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가출했다 힘찬문고 41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지음, 한기상 옮김, 최정인 그림 / 우리교육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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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얼마나 현실적인가 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낱 먼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책을 읽으며 이것이 마치 내 이야기와 같다고, 혹은 내 친구의 이야기와 같다고 공감하며 느끼는 순간, 그것이 바로 그들만의 상처치유를 위한 시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민감하고 섬세하며 부서지기 쉬운 유리인형과 같다. 얇고 투명한 유리로 만든 인형들. 그들을 어른들과 같지 않다. 너무도 작은 심장을 지니고 있어서 조심조심 다루지 않으면 금세 상처받고 병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언니가 가출했다>는 특히나 방황하고 있는 요즘 십대들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자신의 삶에 방황하고 사랑을 받지 못해 가슴에 멍이 들고 있는 아이들은 작가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이야기와 같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동생 에리카의 눈을 통해 본 흐리고 어지러운 세상의 모습은 우리 어른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가정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은 가족이 세상의 전부이며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지 못 하면 심장에 심각한 멍이 들기도 한다. <언니가 가출했다>는 동생의 눈으로 그려졌으나 한사람 한사람의 내면과 외면의 상황들을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언니의 말을 빌자면 ‘둔한 개’의 성향을 지닌 나 에리카와 가족에 안주하지 못한 채 들끓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언니 일제, 그리고 규칙과 규범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엄마와 모든 것을 주시할 뿐 간섭을 하지 않는 쿠르트 아저씨, 일제와 에리카를 자신의 손주로 생각하지 않는 관리인 할머니와, 일제와 에리카의 진짜 할머니 등, 모든 등장인물의 인물묘사와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가족은 작은 사회와 같다. 그 안에 일인자의 권력과, 거부하는 자의 모습, 폭력과 방관자의 모습, 사랑과 갈등, 불신과 이해와 와해 등의 모든 감정이 고스란히 존재한다. 그야말로 아이들에게 가정은 사회이전의 사회인 것이다.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성은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실질적인 폭력뿐 아니라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 것 또한 다른 의미로서의 폭력이나 마찬가지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사랑은 소통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가꾸어진다. 특히나 아이들에게는 소통 자체가 사랑이고 관심인 셈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공감해 주는 것은 아이들의 언 마음을 따뜻한 손길로 녹이는 행위와 같다. 재혼한 가정에서 새로운 식구들과 생활해야 했던 일제 또한 엄마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따사로운 미소가 있었던 들 방황하는 삶으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소통은 햇살과 같다. 꽝꽝 언 마음을 녹이고 꽃이 더욱 아름답게 필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진심어린 대화를 하게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 바로 ‘소통’이다. 동생 에리카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소통도 나눌 수 없었던 일제는 결국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곳은 따뜻하고 아늑하며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되는 상상의 섬. 그랬기에 일제는 더더욱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현실을 도피한 자신의 세계 속에서 마냥 행복하게 머물고 싶은 일제의 마음을 어쩌면 가족간의 소통이 부족한 우리시대의 아이들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설 속 일제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랑받지 못함에, 이해받지 못함에 마음속에 하나하나 벽돌을 쌓아 자신만의 집을 지었다. 그 속에서 나오기 싫어하는 일제의 모습은 내 주위의 혹은 내 아이의 모습은 아닐까 다시 한번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 한다.


그러나 아픔이란 일제만의 것은 아니다. 엄마도 역시 모든 면에서 상처받고 아파하고 있는 중인 것이 분명하다. 가족과 자신의 행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따라주지 못하는 아이들이 밉고 관망하는 남편이 미울 것이다. 자신이 왜 또다시 결혼을 했는지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허나 어른의 그것은 아이의 그것보다 훨씬 견고하고 유연하므로 스스로 충분히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다스린 채 가장 먼저 아이들을 사랑으로 감싸주어야 한다. 아이들은 육체적으로 다 자란 듯 보이지만 아직 충분히 성숙되지 못한 열매와 같다. 일제 또한 성숙되지 못한 상태에서 상처를 받았기에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소통되지 못한 곳을 떠나 자신이 숨 쉴 수 있는 곳으로 찾아 간 것뿐 일제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 아직은 어린 일제가 혼자서 바르는 색색의 매니큐어들. 녹색과 노란색과 마지막에 발에 바르고 있던 보라색의 매니큐어들은 일제가 찾고자 하는 꿈의 색깔 일 수 있으며 현실에서 받지 못한 사랑의 색일 수도 있고, 자신이 처한 혼돈의 색일 수도 있다. 스스로 한 개 한 개 집중하여 색을 칠함으로써 엄마와 가족에게서 도망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런 의미에서 에리카도 마찬가지로 상처를 지녔다. ‘둔한 개’의 성향을 지녀 다만 일제처럼 폭발하지 않을 뿐 어린 에리카는 충분히 상처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중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언니는 늘 집을 나가려 하고 엄마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느낀다. 모두가 자신 위를 겉돌 뿐 자신과 같은 높이에서 안아주는 사람은 없다. 떠나간 언니를 찾아다니며 가슴앓이 했을 에리카는 후에 언니의 모든 이야기들이 거짓말임을 알고 나서도 언니를 위해 입을 다문다. 하루하루가 불안의 연속인 에리카. 슬프게도 그는 폭발조차 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처를 꽁꽁 숨기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언니가 가출했다>에서는 아이들은 어른들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또 다른 어른들이 존재하나 역시 아이들은 따뜻함을 느낄 수 없다. 이 모든 일들이 사실 너무도 쉽게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슬프기 그지없다. 다시 말 하건데 모든 문제는 소통으로부터 시작되고 소통으로 끝이 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통’ 없이는 사랑도 없으며 소통이 없이는 가족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에리카와 일제의 할머니가 쏟아내는 말은 우리가 다시 한번 깊이 새겨 봐야할 말임에 분명하다.


“어쨌든 누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아차리려면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해. 그리고 잘 돌봐줘야 하지.”

“매 끼니를 챙겨준다고 해서 엄마가 할 일을 다 한 건 아니에요. ....... 그리고 의붓아버지가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고 그냥 있다면, 그건 친절이 아니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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