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끼어 얼룩덜룩하게 된 옷.

내가 이해하는 인간 본성의 한 단면.

숭고한 내용으로 채워진 낭만적인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긍정적인 미적 체험에 동참하는 것을 허락받는 대신에 그 대가로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묘한 상실감이 들 때가 있다. 뭐랄까. 핵심적인 얘기를 회피한 채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그저 멋부리는 소리나 남발하는 사람의 말을 마냥 좋은 말씀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는 찜찜한 기분. 감미료를 듬뿍 쳐놓은 음식을 자연의 맛이라고 포장하는 것쯤에 반쯤 속아주면서도, 이렇게 이것 저것 쳐발라 놓고 자연산이라고 박박 우겨도 좋은 거냐며 딴지를 걸고 싶은 그런 마음.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생각나는 작가가 에드거 알랜 포다. 인간성에 대한 통찰이 빚어낸 그의 정밀한 글들은 인간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 볼 것을 요구하면서 윤리와 도덕이 미치는 자장이 어디까지인가를 놓고 숙고하게 만든다. 경이로운 것은 이 우울하고 예민한 정신의 소유자가 가장 첨예한 이성주의에 입각하여 글을 썼다는 점.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의 부실함을 신랄하게 조롱하는, 그로테스크한 글에 배어있는 슬픔과 위트. 포는 인간 내면에 깃든 악마성과 이중성을 묘사해내는 데에 머뭇거리지 않는다. 복수의 완벽한 전형을 보여주는 아몬틸라도의 술통.

지상에서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고, 어둠과 습기가 차 있는 지하에서는 생매장이 진행중이다. 이런 극적인 공간 분할 자체가 인간 내면의 모순을 드러내는 하나의 장치인지도. 한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지상과 지하, 그 쪼개어진 자아 속에 우리가 맹렬하게 감추어야만 하는 금기시된 욕망과 쾌락들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혹시 우리의 저 깊숙한 무의식으로의 하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친구를 업신여긴 죄로 영문도 모른 채 죽어야 하는 포르나토르. 자신을 모욕한 친구를 죽여버리는 몬트레소르의 강한 증오심. 최민식이 올드보이에서 지가 왜 갇힌 지 이유를 몰라 발광할 때, 유지태가 짓던 섬뜩한 표정은 차라리 인간적인 것이었다.

최민식이 제 혀를 자를 때엔 제눈을 찌른 오이디푸스처럼 운명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존재인 인간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진실, 혹은 진리를 안 대가로 자신을 징벌하는 대목에서는 그러니까  최소한의 양심 쪼가리가 남아 있었단 말이지. 일말의 죄의식 같은 거.

아몬틸라도의 술통에는 그것조차 없다. 

포는 인간의 무엇을 간파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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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찬 2012-10-17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읽었습니다^^ 정말 공감가고, 감동받앗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