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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 ㅣ zebra 9
우르슐라 팔루신스카 지음, 이지원 옮김 / 비룡소 / 2018년 8월
평점 :
J라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누워서 하늘을 보거나 멍하니 있는 것을 좋아했다. J는 가끔 내게 잔디밭에 함께 누워서 함께 하늘을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우리는 결국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하고 헤어졌다. 이유야 어쨌든, 나는 게으를 여유가 없었다. 쉼 없이 뭔가를 하는 것이 열심히 사는 것인 줄만 알았다. 우리는 늘 뭔가로 분주하고, 바쁜 것이 잘 사는 것인 줄 착각한다.
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 앞만 보고 달려갈 때 볼 수 없었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신문을 보고 있다던 삼촌은 사실 신문을 덮고 누워있다. 자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 쪽에는 신문 사이로 흐릿하게 비취는 태양이 보인다. 어린 아이를 돌본다는 여자는 선탠을 하는 듯 얼굴만 모자로 가린 채 누워있고, 옆에서 아이는 나뭇잎으로 여자의 다리를 간지럽히며 놀고 있다. 다음 페이지에서는 모자의 구멍들 사이로 보이는 태양이 있다. 글은 뭔가를 한다고 하지만 그림은 다들 누워있고 쉬고 있는 모습이다. 그때 보여지는 하늘 등의 그림과 함께.
꼭 뭔가를 해야만 할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가치 있는 존재로 대우받으면 안될까? 뭔가를 성취하지 않아도, 삶의 언저리에서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는 것도 하나의 삶의 방식일 수 있다. 평온함과 여유, 좀 게으름 부리며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를 갖자.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게을러져야 할 필요가 있다.
책은 60여 페이지 정도인데, 글밥으로 표현된 내용은 더 얼마되지 않는다. 강렬한 원색의 추상화같은 그림으로 책이 가득 차 있다. 어른인 나는 그림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인상쓰며 저자의 의도를 간파하려고 노력했지만, 초딩인 딸아이는 그냥 그림을 넘기며 깔깔거리며 책을 읽는다. 재밌단다. 어쩌면 생각하는 것에서도 게을러져야 하나보다. 어린이를 위한 책 같지만 어른이를 위한 책 같기도 하다.
느리게 가는 삶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나는, J와 잔디에 누워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며 한가로이 대화하는 것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