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기된 이미지 - 중세 세계관과 문학에 관하여
C. S.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비아토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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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와 중세 전문가인 C. S. 루이스가 들려주는 중세의 기원들. ‘중세‘라는 기호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고대 철학부터 성경, 고전문학을 가로지르며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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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진화론 - 보이즈 러브가 사회를 움직인다
미조구치 아키코 지음, 나카무라 아스미코 그림, 김효진 옮김 / 길찾기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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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라는 정체성


2018년 6월에 출간된 미조구치 아키코의 책 <BL진화론>을 완독하였다. 해당 저서는 BL이라는 장르에 대해 젠더이론적인 접근을 하고, 그것을 사회와 연결시키려고 하였던 노력이다. 해당 저술에선 BL애호를 하나의 성적 지향으로 본다. BL애호가들의 대화 과정 자체이 망상에서 '진화'된 하나의 버추얼 섹스로 보는 관점은 분명 독특하다.


그러나 이 책은 너무나도 오타쿠적이다. 이를테면 체크셔츠+카메라+미소녀 캐릭터가 그려진 종이가방+안경+여드름+돼지 의 이미지로 조롱당했던 오타쿠의 모습을 '이게 오타쿠의 제복이다'라며 자조적 유머로서 소비하던 오타쿠의 행보와 다를바 없다. 왜색 짙은 번역투의 문장을 지적할 때 그것을 소위 말하는 '중2병 문체'나 '라이트노벨 문체' 같은 식으로 소비하여 유머코드로 바꾼 것과 비슷하다.


이것은 불특정한 파편들로 쏟아지는 공격을 막기 위해서 외부와 타자를 구분하고, 독자적 집단으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전략이었다. 흔히 온라인 상에서 공격받은 오타쿠의 폐쇄성, 탈사회성은 콘텐츠에 과몰입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공격을 막기 위해 사회에서 자신을 격리시키고 이름을 갖고자 했던 역사적, 인과적 맥락이다.


현대의 오타쿠는 집단화되었다.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지만 가상의 개념만은 존재한다. 아직까지도 사회는 오타쿠에 대해서 파편적인 이미지로서 타자화하고 공격하며, 오타쿠는 그러한 공격들로부터 자신의 취미와 사고를 보호하기 위해 '오타쿠로서의 나'를 정체화한다. 이것이 오타쿠의 입사식이 된다.


BL진화론에서 'BL애호가'라는 집단을 만들고 후죠시(부녀자)라는 자조적 농담으로 남성-남성의 기표를 통해 버추얼 섹스를 한다는 발언도 이러한 오타쿠적 정체화의 과정이다. 


결국 'BL애호'는 마치 생물학/정신학적인 사건으로 국한되고, 현상적인 보편성을 갖지 못한 채 폐쇄적인 이야기로 귀결되고 만다. 해당 저술의 목적은 장르를 둘러싼 기표의 해석이 아니다. 장르의 기표를 해석하는 '나', 그것도 여성으로서 남성의 신체를 가져와서 이야기해야 하는 '이상한 나'의 이야기이다.



폐쇄적 카테고리와 다중의 자아


<BL진화론>에서 가치있게 주장하는 것은 장르주체로서의 '여성'이다. '여성'이 현실사회와 접촉한 기표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그리고 대다수의 비율로 콘텐츠를 창작하고 소비한다. 이러한 여성들만의 문화는 분명 현대사회에서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그러나 앞서 오타쿠, 즉 부녀자로서 자신을 '정체화'한 사람들이 과연 대중적, 일반적인 '여성'의 코드로 교합할 수 있는가. 우선 짚어야 할 것은 이 질문이 '오타쿠' 또는 '부녀자'는 '여성'이 아니라는 방식의 이분법을 나누고자 한 것은 아니란 점이다. 


<BL진화론>의 저자는 BL애호가이자 작가 미우라 시온이 "'취미'가 아니야! 나에게 만화를 읽는다는 건 이미 '살아간다'는 것과 같은 말이야!" 라며 BL 애호가가 BL을 '읽는다'는 것은 BL을 살아간다며 주장한다.(p.210)


또한 페미니즘 대담집의 표지가 남성 캐릭터도 대리표상 된 것을 일반인은 왜 "여성의 문제를 남자 캐릭터들이 이야기하냐"며 이상하게 여기지만 저자는 '당연히 나를 대리해서 표현하는 것이 남성적 이미지니까'라며 그러한 현상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신과 BL애호가들의 시각이 비슷하다며 일반인의 감각과자신의 감각을 이분화 하였다.


이러한 감각의 분화를 미조구치 아키코는 <자연화된 '그=나 자신'>이라는 의식 때문이라고 정리한다. 그리고 이러한 '외부(일반인)'과의 분리 선언은 내부와 충분한 공감을 이루겠으나, 그것으로 국한되고 폐쇄적 논의에 그친다는 한계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것은 BL이라는 장르가 음지의 문화에서 발전하였고, 사회적으로 표출된 욕망을 은폐하던 기표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일 수 있다. 일본에서 오타쿠가범죄의 원인으로 취급받고, '지저분한 사람'으로 상당수 오해받고 공격받았기에 '오타쿠'라는 선언을 통해 자신을 정체환 것처럼, 한국에서 콘텐츠가 자생되지 않으니 일본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만으로 공격받았기에 온라인 공간에서 익명을 바탕으로 롤플레잉에 골몰했던 것처럼.


그렇기에 다시금 물어봐야 한다. 현대 사회의 자아는 하나의 이념이나 사상에 매몰된 '나'가 아닌, 취미를 바탕으로 온라인 공간을 가로지르며 수많은 정체성이 혼재된 다중적인 '나'로 살아간다. 그렇기에 일본의 다양한 장르 비평서, 또는 다중문화의 비평서들은 장르를 논하기 위해서 오타쿠와 의도적인 거리두기를 하였다. 폐쇄적인 집단을 일반화 하는 시도가 얼마나 허무한지 경계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몇 차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러한 소비 패턴이 과연 'BL'에서만 한정된 것인가? 저자가 서브컬처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것인지, 아니면 필자가 모르는 문화적 차이 때문인지, <BL진화론>은 일반적인 서브컬쳐 문화의 이야기를 과대하게 신화화 한 경향이 가득하다.


이를테면 BL장르의 커뮤니티성으로 나왔던 '일상의 후기'는 사실 인터넷 영역에서 아마추어 창작이 이루어졌던 모든 콘텐츠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던 행위로 알고 있는 데, 그것이 BL이라는 장르의 커뮤니티성과 '소비-창작'의 주체로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시장의 구성원이라는 구성을 보이는 배타적 특질로 볼 수 있을까 의문이다.


현실의 동성애에서 벗어나 '나'로서 이입을 위한 기호로서 남성 동성애라는 코드, 다양한 버스 세계관 등을 수사적으로 사용한다는 것 역시도 한계를 갖는다. 그것은 BL의 클리셰로 사용되는 강간 장면에 대한 대답처럼 기술되었지만 사실은 의미규명이 없는 회피에 불과하다. 이것은 외부 공격에 대응해 자신을 정체성화하는 오타쿠적 대응으로 사실 BL이 아닌, 데이터베이스를 공유하고 코드적인 창작, 또는 소통을 하는 폐쇄적 카테고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회피양상이다.


즉, 이러한 커뮤니티적 성격을 가진 다중적 자아 '우리'를 과연 BL애호가 라는 말로 일반화 할 수 있을까.


 

실패한 전제, 사회와의 억지 연결맺음


장르 비평에서 중요한 건 장르의 클리셰가 '왜' 밈화 되었는지의 인과적 맥락이다. 이러한 맥락을 깊게 다루지 못하면 설득력은 소실된다. 장르의 비평은 현대비평의 지형도에선 필연적으로 인정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BL진화론>은 인정투쟁을 져버린 오타쿠의 자의식을 해결해주기 위한 포르노적 이론서에 가깝다.


특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는 이러하다. 현실 그대로의 대응이 아니라 이미지화된 폭력과 섹슈얼리티를 장르에서 구현한다면, 그것을 "왜" 구현해야 하는지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해당 저술에서는 공과 수, 그리고 신적 자아에 다중적으로 이입하는 '나'의 존재로 폭력적 상황에서 주어지는 젠더적 저항과 시선을 벗어나 진정한 사랑을 각성하고 모순을 지적한다고 썼으며, 남녀물에서나 여성 커플물에서도 그리기 어렵기 때문에 남성이라는 기호를 선택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러한 행위의 묘사가 현실의 행위를 용인, 권장하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는 것이야 서브컬쳐 계열의 2D캐릭터를 성애적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비판에 "이건 현실의 대상이 아니고, 이러한 망상과 현실은 명확히 구분될 수 있다"는 정형적 반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BL진화론>이라는 책을 읽으며 기대했던 질문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토로한 리뷰어들의 지적이 공통적으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없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이를테면 내가 읽으면서 힘들었던 것은 1장에서 구체적인 BL의 장르특징을 섬세하게 정의하지 않은 상태로 해외의 작품이 나열되는데, 그 나열된 작품에서 '이견이 있다'며 작품을 분류하는 과정에 사용된 'BL 정형'이었다. 즉, 이론적 배경이 아니라 팬덤이 공유한 특정 관습에 들어가는가/들어가지 않는가가 작품의 분류에 중요하게 사용되는데, 이러한 내용을 설명조차 하지 않고 1장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계속되며, 발생된 질문을 해결하지 않는데, 이를테면 강간에 관련된 이야기도 저자는 4장에서 '진화'된 작품을 통해 언급한다고 말만 했을 뿐, 그 이후 본격적인 언급을 모두 피해놓았다.


이러한 이유에는 BL을 소비하였기 때문에 레즈비언적 자아를 인정할 수 있었다는 저자 자신의 각성이 BL이라는 장르를 성서적인 위치에 자리매겼기 때문이리라. 그러한 시선에서 시작된 논의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나는 아직도 회의적이다.


장르를 이야기하고 이론을 정리하기 위해선 장르로부터 나를 '타자화'시키는 과정이 중요하다. 타자의 자리에서 인식론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그곳'에 존재하는 과정을 거친 후, 이제 다시금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빠져나오는 작업 역시 이루어져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서브컬쳐 소비자로서 오타쿠와 오타쿠 바깥의 경계는 분명 희미하고 무의미하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의 변별적 정의는 여전히 필요하다. 그러한 정의는 저술로서 이것이 '대중'서일지, '학술'서일지, 아니면 위에 말했듯 결국 팬덤에서 창작-소비가 반복되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지 메인 지점이기 때문이다.


띠지에서 이야기하듯 이것은 '문화 총괄서', 또는 오타쿠들의 학술적 대담에 가깝지 장르 이론서라고 보긴 힘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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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괴물을 말해요 - 대중문화로 읽는 지금 여기 괴물의 표정들
이유리.정예은 지음 / 제철소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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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프레임"이라는 말을 무분별하게 쓰면 그것이 전가의 보도가 되어 대상을 가치있게 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만연한 수사와 인상의 나열만으로 그것이 비평이 되진 않는다. 결국 비평이나 인문학 프레임의 용도는 사고를 전개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고는 없고 수사만 있다. 수사를 제거하고 글을 보면 남아있는 건 처음과 끝의 지루한 동어반복이다. 너무 게으른 책이다.


1챕터의 뱀파이어도, 뒤에 나오는 드라큘라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고 본 좀비도... 그 어떤 부분에서도 결국 인문학적 프리즘은 없었다. 서브컬쳐도 없었고 괴물도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수사 뿐.


서브컬쳐의 인문학적 비평이라는 말로 대중을 속이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건 "내가 많이 읽었어!"를 자랑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인문학적 행위처럼 포장되기 시작했다. 그럼 이공계열 서적을 많이 읽는 것은 이공계열적 행위인가 인문학적 행위인가.


이러한 모순을 돌파하지 못한 채, 착각은 밀고 나간다. '서브컬쳐의 인문학적 비평이란 서브컬쳐와 관련된 책을 많이 읽는 것이다.'라고. 다양한 작품을 많이 이야기하는 건 오타쿠적 지식의 박람과 나열에 불과하다. 이것이 인문학적 비평의 영역으로 넘어오기 위해서 필요한 건 사고와 기반이다.


물론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해당 저서는 많이 읽었다고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읽은 작품들이 장르적 인과맥락을 따라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 연결도 굉장히 나이브한 해석이라 납득 못 할 장면이 너무 많다. 파편적이고, 근자의 훌륭한 연구나 논평까지는 아니더라도 장르적 독법의 수준까지도 내려가지 못한다. 그냥 대중 교양서적으로 나온 글들이나 인터뷰를 짜집기해서 새로운 대중 교양서적을 만든 것에 불과하다.


서브컬쳐를 알량하게 접근하는 많은 접근들이 있다. 허황된 수사에 속기엔 마니아의 비중은 넓어졌고, 지적 수준은 높아졌고, 지식을 접근하긴 쉬워졌으며, 대중과 학계의 관심도 생각보다 많이, 깊게 이루어진다. <우리 괴물을 말해요>의 가장 큰 실패는, 이미 말해지고 있는 괴물을 무시한 것이다.


지금 시대에 괴물을 발견하고 말한다는 건 이미 나이브하고 낡은 감각이다. 지금 시대에 괴물이 독특하고 특별한 것인가? 아니. 이미 콘텐츠와 미디어에 잠식된 우리는 괴물이 환상적 존재이고 리얼리즘과 반대된다는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친밀성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오히려 지금 시대에서 괴물을 독특하고 특별한 것으로 지위하려는 발화는 그 자체로 리얼리즘에 대한 지위와 권위를 담보한다. 괴물을 '괴물화'하는 것. 그리고 괴물을 괴물화하는 그 자체가 이미 본문에 나온 괴물의 이야기를 실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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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18-08-2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얼리즘‘ 같은 개념어 오용은 뭐 그렇다손 치더라도.. 괴물을 ‘괴물화‘라ㅋㅋㅋ 내가 보기엔 이 리뷰야말로 수사만 있으신 듯...ㅋㅋㅋㅋㅋㅋㅋㅋㅋ웃고 갑니다ㅋㅋㅋ
 
우리 괴물을 말해요 - 대중문화로 읽는 지금 여기 괴물의 표정들
이유리.정예은 지음 / 제철소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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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한 수사만 휘두를 뿐, 기존 괴물들의 담론 내용도 반영되지 않은 채 화려한 수사만 늘어놓은 인상비평. 리얼리즘이 패퇴한 시대, 환상이 만연한 일반사회에서 괴물을 마치 ‘괴물화‘하려는 낡은 감각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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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오덕학 - 자생형 한국산 2세대 오덕의 현재 기록
서찬휘 지음 / 생각비행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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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주요한 지점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이 글이 오타쿠들의 '재맥락화 놀이'에 중점을 맞춰서 구성해놓았다는 것이다. 원래의 맥락을 벗어나 새롭게 맥락을 구성하는 것이 오타쿠 문화 전체의 주요 소비방법으로 규정해놓고, 그 방식이 어떤 식으로 문화에 작동하는지, 여러 요소들을 놓고 이야기하고 있다.

흔히 '오타쿠 컬쳐의 종류에 따라 오타쿠라는 사람들의 성격과 요소가 달라진다' 라고 이야기하며 오타쿠라는 대상을 정의 불가능하다고 시니컬하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러한 오타쿠의 세계인식과 소비 방식은 대상이 되는 문화를 어떻게 소비하는가 소비형태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것이 자본주의 전체에서 나타나는 포스트모던한 소비 방식인 것인지 아니면 그 와중에 오타쿠들의 '서브컬처'의 특징인지 그 구분을 명확히 놓긴 분명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오쓰카 에이지가 그들은 현실을 사생/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만화적인 가상을 사생/소비 하는 것으로 이야기 했던 것처럼 결정적인 차이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을 들어가야 할 듯하다.

어쨌거나 그러한 재맥락 놀이를 오타쿠 문화의 '최초'나 흐름을 기록하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보이고, 그러한 결과물로서의 책은 좋은 편.

두 번째가 핵심인데,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규정하려고 한 것은 철저하게 '한국의 오덕'에 대한 탐색이다. 오타쿠 연구를 하거나 대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몇 가지 고민거리와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과연 오타쿠에 대한 기존 연구 들이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가 하는 부분이다.

당장 아즈마의 논의만 하더라도 단순히 현시대 오타쿠의 인상비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 1950년대 전후 상황부터 일본 근현대의 멘탈리티 전체를 탐색해 올라온다. 이것은 오타쿠라는 현상이 왜 나타났고 이루어졌는가 찾아내고 정의하고, 나아가 앞으로 어떤 형태가 될 것인지 논의하고 예측하는 과정, 즉 '쓸모 있는 공부'인데 단순히 현상의 이야기만 일본의 논의를 빌려 가져와 이야기해봤자 결국 지적인 허영일 뿐 유용성이 소실된, 병적 증상의 설명밖에 안 되는 것.

그렇기에 서찬휘 씨의 작업은 집요할 정도로 일본의 문화와 다르게 발전했덤, 또는 의존해 변화했지만 독자적인 형태가 됐던 양국의 차이와 '한국의 오덕'에 맞는 이야기를 하기위해 노력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만화와 웹툰의 구분으로 나옴.

물론 매체에서 만화와 웹툰은 완전 별개의 대상이겠지만, 책에서 웹툰은 기존 한국 만화가 '코리안 망가'화 되는 것처럼 연결되던 상황에서 '웹툰'이 한국의 문화로서 자리매김 하는 과정을 짚는다. 이것은 책에서도 몇 번 언급된 '오타쿠'라는 단어에 있는 '일본 컴플렉스'를 벗겨내려는 노력이고 한국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오덕'을 규명하기 위한 기초 출발선이리라.

정리하자. 한국 근현대문학사를 정리하면 과연 우리나라의 근대가 언제부터 시작하였는가 하는 의문과 직면하게 된다. 그 시작점에 대한 논의는 그것이 자발자생적으로 나타난 것인가, 아니면 일제시대에 이식되었는가 하는 것인데 오타쿠 역시 그렇다.

오타쿠 문화가 과연 일본이나 해외의 문화들에 의해서 나온 것으로 그 소비형태나 정신 역시도 모두 수입되어 온 한국기생적인 일본문화인지, 아니면 문화가 왔을 때 그 소비 형태가 일본과는 미묘하게 차이를 두고 발생하였는지의 논의 정도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오덕'문화가 오타쿠에서 오덕화 되었는지, 아니면 오덕 1세대, 2세대 등으로 오덕의 연장인지의 논의이리라.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키워드 오덕학>은 2세대 오덕(덕후)의 보고서라고 자신을 프레이밍 한 만큼 의견이 확실하다. 이 부분의 의견은 나와 차이가 좀 있어서 좀 더 생각을 거듭해야겠지만 이렇게 일본의 논의를 그대로 가져오거나, 또는 단순히 시장의 현실을 인상비평하여 논의가 휘발되는 것에 비하면 기록하고 정의내리려고 하는 이러한 시도 자체가 의미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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