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알 유희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9
헤르만 헤세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완벽한 고요함 속에서 대화에 빠져들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읽을 수 없는 책이다. 몇 백 년 후 먼 훗날, 그 훗날 세계 사람들이 '오래 전 사람' Josef Knecht의 삶의 기록을 발견한다. 문화라는 것이 몰락해버리고 인성이 사라져버린 사회에 정신적 가치를 고양시키며 봉사하려는 목적으로 모인 고매한 학자들, Kastalien이라는 교육州, 속세와 격리된 그곳에서 이들이 최고의 가치를 부여했던 유리알유희, 어렸을적부터 뛰어남을 인정받고 나중 Magister Ludi라는 최고경지에까지 이르는 주인공 크네히트. 단순한 이야기의 연속 같지만, 그래도 소설은 역시 소설. 끝부분에 가서의 반전.

도대체 유리알놀이(유희는 무슨. 독일어에서의 Spiel은 단순한 '놀이'일 뿐, 글쎄 약간 비꼬는 뉘앙스가 담겨있다고나 할까.)의 모습이 궁금했다. 무슨 주판알 놀이나 바둑판 위의 유리알 놀이는 아닐까? 혹 周易풀이 무슨 괘를 펼쳐놓는 놀이? 신비성 유지를 위해설까, 마치 카프카가 변신에서 그 ungeheueres Ungeziefer의 실제 모습을 끝끝내 보여주지 않듯이, 여기 헤르만 헤세도 그 놀이의 언저리만 뱅뱅 돌며, 그 놀이규칙 자체도 오랫동안의 엄한 훈련과정을 통해서야 터득될 수 있을 정도로 어렵고, 또 철학 문학 음악 역사를 아우르는 조화의 미가 그 추구하는 절대적 목표라는 추상적 이야기만 계속 반복 강조할 뿐, 그 어디에서도 자세한 묘사를 하지 않는다.

일단, 이야기의 시점을 미래로 택한 것은 당시 한창이던 나치를 피하기 위한 소설적 트릭이라 치고, 이런 설정을 한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마치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처럼, 파괴되어가는 인간성 복원을 위한 이상향으로서의 Kastalien? 종교도 철학도 그 힘을 상실한 이 혼란과 갈등의 시대에 '서로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조화를 이끌어내는' 그런 것이 궁극적 목표인 유리알놀이(Glasperlenspiel)? 하지만, 그 역시 허무한 시도일 뿐이라는 상징성으로서 '놀이'라는 이름을? 그래서 주인공의 이름까지 Knecht? (종이나 노예라는 뜻의 독일어).

헤르만 헷세 소설의 진수는 스토리 설정보다는 역시 그 나레이션과 대화에 나타나는 생각의 깊이. 영재소년 크네히트가 느끼는 음악명인의 모습과 아우라, 근본적으로 철학을 달리하고 또 전혀 다른 세상에 속해있는 데시뇨리와의 사이에 교차하는 우정과 갈등, 조직생활 적응능력이라곤 전혀 없는 친구 테굴라리우스 또 천방지축 자연인 티토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한계성, 고귀함을 추구하는 이 종단이란 집단도 그 일원인 자기 자신도 역사란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존재일 뿐이라는 자각, 그 상황묘사 심리묘사 대화 문장 하나하나에 녹아있는 생각의 깊이 삶의 깊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내 머리에 한 사람의 '구체적' 인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데미안에 이끌리는 싱클레어나 나르치스와 골트문트라는 양면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간이 아닌, 스스로 자신을 키워나가는 한 인격체. 그 사람의 삶을 읽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설의 후반부 작별의 대화에 이르자 또 다른 '구체적' 인물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한 삶의 지평이 사회의 지평과 함께 선한 의도의 '죽음의 놀이'로 갑작스레 존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는 끝 장면에 이르자, 앞서의 '구체적' 인물이 완전히 머리에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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