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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를 찾아서 - 인간의 기억에 대한 모든 것
윌바 외스트뷔.힐데 외스트뷔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애들은 저 때가 이쁘죠. 난 왜 충분히 예뻐해주지 못 했을까요." 라던 어르신들의 말. 이게 다 '해마' 때문입니다.
화요일을 빼고 나면, 5일째입니다. 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인 오늘까지. 감기로 보채는 아이들을 평일에 끼고 있다가, 주말인 오늘마저 남편 출장이에요. 엄마와 두 아이가 부대끼는 집안은 태풍 맞은 듯 합니다.
작은 가베 조각들이 굴러다니고, 개어둔 이불을 모조리 펴놓고 발로 밟죠. 청소를 하겠다며 손수건을 물에 적셔 벽지를 닦습니다. 과일물 묻은 손으로 장난감을 만지는 만행은 예삿일입니다.
다짐했던 하루 7천보 걷을 틈 없기는 물론이고, 블로그에 글 한 편 쓸 체력까지 바닥나버렸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두 녀석 다 등원하고 나면, 두 딸이 보고 싶답니다. 사부작 대며 스티커를 얌전히 붙히고 놀던, 울창한 여름 나무 아래에서 함께 킥보드와 자전거를 타며 산책 하던, 눈만 마주치면 윙크를 해대던. 예쁜 모습만 떠올라요. 등원 안 시키고 데리고 있을껄,하며 후회하죠.
제 기억력이 나빴던걸까요. 세 살, 작은 아이는 윙크를 날리기도 하지만, 포실포실한 샤 스커트의 촘촘한 구멍 사이로, 파인애플 젤리를 쑤셔 놓아서 어떻게 빨래 해야 할지 가늠조차 안 되는 의류 파괴왕입니다. 다섯 살, 큰 아이는 엄마 사랑한다고 뽀뽀를 해대지만, 한여름 산책에 커다란 곰인형을 '반드시' 들고 나가야 겠다며 버티는 고집꾼입니다.
만행의 향연! 하지만 독박육아 중에만 기억날 뿐입니다. 아이들이 잠을 자거나, 등원이라도 해버리면, 이 녀석들의 예쁘고 사랑스러웠던 순간들만 남아버리죠.
저만 그런건 아닌가봐요.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 거리의 어르신들이 꼭 한 마디씩 하십니다.
"애들은 저 때가 참 예뻐요. 난 왜 충분히 예뻐해주지 못 했던 걸까요. 너무 아쉬워요. 애들 조금만 커봐요. 얼마나 말 안 듣는데. 애기 엄마, 힘내요. 지금이 좋은 때에요."
왜 예쁜 줄 모르셨겠어요. 당연히 그 때 힘드셨겠지요. 10년 뒤에는 오늘이 다시 그리워지실 거에요.
이게 다 '해마' 때문입니다. 특별한 사례가 아니라면 우린 모두 '해마'의 영향을 받지요. 어르신들은 아마 엄마가 걸레 빠는 틈을 타 우유를 도서관 책 위로 쏟아버리던 사건을 망각했을 겁니다. 우리 뇌, 변연계 일부인 '해마'가 끄집어내지 않은거죠. 오직 부모에게 쏟아주던 일방적이고 무한한 사랑만이 걸러져 기억날 뿐입니다.
209쪽. 기억은 대뇌피질의 여러 곳에 저장되어 있지만, 서로 다른 경험들을 조정하고 온전한 기억으로 종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바로 해마이다.
<해마를 찾아서>를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두통이 생기면 양쪽 귀 뒤를 꾹꾹 누르는 자리 아래, 우리 뇌의 한 구성요소인 '해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빛나는 순간을 이대로 흘러보내실껀가요? 행복의 묘약은 '해마' 사용법에 있습니다.
뇌과학 책들을 딱딱하게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오던 수 천 년 철학자들의 질문에 21세기 '뇌과학'이 답하고 있습니다. 철학처럼, 뇌과학의 힘을 빌어 우리 삶의 판을 짜보는 거지요.
<해마를 찾아서> 역시 삶을 설계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해마가 어떤 일을 하기에, 우리 기억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에요. 행복한 기억 구성법, 바로 '해마 사용법'을 통해서요.
148쪽. 우리는 경험을 사람, 사물, 감각 경험, 사건으로 저장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것들은 해마가 꼭 붙잡아 주는 기억 망으로 엮여 있다. 그럼으로써 공간이 생기고, 우리의 생각이 더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기억의 노예가 아니며 기억을 언제나 능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유연성에는 혼동이 쉽게 생길 수 있다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는 모두 기억하지 못 합니다. 머릿 속에 둥둥 떠다니는건, 과거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듯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꽤 많이 각색된 드라마입니다. '망각'과 '해마가 선별한 기억' 때문이지요.
친구가 했던 말, 먹었던 음식, 양념 향, 들렸던 음악, 다른 손님 식탁 위 음식을 모두 기억한다는건 매우 비효율적입니다. 그래서 우린 '주의'를 기울여 '단기 기억'에 저장했던 정보 중, 특별한 것들을 의도적, 혹은 비의도적으로 '장기기억'으로 저장합니다. 우리 뇌의 정보처리 과정이죠.
해마는 일종의 '뇌PD'입니다. 장기기억의 파편들 중, 필요한 정보를 가져오거나 때로는 기억을 왜곡하여 머릿속 영상을 펼쳐주기 때문입니다.
264쪽. 하지만 우리가 했던 경험들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사라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정말로 중요한 건 인생을 기억하는 것 아닌가? 휴가 여행에 많은 돈을 들이고 나중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여기에서도 망각은 우리 편이어서, 기억의 진주목걸이의 진짜 진주 알이 될 하아라이트 몇 가지를 골라내도록 해 준다.
훌륭하신 '해마 뇌PD' 덕분에, 우린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들러 심리학은 '지금, 여기'를 살아간다고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우린 과거의 추억 보따리를 회상하며, 때로는 미래를 계획하기도 하지요. 몸은 물질 세계인 '현재'를 살지만 기억은 과거와 미래를 오갑니다. 그러니 더 행복해지고 싶다면 의도적으로 좋았던 기억들을 떠올리고, 현재의 행복을 기록하며, 단단한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면 됩니다.
105쪽. 새로운 즐거운 순간을 경험한다고 덜 우울해지지 않았다. 기억의 재현이 현실에서의 즐거운 경험보다 효과가 더 강했던 것이다. 행복한 기억이 우리가 품고 있는 행복의 묘약이라는 뜻 아닐까?
지금 저는 책상에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즐거운 순간을 경험 중이지요.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두 딸이 개미에게 과자 부스러기 주던 귀여운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는 블로그 글쓰기 즐거움을 웃도는 따스한 기억이에요. 이 기억이 바로 '행복의 묘약'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이 행복의 묘약을 넉넉하게 쌓아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시간이 허락할 때, 좋아하는 일, 행복한 일을 틈틈이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삶을 누릴 기회가 왔을 때 기억에 단단히 남을 정도로 추억을 쌓아둬야 하는거죠. 언젠가 지치고 힘들 때, 외롭고 불행할 때. 그 때 즐거웠던 순간을 재현할 수 있도록요.
그리고 행복의 묘약, 즉 좋았던 기억들이 떠오를 수 있는 '인출 단서'들을 늘 곁에 두고 사는 겁니다. 즉, 좋은 추억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인화하여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둔 후, 자주 들여다보고, 집을 찾은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거에요.
블로그에 일기로 남겨도 좋고요. 때로는 행복했던 시절, 즐겨 들었던 음악을 틀어만 놓아도 좋고, 그 장소를 찾는 건 가장 효과적입니다.
269쪽. "아이들이 기억을 했으면 싶은 일들에 대해서는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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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어린시절을 만들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고 말하죠. 아이들이 경험했던 일들에 어떻게 비중을 두는가는 중요해요."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도 행복한 어린시절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좋은 경험을 많이 하게 해 줄 뿐 아니라, 그 추억을 틈틈이 꺼내어 이야기해줘야 합니다.
<해마를 찾아서>는 입시를 위한 지식 위주의 '기억'말고, 삶을 구성하는 '기억의 뼈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해마에 대한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가 여러분 삶의 판을 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거에요. 정말이라니까요? 오늘 하루, 전 독박육아의 막바지에 다다릅니다. 체력과 정신력을 탈탈 털리지만, 해마만 믿습니다. 지금 전 힘들기도 하지만, 아이들하고 보낼 주말 산책 일기를 쓰고, 사진을 찍고, 퇴근 후 남편과 이야기할거거든요.
어른들이 '아이들 어릴 때가 좋았죠.'라고 말씀하시는거, 어쩌면 그분들의 '행복의 묘약'은 아이들 어린 시절이 아닐까요. 아주 터무니 없는 말씀은 아니었던겁니다. 이 책을 읽으시진 않으셨겠지만, 오랜 세월 숙성된 지혜일겁니다. 세월에서 찾아오는 지혜보다 '행복해지는 기억 제조법'을 알고 싶으신 분들께 이 책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