. 집 근처에 새로생긴 빵집의 빵인데, 식감이 거칠고 유기농 밀가루와 잡곡을 쓰기에, 이 집의 단골이 되었다. 남편이 좋아할 모습을 상상하며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두는 건, 꽤 고리타분한 부인일지 모르지만, 난 그 느낌이 좋다. 구시대적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빵이야~"


짜잔~ 하고 빵을 줬다. 그런데 남편의 표정이 영 애매하다. '고맙긴 한데 별로 고맙지 않아' 라는 온 몸으로 뿜어대는 아우라. 그제서야 생각났다.


"맞다! 자기 급식 대신 빵 먹었지!"


3일째 점심으로 빵을 먹던 남편에게, 또 빵을 내민거다. 아무리 빵돌이라도 입이 물렸을거다. 남편은 교사고, 그 즈음 조리조무사분들의 총파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며칠 째 급식 대신 밀가루 조각으로 배를 채우던 즈음이었다.

급식 조리조무사분들은 몇 년 전에도 목소리를 냈다. 파업을 했다. 그 때도 급식 대신 빵을 주거나 수업시간을 단축해야 했다. 불편했고 배고팠다. 조리조무사분들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그분들에겐 밥그릇 아닌가. 당시 파업의 결과 조리조무사분들은 계약직에서 '무기계약직'이 되었다. 몇 년 마다 한 번 재계약 하는 일자리가 아닌, 무기한 계약직이 된 것이다.


여론은 준 공무원이나 다름 없는거 아니냐며, 축하하기도 하고, 시샘하기도 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그 분들이 올해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낸 것이다. 무기계약직이긴 하지만, 여전히 '계약직'임에는 다름 없었다. 정규직이면 정규직이지, '무기계약'은 또 뭐람. 계약직은 언제나 위태롭다. 


만약 그분들이 정규직이 된다면, 형평성에는 어긋날 것이다. 다른 수 많은 취업준비생들은 뭐가 되는가. 하지만 당장 그 분들의 밥그릇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마음이 간다. 다른 취업준비생들이 직장을 가졌을 때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그런 세상 아닐까.



23쪽. "나 이 아이 어떻게 해야 돼?"

"자기가 하기 나름 아닐까"

- <알바생 자르기> 중


장강명 작가의 신작 연작 소설 <산 자들>은 다수의 사람들의 '밥그릇'이 얼마나 허무하고, 치사하며, 때로는 덤덤하게 빼앗기고 무시당하는지 나온다. 존엄하다는 인간은 없고, 부조리가 가득하다. 


이 중 <알바생 자르기>에서 계약직(알바생) 혜미는 타인에게 피해 하나 주지 않았지만, 계약직이기에 '이방인'이다. 일 할 능력은 충분했으나, 그녀는 싹싹하지 않은 알바생이었고, 자신의 권리를 챙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은 업무 능력과 무관하게 '자르고', '말고'의 사유가 된다. 그녀의 밥줄은 쉽게 잘릴만한 위태로운 것이었다. 


아슬아슬한 생계. 너무 비참하지 않나. 이 불안을 다수의 시민들이 안고 산다. 심지어 내로라 하는 대기업 사원들도 40대 중후반이 되면 긴장한다고 들었다. 대기업 정규직이란 성 안에서도 마음 놓지 못 하고 위험한 고용 불안은 도처에 널려 있다. 자영업자들도 서늘한 칼날 위를 걷는 삶은 매한가지였다.


118쪽.  "나눠 갖긴 뭘 나눠 가져. 처음부터 확 밟아 줘야 돼."

...

하중동 사거리에서 구수동 사거리까지, 100미터 길이의 거리에서 빵집 세 곳이 경쟁을 벌이게 된 것이었다.

- <현수동 빵집 삼국지> 중


<현수동 빵집 삼국지>는 하나도 낯설지 않다. 100미터 길이의 거리에서 빵집 세 곳이 벌이는 경쟁은 픽션(fiction)이 아닌 논픽션(non-fiction)이다. 심지어 '빵집'을 '카페'로 바꿔도 되고, '약국'이나 '편의점', 때로는 '치과'와 '소아과'로 바꿀 수도 있다. 한정된 소비자를 두고, 같은 업종의 사람들의 경쟁은 전쟁이었다.


3일째 점심을 빵으로 먹던 남편에게 사다 준 빵도, 우리 동네에 있는 4개의 빵집 중 한 곳의 빵이다. 4개의 빵집은 아파트 중심 200m 정도의 원 안에 모여있다. 프랜차이즈 빵집과 목 좋은 곳의 빵집, 오랜 기간 운영해 빵 굽는 노하우가 상당한 빵집, 그리고 유기농과 천연발효를 앞세운 빵집까지. 각각의 빵집에는 조금씩 손님이 오가지만, 어느 한 곳 붐비지 않는다.


장강명 작가는 계약직, 회사 노조, 부당 해고, 프리랜서 창작가(음악가, 작가), 급식 비리, 열정페이 등 밥그릇에 대한 10개의 짧은 연작 소설들을 그렸다. '썼다'라는 표현보다 '그렸다'가 어울린다. 이 소설은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면서도 '묘사'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작가는 어느 한 쪽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세상에 악인은 없었다. <알바생 자르기>의 혜미를 해고할까 말까 고민하던 은영마저도, 혜미가 안 됐다며 오랜기간 그녀를 보살펴줬던 인물이었다. 작정하고 나쁜 사람이 누군가의 생계를 두고 치사하고 졸렬하게 저울질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섬뜩했다.


자동차 회사 하나가 박살나면서, 해고당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이 된다. 그런데 '죽은 자들'의 오랜 파업으로 회사는 폭삭 망해버리고 만다. '산 자들'마저도 죽어 버리게 된 것이다.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 부당 해고 당한 죽은 자들의 파업일까? 혹은 그들을 외면하고 묵묵히 생계를 이어가던 산 자들의 태도일까? 죽은 자, 산 자 둘 다 아니라면,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인걸까. 


83쪽. 만들 수 있는 자동차와 살릴 수 있는 사람들 숫자가 모여서 큰 숫자가 정해지는 게 아니었다. 큰 숫자가 먼저 정해진 뒤 만들어야 하는 자동차와 사람들의 수가 정해지는 것이 순서였다.

- <공장 밖에서> 중

생각하지 않으며 살면, '평범한 악'을 지나치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기 위해서 '이야기'가 필요하다.


10편의 연작 소설을 읽으면서, 빵집에, 그리고 조리조무사분들이 궁금해졌다. 이야기의 힘이다. 사람들은 자신과 가까운 이야기를 들어야 관심을 기울인다. 지구온난화를 잊고 지내다가, 이상기후 때문에 몇 날 며칠 더워서 허덕될 때야 비로소 안 쓰는 방 불을 끄고, 쓰레기를 줄이는 일과 마찬가지다. 노동의 가치와 처우에 대해 아스라히 잊고 있다가, 소설을 읽으니 부당함게 분노한다.


처음, 내가 이 책의 서평을 써도 될까, 망설여졌다. 나는 겪어보지 못 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빵집 사장님들이나 조리조무사분들을 이해한다고 말 해도 되는걸까. 함께 화내도 되는걸까.


378쪽. 너무 어린 새나 늙은 새, 다친 새는 날 수 없다. 많은 새들이 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실제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때는 한정되어 있다. 놓칠 수도 있었던 잠재력을 깨닫고 목적에 맞게 쓴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 아닐까?

...

사람은 대부분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그른 것을 옳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능력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 중


<산 자들>의 마지막 연작,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에 실마리가 있었다. 누군가의 노동환경이 열악하고, 그로인해 매일 외줄타기 하듯 힘들게 사는 분들이 있다고 말해야 했다. 서평을 써야, 작지만 옳게 바꿀 수 있는 작은 능력을 실제로 사용하는 '하늘 나는 새'가 되는 방법이었다. 


이 작은 서평으로 많은 분들이 장강명 작가의 <산 자들>을 읽도록 설득하는게, 공무원 정규직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부디 이 책을 '읽어봄직하다'는 마음이 드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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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하고 게으르게
문소영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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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망설이는가. 할 수 있을 때 장미 봉오리를 모으라!

 

힘 있는 책들이 있다. 201911, 새해 목표로 잡았던 일들을 미루며 뭉게고 있을 때, "당장 해보자!"며 등 뒤에서 있는 힘껏 밀어주는 그런 책들. 문소영 작가의 <광대하고 게으르게>는 그런 면에서 힘이 세다.

 

책을 읽기 전, 제목과 표지만 보면, 낮잠 후에더 아직 나른함에 취한 느낌이 든다. 제목 중 '게으르게'에 방점을 찍었달까.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웅크렸던 의욕을 이제 막 발산하려는 여인으로 보인다. '잘 잤다. 이제 시작하자!'며 기지개를 켜며 손과 팔로 큰 원을 그리기 직전의 모습이다. 여기서는 '광대하고'에 마음이 가버린 것이다.

 

이 책은 책, 그림, 음악, 영화 등 전 예술 분야를 넘나들며, 삶의 태도에 대해 정리한 에세이집이다. ‘예술을 공통분모로 삼았을 뿐, 메시지들은 지루할 틈 없이 다양하다. 명절, 페미니즘, 성실, , 욕망, 자존,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디엠까지. 다양한 주제는 넓은 과녁이나 마찬가지다. 신은 신발이 각자 다른 독자들의 마음은 넓은 과녁 중 어느 한 곳에 꽂히기 마련이다. 나도 그랬다. 내 상황에 꼭 맞는 문장들 덕분에 잠시 멈췄던 글쓰기에 용기를 냈다.

 

1. ‘에 대하여

 

나는 절약에 대한 글을 쓴다. 번 돈 보다 적게 쓰고, 비참하지 않은 우아한 절약을 하면서 좀 더 단단하게 살자는 글들이다. 그런데 한 동안 글이 손에 안 잡혔다. 절약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나의 상황이 순전히 이니까,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돈 덜 쓰는 삶을 권하기 미안했다.

 

매일 빗자루로 방을 쓸고,하루 한 번 한아름 쏟아지는 땀 냄새 절은 여름 옷들을 빨아 다리 부러진 건조대에 널었다. 냉장고 속 식재료를 매번 살피며 겹치지 않게 장을 봤다. 삼 시 세끼 조리대 앞에서 30분 요리 후, 밥 먹고, 다시 20분 설거지를 했다. 나에게 무선 청소기, 건조기, 외식, 식기세척기 등은 '필수품을 가장한 사치품'이었다. 아니, 그런데 이거 맞벌이 부부가 할 수 있어? 생계형 아르바이트로 바빠서 공부도 뒷전인 청년들에게 가능해?

 

의심이 시작되자, 위축되었다. 정답 없는 세상에 내 취향이 옳다며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타인을 고려하지 않은 무례한 외침으로 누군가는 아팠을지도 모른다.

 

262.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해?"

내가 계층, 연령, 성별 등을 생각하며 갈팡질팡 답을 고르고 있을 때 선생님이 다시 말했다.

"자수성가한 사람"

"난 노력해서 그 모든 난관을 극복했는데, 왜 너는 못하냐, 왜 세상 탓만 하느냐고 그 사람들은 또 묻지. 강철 같은 투지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그런 강철 같은 자세로 다른 사람들을 보지. 그런데 그 사람들의 성공에 과연 운이 전혀 없었을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춤추듯 절약을 즐길 수 있던건 운이 좋았던거다. 남들이 가질 수 없는 많은 것들을 갖추고 있다. 양가 부모님께서 하루가 멀다하고 듬뿍 얹어주시는 식재료들, 엄마에게 심하게 조르지 않는 두 딸, 아내를 존중하는 남편, 그리고 최신 전자제품에 의존하지 않고도 가사노동 할 수 있는 시간과 건강. 더불어 함께 절약하는 절약모임 멤버들까지.

 

나의 '''노력'인 줄 착각해선 안 되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남을 돌아보지 않는 일방적인 '절약 글쓰기'는 글쓰기 윤리에도 어긋나니까.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다물고 싶지 않은건.

 

나는 여전히 절약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전처럼 오마이뉴스 기사, 그리고 브런치에 절약 글을 올리지 못 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여건 덕분에, 적은 돈으로도 삶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가지고 있는 것' '남들은 가지지 못 한 것'이 있을까봐 조심스러웠다.

 

59. '내가 가진 것들'이 있다고 해서 '내가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해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와 동시에 나는 내가 가진 것들 덕분에 겪지 않는 불편함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

그런 식이라면 모든 문학과 예술은 획일화된 한 종류만 남을 것이다. 왜 세상에 추악한 부분이 많다고 해서, 그와 함께 엄연히 존재하는 아름다운 부분에 초점을 맞춘 작품을 만들면 안 되는가.

 

그런데 책의 이 구절로 인해 용기가 생겼다. 안정적인 직장에 빚 없이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 돈 보다 적게 쓰는 삶에 대해 계속 글을 쓰고 싶었다. 최소한의 소비에 집중해 온 3, 내가 겪은 변화가 많은 이들에게 닿길 바랐다.

 

돈에 흔들리지 않을 때, 원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돈이나 지위를 기준으로 위계를 나누며 열등감을 느끼기보다, 내가 무엇을 경험할 때 행복한지 묻고 답하는 시간 갖기. 돈을 주고 남들이 만들어준 물건과 서비스를 소비하기보다, 내 몸을 움직임으로써 할 줄 아는 재주 늘리기.

 

순전히 내가 가진 것들이 운이라 생각해서, 이런 아름다운 일상에 대해 입을 다물고 싶지는 않다. 용기가 나니, 마음이 동동거렸다. 오랜만에 오마이뉴스 최소한의 소비 연재 기사 한 편 보냈다. ‘절약에 철학이 있어 멋지다는 독자의 댓글을 보니, 문소영 작가의 말처럼 그저 입을 다물지 않길잘 했다.

 

3. 절약으로 꽃피고 싶다.

 

조금더 욕심을 내어, 절약으로 꽃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꽃핀다'는 말이, 돈을 많이 벌거나, 유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인식하지 못 하고 있었으나, 문소영 작가의 문장 덕분에 내가 원하는 성공의 유형이 명료하게 다가왔다.

 

13. 내가 생각하는 "꽃핀다"의 의미는 유명해지는 것보다도 자기 분야에서 스스로 인정할만큼 독창적이거나, 새로운 경지의 뭔가를 이뤄서 극소수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거나 생각을 전환시키고, 장기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어차피 많은 돈과 삶의 즐거움이 비례하지 않을만큼 절약훈련을 한 상태다. 큰 돈이 없어도 삶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절약 글을 계속해서 쓰는건, 유명세를 타기 위함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도 아니다. 단지 누군가의 삶에 가 닿아 주기를 바랄 뿐이다.

 

더 욕심내어 '꽃피는' 경지에 이르고 싶다. 소수의 마음만을 움직이는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전환시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의 독단이 아닌, 많은 이들이 가지지 못 한 것까지 고려한 절약 일상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4. 할 수 있을 때 장미봉오리를 모아!

 

49. 그러니까 이 시의 제목인 '가지 않은 길'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 아니라 '내가 가지 않은 길'이며, 이 시는 어느 길을 택하더라도 가지 않은 길에 미련이 생기는 인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이야기다.

...

어떤 길을 택하든 가지 않은 길은 단지 가지 않았기에 아름답다.

 

'안 쓰고 사는'만큼, '좀 쓰고 사는' 삶에 대해 먼 훗날 한숨 쉬며 후회할지도 모른다. 프로스트의 <가지않은 길>처럼 말이다. 그러나 미련은 없다. 할 수 있을 때 장미봉오리를 모으려 한다. 그게 현재 내 삶에 대한 존중이자, 죽음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방법이니까.

 

279. 하지만 그걸(죽음) 자꾸 상기시켜서 어쩌자는 걸까? 답은 워터하우스의 그림에 있다. 소녀가 자기 뺨처럼 핑크색인 장미 한 다발을 들고 말한다.

 

"그러니까 할 수 있을 때 장미봉오리를 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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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를 찾아서 - 인간의 기억에 대한 모든 것
윌바 외스트뷔.힐데 외스트뷔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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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은 저 때가 이쁘죠. 난 왜 충분히 예뻐해주지 못 했을까요." 라던 어르신들의 말. 이게 다 '해마' 때문입니다.


화요일을 빼고 나면, 5일째입니다. 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인 오늘까지. 감기로 보채는 아이들을 평일에 끼고 있다가, 주말인 오늘마저 남편 출장이에요. 엄마와 두 아이가 부대끼는 집안은 태풍 맞은 듯 합니다. 


작은 가베 조각들이 굴러다니고, 개어둔 이불을 모조리 펴놓고 발로 밟죠. 청소를 하겠다며 손수건을 물에 적셔 벽지를 닦습니다. 과일물 묻은 손으로 장난감을 만지는 만행은 예삿일입니다.


다짐했던 하루 7천보 걷을 틈 없기는 물론이고, 블로그에 글 한 편 쓸 체력까지 바닥나버렸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두 녀석 다 등원하고 나면, 두 딸이 보고 싶답니다. 사부작 대며 스티커를 얌전히 붙히고 놀던, 울창한 여름 나무 아래에서 함께 킥보드와 자전거를 타며 산책 하던, 눈만 마주치면 윙크를 해대던. 예쁜 모습만 떠올라요. 등원 안 시키고 데리고 있을껄,하며 후회하죠.


제 기억력이 나빴던걸까요. 세 살, 작은 아이는 윙크를 날리기도 하지만, 포실포실한 샤 스커트의 촘촘한 구멍 사이로, 파인애플 젤리를 쑤셔 놓아서 어떻게 빨래 해야 할지 가늠조차 안 되는 의류 파괴왕입니다. 다섯 살, 큰 아이는 엄마 사랑한다고 뽀뽀를 해대지만, 한여름 산책에 커다란 곰인형을 '반드시' 들고 나가야 겠다며 버티는 고집꾼입니다.


만행의 향연! 하지만 독박육아 중에만 기억날 뿐입니다. 아이들이 잠을 자거나, 등원이라도 해버리면, 이 녀석들의 예쁘고 사랑스러웠던 순간들만 남아버리죠. 


저만 그런건 아닌가봐요.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 거리의 어르신들이 꼭 한 마디씩 하십니다.


"애들은 저 때가 참 예뻐요. 난 왜 충분히 예뻐해주지 못 했던 걸까요. 너무 아쉬워요. 애들 조금만 커봐요. 얼마나 말 안 듣는데. 애기 엄마, 힘내요. 지금이 좋은 때에요."


왜 예쁜 줄 모르셨겠어요. 당연히 그 때 힘드셨겠지요. 10년 뒤에는 오늘이 다시 그리워지실 거에요.


이게 다 '해마' 때문입니다. 특별한 사례가 아니라면 우린 모두 '해마'의 영향을 받지요. 어르신들은 아마 엄마가 걸레 빠는 틈을 타 우유를 도서관 책 위로 쏟아버리던 사건을 망각했을 겁니다. 우리 뇌, 변연계 일부인 '해마'가 끄집어내지 않은거죠. 오직 부모에게 쏟아주던 일방적이고 무한한 사랑만이 걸러져 기억날 뿐입니다.


209쪽. 기억은 대뇌피질의 여러 곳에 저장되어 있지만, 서로 다른 경험들을 조정하고 온전한 기억으로 종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바로 해마이다.


<해마를 찾아서>를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두통이 생기면 양쪽 귀 뒤를 꾹꾹 누르는 자리 아래, 우리 뇌의 한 구성요소인 '해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빛나는 순간을 이대로 흘러보내실껀가요? 행복의 묘약은 '해마' 사용법에 있습니다.



뇌과학 책들을 딱딱하게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오던 수 천 년 철학자들의 질문에 21세기 '뇌과학'이 답하고 있습니다. 철학처럼, 뇌과학의 힘을 빌어 우리 삶의 판을 짜보는 거지요.


<해마를 찾아서> 역시 삶을 설계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해마가 어떤 일을 하기에, 우리 기억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에요. 행복한 기억 구성법, 바로 '해마 사용법'을 통해서요.


148쪽. 우리는 경험을 사람, 사물, 감각 경험, 사건으로 저장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것들은 해마가 꼭 붙잡아 주는 기억 망으로 엮여 있다. 그럼으로써 공간이 생기고, 우리의 생각이 더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기억의 노예가 아니며 기억을 언제나 능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유연성에는 혼동이 쉽게 생길 수 있다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는 모두 기억하지 못 합니다. 머릿 속에 둥둥 떠다니는건, 과거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듯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꽤 많이 각색된 드라마입니다. '망각'과 '해마가 선별한 기억' 때문이지요. 


친구가 했던 말, 먹었던 음식, 양념 향, 들렸던 음악, 다른 손님 식탁 위 음식을 모두 기억한다는건 매우 비효율적입니다. 그래서 우린 '주의'를 기울여 '단기 기억'에 저장했던 정보 중, 특별한 것들을 의도적, 혹은 비의도적으로 '장기기억'으로 저장합니다. 우리 뇌의 정보처리 과정이죠.


해마는 일종의 '뇌PD'입니다. 장기기억의 파편들 중, 필요한 정보를 가져오거나 때로는 기억을 왜곡하여 머릿속 영상을 펼쳐주기 때문입니다.


264쪽. 하지만 우리가 했던 경험들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사라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정말로 중요한 건 인생을 기억하는 것 아닌가? 휴가 여행에 많은 돈을 들이고 나중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여기에서도 망각은 우리 편이어서, 기억의 진주목걸이의 진짜 진주 알이 될 하아라이트 몇 가지를 골라내도록 해 준다.


훌륭하신 '해마 뇌PD' 덕분에, 우린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들러 심리학은 '지금, 여기'를 살아간다고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우린 과거의 추억 보따리를 회상하며, 때로는 미래를 계획하기도 하지요. 몸은 물질 세계인 '현재'를 살지만 기억은 과거와 미래를 오갑니다. 그러니 더 행복해지고 싶다면 의도적으로 좋았던 기억들을 떠올리고, 현재의 행복을 기록하며, 단단한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면 됩니다.


105쪽. 새로운 즐거운 순간을 경험한다고 덜 우울해지지 않았다. 기억의 재현이 현실에서의 즐거운 경험보다 효과가 더 강했던 것이다. 행복한 기억이 우리가 품고 있는 행복의 묘약이라는 뜻 아닐까?


지금 저는 책상에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즐거운 순간을 경험 중이지요.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두 딸이 개미에게 과자 부스러기 주던 귀여운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는 블로그 글쓰기 즐거움을 웃도는 따스한 기억이에요. 이 기억이 바로 '행복의 묘약'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이 행복의 묘약을 넉넉하게 쌓아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시간이 허락할 때, 좋아하는 일, 행복한 일을 틈틈이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삶을 누릴 기회가 왔을 때 기억에 단단히 남을 정도로 추억을 쌓아둬야 하는거죠. 언젠가 지치고 힘들 때, 외롭고 불행할 때. 그 때 즐거웠던 순간을 재현할 수 있도록요.


그리고 행복의 묘약, 즉 좋았던 기억들이 떠오를 수 있는 '인출 단서'들을 늘 곁에 두고 사는 겁니다. 즉, 좋은 추억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인화하여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둔 후, 자주 들여다보고, 집을 찾은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거에요.


블로그에 일기로 남겨도 좋고요. 때로는 행복했던 시절, 즐겨 들었던 음악을 틀어만 놓아도 좋고, 그 장소를 찾는 건 가장 효과적입니다.

269쪽. "아이들이 기억을 했으면 싶은 일들에 대해서는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해야 해요."

...

"행복한 어린시절을 만들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고 말하죠. 아이들이 경험했던 일들에 어떻게 비중을 두는가는 중요해요."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도 행복한 어린시절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좋은 경험을 많이 하게 해 줄 뿐 아니라, 그 추억을 틈틈이 꺼내어 이야기해줘야 합니다.


<해마를 찾아서>는 입시를 위한 지식 위주의 '기억'말고, 삶을 구성하는 '기억의 뼈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해마에 대한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가 여러분 삶의 판을 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거에요. 정말이라니까요? 오늘 하루, 전 독박육아의 막바지에 다다릅니다. 체력과 정신력을 탈탈 털리지만, 해마만 믿습니다. 지금 전 힘들기도 하지만, 아이들하고 보낼 주말 산책 일기를 쓰고, 사진을 찍고, 퇴근 후 남편과 이야기할거거든요. 


어른들이 '아이들 어릴 때가 좋았죠.'라고 말씀하시는거, 어쩌면 그분들의 '행복의 묘약'은 아이들 어린 시절이 아닐까요. 아주 터무니 없는 말씀은 아니었던겁니다. 이 책을 읽으시진 않으셨겠지만, 오랜 세월 숙성된 지혜일겁니다. 세월에서 찾아오는 지혜보다 '행복해지는 기억 제조법'을 알고 싶으신 분들께 이 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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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책 읽는 시간 -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때
니나 상코비치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니나 상코비치는 이 책을 통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얼마나 우아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거실의 아끼는 의자에서 책을 읽으면서 라일락 덤불의 향을 느끼는 장면을 읽었을 때 한 편의 그림같았다.
자신의 삶을 읽었던 책과 연결지어 이야기할 수 있는 소양도 값져보인다.
니나 상코비치의 이 책을 통해 책 읽는 독자들 또한 우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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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지 않은 새로움에게 새로움의 길을 묻다
임웅 지음 / 학지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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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고의 창의성 교육의 대가, 임웅 교수의 집필서가 드디어 나왔다. 아이를 교육하는 부모든 교사든... 이 책은 꼭 한 번 읽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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