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사도: A DEVIL'S CHAPLAIN>

부제: 도킨스가 들려주는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이야기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2005년, 바다출판사.

 

 

 

진리의 애호자를 자처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사유의 궤적을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는 책, <악마의 사도>. 리처드 도킨스가 25년 동안 여러 매체에 기고하면서 논쟁을 불러온 글들의 모음집으로서 지적 에세이의 정수라고 할 만하다. 자서전적인 성격이 강한 이 책에서 도킨스는 정곡을 찌르는 신랄한 유머로 에세이스트로서의 진면목을, 까댐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의 세계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책을 읽고 있다 보면 시니컬한 문체와 견고한 사유의 힘으로 구축된 논리적 사고가 주는 명쾌한 매력에 빠져 부화뇌동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악마의 사도>에는 잘 제어된 분노와 절망으로 치닫지 않는 슬픔과 활력 넘치는 기쁨의 원천인 과학이 있다. 그 글들 속에 인간 리처드 도킨스가 있다. 그리고 그가 어떤 것들을 못 견뎌하는지가 좀 보인다. 진리를 가장하는 온갖 거짓 담론들이 그의 공격 대상이다. 공정한 진리를 옹호하는 이 전투적인 과학자에게 참과 거짓을 가르는 이런 싸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도 보인다. 미온적이고 어정쩡한 태도를 정당화하는 이중기준은 있을 수 없다.

 

 

도킨스는 절대적인 과학적 진리는 없으며, 단지 각자 자기 신념에 따라 자기 나름의 진리를 옹호할 뿐이라는 문화 상대주의자들을 겨냥해 지적 횡설수설을 일삼는 현학자들이라고 비난하는데, 예컨대 태양이 지구보다 뜨겁다는 것은 진리의 근사치도 아니고, 가설로서 반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회로 갔을 때 부인될 수 있는 국지적인 진리도 아니라고 말한다. 설령 눈으로 볼 수 없어도 DNA가 이중나선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며, 인간과 침팬지의 조상을 추적해가다보면 공통 조상과 만나게 된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배심원단의 재판, 뉴에이지 신비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이비 과학자들, 믿음으로 진리를 내세우는 종교인들. 종교를 거론하지 않는 것은 거의 불문율에 가까운데, 도킨스는 유독 종교의 해악에 민감하다. <이기적 유전자>에서도 밈을 설명할 때, 도킨스는 맹신을 영속화하는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인간은 아프리카 유인원이다. 긴팔 원숭이,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과 같은 분류군이다. 도킨스는 인간의 아이 한 명의 생명이 전 세계에 있는 모든 고릴라들의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생명을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중간 존재가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먼 친척 관계인 침팬지와 인간 사이에도 중간 존재가 있어야 하지만, 어느 시기에 이 중간 존재가 우연히 사라져 버렸다. 중간 존재, 고리 종(ring species)을 잃어버린 것에 불과한데, 많은 인간들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도킨스는 인간이 침팬지에 비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면서, 현대 사회의 도덕적 토대가 거의 불연속적인 정신이 지배하는 종 중심주의적인 가치관에 있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중간 존재인, 우연히 잃어버린 고리 종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지금껏 우리가 떠받든 온갖 규범과 도덕 체계는 무너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이라는 종에게 특권을 주는 우리의 이중 기준이,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다. 인간과 침팬지는 단절되어 있지 않고 진화라는 연속적인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과학과 윤리학의 관계에 대한 도킨스의 입장. 도킨스는 개인과 사회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고 잘라 말한다. 구체적인 사실들을 나열하며 이렇게 꾸역꾸역 적어보자.

 

 

“과학은 무엇이 윤리적인지 판단할 방법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가 판단할 문제이다. 하지만 과학이 제기되는 질문들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으며, 판단을 흐리는 오해들을 말끔히 제거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신은 양쪽을 다 택할 수는 없다’같은 유용한 논리와 거의 같다. ‘과학과 윤리학이라는 말을 더 독특하게 해석해보기로 하자. 과학은 낙태가 잘못된 것인지 여부를 말할 수 없지만, 지각 능력이 없는 태아와 지각 능력이 있는 어른을 단절 없이 하나로 잇는 (발생학적) 연속성이 인간과 다른 종을 하나로 잇는 (진화적) 연속성과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는 있다. 발생학적 연속성이 더 단절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것은 오로지 진화적 연속성이 멸종 사건들 때문에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윤리학의 근본 원리들은 우발적인 멸종 사건들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과학은 낙태가 살인인지 여부를 말할 수 없지만, 낙태를 살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침팬지를 죽이는 것은 살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일관성이 없다고 경고할 수는 있다. 당신은 양쪽을 다 택할 수는 없다. 과학은 인간을 통째로 복제하는 것이 잘못인지 여부를 말해줄 수 없다. 하지만 복제 양 돌리 같은 클론이 비록 나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일란성 쌍둥이나 다름없다고 말해줄 수는 있다. 과학은 당신이 인간 복제에 반대하고 싶다면,‘클론은 완전한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거나 ‘클론은 영혼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같은 주장들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 줄 수 있다. 과학은 누군가가 영혼을 지니고 있는지 여부를 말할 수 없지만 평범한 일란성 쌍둥이가 영혼을 갖고 있다면 돌리 같은 클론도 마찬가지라고 말해 줄 수는 있다. 당신은 양쪽을 다 택할 수는 없다. 과학은 '여분의 장기'를 위해 줄기세포를 복제하는 것이 잘못된 일인지 여부를 말해줄 수 없다. 하지만 과학은 줄기세포 복제가 오랫동안 받아들여져온 조직 배양과 도덕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보라고 당신에게 도전장을 던질 수는 있다. 조직배양은 수십 년 동안 암 연구의 버팀목이 되어왔다.(중략) 나는 아주 색다른 접근법을 통해 과학과 윤리학의 문제를 결론 내리고 싶다. 과학적 진리 자체를 윤리적으로 다루는 방법이다. 나는 때로는 객관적인 진리가 현재 명예 훼손에 대처하는 법규들이 개인에게 부여하는 것과 똑같은 종류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중략) 나는 명예 훼손이라는 개념을 특정한 개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지라도 진리 자체에 해를 끼치는 거짓말까지 포함되도록 확장하고 싶었다.“ pp 71-77.

 

 

과학과 종교의 수렴 가능성에 대하여.

 

 

과학은 사실의 언어를, 종교는 가치의 언어를 쓴다. 이 경계는 명확한 것이라고 도킨스가 말할까? 도킨스는 종교가 과학이 누려야 할 영예를 가로챈다고 욕한다. 
 

  

“체계를 갖춘 종교가 노골적인 적대감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이유는 러셀의 찻주전자를 믿는 것과 달리, 종교가 강력하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세금을 공제받으며, 아직 어려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체계적으로 주입된다는 점 때문이다.”p.220 

 

 

“현대의 유신론자들은 바알과 금송아지, 토르와 우탄, 포세이돈과 아폴로, 미트라와 아몬 라 이야기가 나오면 자신들이 사실상 무신론자가 된다는 것을 인정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류가 지금까지 믿었던 신들 중에서 대다수에 대해서 모두 무신론자이다. 몇몇은 더 나아가 하나의 신에 대해서만 유신론자이기도 하다. 아무튼 종교와 과학이 각각 교도권을 지닌다는 믿음은 부정직한 것이다. 그것은 분석하면 과학적 주장이 드러나는 세계에 관한 주장들을 종교가 여전히 펼치고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무너진다. 게다가 종교 변증론자들은 꿩 먹고 알 먹는 식으로 양쪽을 다 가지려 한다. 그들은 지식인들에게 이야기할 때에는 과학이라는 잔디밭에  발을 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피해서 별도의 난공불락의 종교적 교도권 속에 안전하게 머문다. 하지만 지식인이 아닌 대중에게 이야기를 할때는 기적 이야기를 마음껏 활용한다. 그 이야기들은 과학의 영역을 주제넘게 침입한다.(중략)훌륭한 전도사가 둘 다 갖겠다는 욕망을 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놀라운 점은 자유주의 불가지론자들이 거기에 쉽게 영합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아주 단순하고 둔감한 극단주의자로 간주해 비난하는 만용을 쉽게 부리게 된다는 것이다.(중략) 정직한 재판관이 볼 때, 이른바 종교와 과학의 수렴이라는 것은 얕고, 공허하며, 겉치레이며, 그럴듯한 옹호로만 늘어놓는 사기이다.”pp 280-282.

 

 

 

"우리는 과학이 발견하고 있듯이 우주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양자 불확정성, 블랙홀, 빅뱅, 팽창 우주, 지질학적 시간에 걸친 대단히 느린 움직임, 이 모든 것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이 과학을 두려워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과학은 이런 것들이 왜 이해하기 어려운지, 왜 그 노력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지까지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벼락 출세한 유인원이며, 우리의 뇌는 석기 시대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살아남는 법을 세세하게 이해하도록 설계되어 있을 뿐이다.” p.93. 
 

 

 

도킨스와 유전자 결정론

 

 

도킨스는 ‘유전자는 우리가 아니다’라는 장에서“유전자 결정론이라는 도깨비는 매장시킬 필요가 있다, 소위 ‘게이 유전자’의 발견은 그것을 매장하기에 딱 좋은 기회를 준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자신은 유전자 결정론자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고, 도킨스에게 유전자 결정론자라고 말하는 것은 욕을 하는 것과 같다. DNA의 성립 메커니즘을 청사진과 요리법이라는 쉬운 비유를 통해 풀이하는데, 유전자의 행동은 일대응 대응이 가능한 청사진 같기도 하고, 일대일 대응 관계가 성립이 안 되는 요리법 같기도 하다고. 예컨대 DNA가 형성되는 초기의 어떤 단계까지는 청사진처럼 일대일 대응 관계가 있어 결정론적으로 보이나, 몸과 심리적 성향이 발달하는 단계에서부터는 일대일 대응 관계가 거의 없기 때문에 몸과 행동에 미치는 최종 영향은 규명하기 어렵다. 오히려 종교를 주입받는 것과 같은 외부적 환경에서 더 되돌리기가 어려운 결정론적 요인들이 많다고 한다. 

 

 

”당신이 동성애자를 싫어하거나 사랑한다면, 당신이 그들을 감금하거나 ‘치료하고’싶다면, 유전자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이유를 대는 편이 더 낫다.“ “유전자는 결코 결정론을 독점하고 있지 않다” 도킨스에게 유전자 결정론자라는 낙인을 찍는 것은 스스로의 무지를 들추어내는 행위가 된다.  <이기적 유전자> 달랑 하나 읽고 도킨스를 유전자 결정론자라고 생각했던 나는 이 부분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척을 하며 급수정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나는 과학자로서 다윈주의를 지지하지만, 다윈주의를 정치나 인간사를 처리하는 문제에 접목시키려 할 때에는 열렬한 반다윈주의자가 된다.”다윈의 이론을 정치적으로 악용했던 나치즘, 다윈주의를 사회 이론으로 적용하는 학자들과 종차별주의자들, 인종차별주의 정책을 펴는 정치 세력들에 대해 진화론자로서 열렬히 반대한다는 뜻일 게다.

 

  

교육자로서의 도킨스

 

 

'위험을 무릅쓰며 사는 삶의 기쁨을 살라고 촉구'했던 교육자 샌더슨을 추모하는 글은 안락한 삶을 욕망하는 소심한 현대인들에게 자극이 된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애쓰는 것보다는 협력을 더 중요한 삶의 가치로 여기고,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 치중해서 명성을 얻으려는 생각 따위는 없었으며, 교육의 동기가 경쟁과 소유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교육자, 샌더슨.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을 강조한 그의 목표는 학생들에게 자아를 실현할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평생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도킨스는 교육에 헌신한 샌더슨의 삶과 이야기를 회고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진다. 사리분별이 정확한 이성주의자의 감상, 그리고 이어지는 도킨스의 선동적인 외침.

 

 

“성적 순위 통계 자료, 단편적인 사실로만 가득 채워진 학습 요강, 끝없이 이어지는 시험을 타도하라.”

 

 

"...무정부적, 혁명적, 정력적, 악마적, 디오니소스적, 열정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가득하고, 창조하려는 엄청난 충동으로 넘치는 삶, 그것이 바로 성장과 행복을 위해 안전과 행복의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의 삶이다.  

 


안전과 행복은 따뜻하고 편안한 상태에서 살면서 쉬운 해답과 값싼 위안에 만족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 성숙한 악마의 사도가 충동질하는 악마적인 삶은 위험한 것이다. 당신은 위안을 주는 환상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당신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믿음의 고무젖꼭지를 더 이상 빨고 있을 수 없다. 그 위험에 맞서려면 ‘성장과 행복’을 얻을 각오를 해야 한다. 당신이 성장해서, 존재가 무슨 의미인지 대면함으로써, 그것이 덧없는 것이며 그렇기에 더더욱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면함으로써 알게 되는 기쁨과 말이다." p.32-33. 
 

 

믿음과 전통과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 대담한 발상, 증거를 토대로 한 과학적 탐구 행위에 대한 깊은 신뢰가 이 책 전체를 관통해서 깔려 있다. 과학적 사고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과학자의 견고한 사유가 주는 아름다움. 그러나 이 지성과 의사소통의 완벽한 일치에서 오는 희열을 만끽했다고 하면 과장이겠다. 인간에게 드리워져 있는 일체의 신비와 환상을 제거하고 무화시켜버리는 도킨스의 과학적 사고에 감탄을 하면서도, 그 냉소적 우월감이 드러난 문장들을 유쾌하게 즐기다가도 내 변덕스러운 기질에서 기인한 어떤 이중적인 감정의 기제가 작동되는 바람에 반발심 또한 함께 들었다고 표현해야 맞을 거다. 그래서 하는 말. Mr.도킨스, 과학적 증거에 입각한 논증만이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던가요?  
 

  

이건 좀 다른 맥락. 

 

 

어떤 개인의 특정한 주장을 담은 과학적인 가설이 과학적 진리로 판명되기까지의 과정에는 엄격한 학문적인 기준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 기준을 가지고 있는 주류 담론을 생산하는 학자나 집단에서 한 개인의 가설을 과학적 진리로 수용하는 단계에서 가치있는 평가를 내리지 않았을 때, 그리하여 그 가설이 과학적 진리의 목록들에서 제외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면, 새로운 과학적 진리의 발견이란 것도 시간차를 두고 뒤늦게 서서히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것일까,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게 마련이라는 말처럼. 진실에 관한 이 낡고 진부한 수사의 진실성은 별 의심없이 고스란히 믿어도 좋을 만큼 진실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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