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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평점 :
보르헤스는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고 말했고, 하루키는 이 어록을 74세에 쓴 자신의 최근작에서 ‘작가의 말’에 남겼다.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자기복제’에 대한 변명처럼 들릴수도 있겠지만, 그 ‘제한된 수’가 ‘한 작가의 세계’를 만들어 낼 만 하다면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일도 아닐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에 이어 <매니악>을 발표한 벵하민라바투트는 집요하게 과학기술의 양면성을 파고든다. 이것이 벵하민작가가 그려내고 싶은 ‘제한 된 수의 세계’가 될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분야에 관해 '그'만큼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다.
매니악. 이 작품의 제목은 도발적이고 강렬하다. 책 날개의 설명처럼 '매니악'의 사전적 의미는 '미치광이'지만, 작품속에서 노이먼이 만든 '수학 분석기와 숫자 적분기 및 계산 컴퓨터- 매니악'이 압도적으로 등장하는 2부 2장에서 작품이 결말을 맺었다면, 제목이 뜻하는 바는 이 컴퓨터 이름이 분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도 작품의 반이 남았고, '미치광이'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야심차게 이 '미치광이'의 실체를 한번 찾아보기로 했다.
1부. 진보에 대한 인지부조화, 파울 에렌페스트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파국을 시작으로 등장하는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는 '미치광이' 후보로 손색이 없다. 그는 아인슈타인이 형제처럼 아꼈던 뛰어난 과학자이자, 과학의 토대가 영원히 달라진 '1927년 솔베이회의' 이후 '새로운 과학에 드리운 무게를 증오하던 아인슈타인'(p20)과 '아원자 세계의 왕좌에 근본적으로 다른 유형의 물리학을 앉히려던 보어'(p20)의 중재자였으나, 이 엄청난 과학적 진보에 대한 인지부조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릎꿇은 희생자였다. 그 시기와 맞물려 독일에서 부상하는 나치는 ‘깊어지던 그의 시름과 완벽히 대위법’(p25)을 이루는 한 세계의 종말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파울 에렌페스트는 '미치광이'가 아니라, '미치광이'의 희생자가 아닐까.
2부. 진보를 치유할 방법이 없다, 조니 폰 노이먼
분명하다. 작품 속 모든 손가락이 '미치광이'는 결국 조니 폰 노이먼이라고 가르키고 있었다. '그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똑똑한 사람'(p49)이며, 그 천재성이 '우리와 다른 외계인'(p51)이라 불렸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인류의 대재앙이 될 수도 있는 수소폭탄 제작에 동조한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그가 죽기전 마지막 총기를 끌어모아 유진 위그너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위험은 원래부터 내재해 있지. 진보를 치유할 방법은 없'(p297)다고 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미치광이가 되어 과학기술의 위험을 초래한것이 아니라, 진보 자체가 곧 '광기'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
3부. 치유할 수 없는 진보의 증거, 알파고와 이세돌
‘매니악'의 실체가 드러났다. 모든 손가락이 '노이먼'을 가리켰지만, '노이먼'이 자기 손가락을 들어 '과학의 진보'를 가르킴으로써 내가 찾은 '미치광이'는 '(과학기술의)진보' 였다. 그렇다면 3부의 알파고와 이세돌은 '치유할 수 없는 진보'의 증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세돌은 알파고와의 다섯 차례 대국에서 '신의 한수 78수'로 인류에게 1승의 희망을 선사했지만, 정작 이세돌 본인은 처절한 절망을 통감한채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90년전 파울 에렌페스트의 파국과 2019년 이세돌의 은퇴는 모양은 달랐지만 그 원인은 다르지 않다. 파울 에렌페스트가 ‘치유할 수 없는 진보’라는 현실과 고전물리학의 신념 사이에서 격렬한 인지부조화를 겪었다면, 이세돌은 세기의 대국을 직접 겪으며 현실을 단번에 인정했을 뿐.
’결과는 무시무시했다.'(p405) 현재 알파고의 상위버전인 알파제로는 인간이 제공하는 '학습 경험에 전혀 의지하지 않은 채'(p406)모든 게임을 프로그램 스스로 통달하며,이세돌을 이긴 알파고와 100번의 대국을 치러 전부 승리했다. 수 십년 전 노이먼이 했던 예언 그대로,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언어를 이해해 읽고 쓰고 말할 줄' 알며, '그리고 어린 아이처럼 놀 줄' 아는 진보가 눈앞에 당도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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