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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박노해 시집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10월
평점 :
박노해라는 이름, 나에게 그 이름은 얼핏 어디선가 본듯한
'옛날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람 뭔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우연히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사진전을 다녀오고 나서부터이다.
그가 12년 동안 분쟁 현장에서 평화활동을 하며 찍어온 흑백사진들은 놀랍다.
우선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중남미 네 개의 대륙이라는 넓이가 대단하고
무엇보다 사진 속 인물들에 대해서 작가의 애정이 느껴지는 사진들...
처참하거나 끔찍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아름다워서 슬픈, 그런 사진들이었다.
그 분들이 처해있는 현실들에 대해서 간결하게 집필한 시인의 캡션까지 읽으면
그래, 이 사람은 단순히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
그 곳에 갔던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긴다.
전시장 입구에 쓰여있던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만큼 보이는 것이다"
내 가슴을 관통한 그 한 줄의 문구가 그를 모두 말해주고 있듯이.
어떤 사람일까, 검색해보다가 중앙일보에 실린 그의 인터뷰를 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그가 12년동안 자처해서 세상에 잊혀지기를 바랐다는 것을.
유명해진 자기 이름이 잊혀지도록 하는 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도
인간적으로 정말 힘든 일일 것 같은데,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니.
그가 사진만 찍은 것은 아니었다.
12년 동안 만년필로 꾹꾹 눌러 쓴 5000편의 시가 있다고 한다.
5000편이면 12년 동안 매일 하루도 어김없이 시를 썼다는 것인데 정말 대단하다.
그 중 300여 편을 추려서 낸 시집이 바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이다.
무려 554쪽.
시집의 뒷편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박노해의 시를 읽고 아프다면 그대는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라고.
그런데, 정말 아팠다. 바로 두 번째 시부터.
<넌 나처럼 살지 마라>는 누구나 한 번쯤
부모님으로부터 들어봤을 얘기에 대한 시이다.
나도 기억한다. 장사 끝나고 녹초가 되어 돌아온 어머니가
돌아오시자마자 방바닥에 드러누워서는 울먹이시며
"넌 공부 열심히 해서 교사나 의사가 되라, 넌 나처럼 살지 마라"고
말씀하셨던 그 어느날을. 이 시를 읽으니 그 때의 기억, 그와 비슷했던 아픈 기억들이 떠오르며
잊고 있었던 상처들이 다시 붉어지고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시를 다 읽고 나서부터는 난 왠지 '치유'를 받은 것만 같았다.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알아요, 난 죽어도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
제 자식 앞에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정직하게 땀 흘려온 삶을 내팽개쳐야 하는
이런 세상을 살지 않을 거예요
나는 차라리 죽어 버리거나 죽여 버리겠어요
돈에 미친 세상을, 돈이면 다인 세상을"
너무 어려서 그냥 엄마가 불쌍하고 세상이 무서웠던 한 아이가 바로 그때
진정으로 해야했던 말을, 세상에 외쳐야했던 말을
시인이 대신해준 것만 같아서 너무나 눈물나도록 고마웠다.
그리고 난 이제부터라도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를
마지막 연을 보며 알 것만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
돈이 없어도 당신은 여전히 나의 하늘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너답게 살아가라고
너를 망치는 것들과 당당하게 싸워가라고
너는 엄마처럼 아빠처럼 부끄럽지 않게 살으라고
다시 한번 하늘처럼 말해주세요"
젊은이들에 대한 시인의 애정은 대단한 것 같다.
그들에게 바치는 시가 정말 많다.
<스무살의 역사> <소녀야 일어나라>도 강추다.
이 시집에는 그의 사진 속에 담겨있던 주인공들에 대한 시들도 많다.
가끔 전시회에 걸려있던 사진이 바로 떠오르는
<서른다섯 여자광부의 죽음>같은 시들도 있어 반가웠고 슬펐다.
시인을 따라 내가 지구를 여행하며 그 사람들을 다 만나고 온 것만 같았고,
요즘 트위터다 뭐다 세계인들과 하나가 된다고 하는 말들이 많은데,
진짜 우리가 들여다보고 함께 해야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4대강이니, 언론문제니, 조류독감이니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던 사안들이나,
몇 번의 국민적인 촛불시위에 대한 시들도 담겨있어
시인이 국내외로 정말 바쁘게 뛰어나디며
치열하게 시를 썼다는 것이 절로 느껴진다.
정말로, 이 시집은 다루지 않고 있는 문제가
거의 없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놀라운 지혜들이 담겨있는 이 한 권의 시집을
내 곁에 두고만 있어도 든든할 것만 같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런 것을 쓸 수 있었을까.
그 힘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어쨌든 2010년이 멀어져가는 이 가을날에
나는 박노해를 알게 되어서 행복하다.
한 사람의 12년의 세월이 녹아 있는 이 한권의 시집,
그리고 그의 사진전과 사진집을 알게 되어서 고맙고
다시 돌아와준 그를 나는 환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