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개의 봄 - 역사학자 김기협의 시병일기
김기협 지음 / 서해문집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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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고민 많던 청소년기 조그마한 열쇠가 달린 수첩으로 나의 비밀과 일상을 기록하던 나날들이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자유로운 이야기를 일기에 풀어 놓고 나면 무언가 나만이 아는 비밀을 쌓아 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비밀의 노트와의 대면이 소원해지기 시작하고, 나의 일상과 비밀의 기록은 더 자라지 않는 나무가 되어 그 시간에 멈춰 서 있게 되었다. 일기라는 단어가 잊혀질 때 쯤 이 책은 어머니의 병상일기로 작가의 비밀을 나에게 풀어 놓았다.  


역사학자 김기협씨의 어머니 간병일지이자 자신과 어머니의 일상에 대한 기록으로 짜여진 책이다. 또한 불효자와 효자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아들과 어머니와의 화해를 그린 글모음이다. 병상에 계신 어머니의 하루하루가 소소한 기쁨과 슬픔으로 버무려져 은은한 아로마향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조각난 기억들의 파편을 찾지 못해 다른 이들과 추억을 공유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면 마음 한 켠이 저려오기도 했다. 간병인들을 더 챙기고, 가까워 하시는 어머니에게 조금은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 자신의 형들을 더 반가워하고, 좋아하시는 모습에 약간 씁쓸한 미소를 짓는 듯한 작가의 얼굴이 떠오르는 글을 볼 때면 하루하루의 기록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 같아 잔잔한 영화 한 편을 보는 듯 했다. 그리고 자식들 대학에 다 진학시키고 “내가 너희를 혼자 키우느라 내 본생을 감추고 20년간 지내왔다. 이제 너희가 다 컸으니 나는 이제 점잖고 엄숙한 시늉을 그만두고 편안하게 살련다. 행여 지금까지와 다른 내 모습을 본다 해서 놀라지 말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본색을 드러내는 것 뿐 일테니” 하신 말씀에 지나치게 솔직하신 모습을 보게 되어 나 또한 이렇게 자식들에게 솔직할 수 있을까? 고민해 볼 수 있게 해주셨다. 가장 가까운 사이이지만 남들보다 더 상처를 많이 줄 수 있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자식이 지금껏 부모님께 드렸던 상처를 조금이나마 보듬어 드리는 시간을 우리를 대신해 병상에서 작가가 하고 있었다. 하지만 힘들거나 괴롭다는 생각을 한다는 느낌보다 오히려 감사해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시병일기였다. 마치 하나의 일기를 쓰듯 기록하는 것이 아닌 아흔개의 봄을 지나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신 어머니에게 듣는 듯한 인생강의의 느낌이었다.  


비밀을 기록하고 나의 하루를 적어 내려가던 열쇠 달린 나의 일기 속에는 그 시절 나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이후 여러 해의 봄을 지나 일상에 쫒기다 보니 나는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지 못하였다. 작가처럼 어머니의 시병일지를 적으려 어머니와 사이의 간극을 줄이지는 못하지만 나와의 간극을 줄여보려 다시 한번 나의 일기를 펼쳐보았다. 그리고는 나의 이야기를 적어내려가 보았다. 다시 돌아올 봄에는 예전의 봄을 떠올리며 기억을 더듬어 갈 수 있도록 차근히 기록해 나가고 있는 시간을 다시 한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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