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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쎄 / 사계절 / 1998년 9월
평점 :
블로그: www.dckorea.co.kr
지난 7월부터 몇권을 책을 읽고 있다. 맨 먼저 읽기 시작한 책은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이다. 기원전부터 18세기까지 유라시아대륙에서 흥망성쇠한 유목민들이 세운 국가에 대한 역사 책이다. 이 책은 진지전, 기동전, 화력전, 그리고 유목민 이야기에서 <유목민 이야기>에서 잠깐 말한 것 처럼 이진경 교수의 <노마디즘>을 읽으면서 한번 읽겠다고 생각했었다.
상고시대에서 13세기까지 스키타이와 훈족에서 시작하여 돌궐, 위구르, 거란, 투르크와 이슬람 등에 대한 이야기가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다. 돌궐, 거란과 여진은 우리 역사에도 가끔 등장하고, 최근 사극 <대조영>에서 발해가 건국될 당시 중요한 세력으로 나왔다.
중반부는 칭기스칸과 몽골제국에 대한 이야기 이고, 마지막은 티무르, 킵착 칸국(러시아 지역에 정착한 칭기스칸 후예 몽골인들), 샤바니조, 차가다이인, 그리고 몽골리아의 마지막 제국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찾아보기>까지 800여 페이지가 넘는 두터운 책인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다. 중반 이후 계속 되는 몽골인들의 이야기가 생소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잘 알아 식상한 것도 아니기 때문인 듯하다. '적당한 관심, 사전 지식, 새롭운 사실들, 드라마틱한 제국의 흥망성쇠' 등이 긴 여정을 길지않게 만든듯 하다.
유목민, 유목민의 군대, 유목민의 전투기술
유목민의 군대는 기원전 750년경의 스키타이 시대부터 칭기스칸 그리고, 그의 후예들이 최후를 맞은 18세기까지 말과 활로 이루어진 '기마궁사'들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많은 경우 '도시 없이' 소위 '움직이는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것만을 지니고, 계절적 이동에 따른 마차 위에 여인들과 재산들을 실고 다녔다.
이들의 전술 또한 기원전 7세기에서 12세기 칭기스칸까지도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데 앞에서 후퇴하면서 적들을 약올려 들판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게 만든 후 적들을 초원에서 몰이사냥을 하듯이 격파하는 것이다.
유목민들은 전투에서 적을 급습할 때 놀랄 정도로 큰 소리를 지른다. 만약 적이 저항하면 흩어졌다가 다시 빠른 속도로 돌아오면서 도중에 있는 모든 것을 부수고 뒤엎어버린다. 그들은 요새나 진지를 어떻게 함락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놀랄 만큰 먼 거리에서 쇠같이 단단하고 날카로운 뼈로 촉을 만든 화살을 쏘는 기술에서 그들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진지전, 기동전, 화력전, 그리고 유목민 이야기에서 이야기했던 톤유쿡은 투르크의 장점을 언제든지 기회가 되면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또 상황이 나쁘면 피해서 도망칠 수 있는 유목민으로서의 기동성에 있다고 말을 하고 있다.
"돌궐은 그 수가 중국의 10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들은 물과 풀을 찾아 떠돌고 사냥을 한다. 그들은 정해진 주거가 없고 늘 전투하는 연습을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강하다고 느끼면 나타나고, 약하다고 생각하면 물러나 숨는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보다 수가 많은 중국의 이점을 상쇄하고 그것을 쓸모없게 만들 수 있다. 만약 당신[빌게 카간]이 돌궐을 성곽이 있는 도시에 살게 하고 중국에게 공격을 받아 패배를 당한다면, 설사 그것이 단 한 번일지라도 당신은 그들의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 부처와 노자는 사람들을 유약하게 만드니 그런 가르침은 전사에게 맞지 않는다."
이런 유목민과 한민족과의 친연성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고구려의 주몽 설화, 말타는 고분벽화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기마궁사의 모습과 순장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순장은 스키타이인, 투르크-몽골인, 그리고 삼국시대의 한반도에서도 찾아 수 있다. 이런 관습은 이미 서아시아나 중국에서는 오래 전에 사라진 장례의식이다.

▲ 고구려 쌍영총에서 발견된 기마무인도의 모습
'야만인들'인 게르만족의 침입에 의해 서로마 제국이 멸망되면서 새로운 중세가 시작되는 것처럼 이 책을 읽다보면 유라시아 초원에서의 작은 폭풍이 전체 세계 역사에 얼마나 거대한 충격을 주고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지를 볼 수 있다. "초원의 한쪽 끝에서 발생한 작은 자극으로 인해 민족이동이 가능한 이 엄청나게 광대한 지역의 구석구석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련의 결과들이 초래"된다.
야만과 문명, 그리고 국가라는 문제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빠져든 화두는 '야만'과 '문명' 그리고, 국가라는 문제이다.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의 경우 씨족사회를 기반으로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면서 몽골 일족들은 '문명화 과정'을 거쳐 초원이 강요했던 강인한 생명력(유목민의 전투력)을 잃어버리고 문명의 수호자가 된다. 또 달리 보면 국가 자체가 문명을 요구하거나, 문명이 국가를 요구한다고 할 수도 있다.
먼저 이들의 '야만성'은 어느 정도였을까? 또 어떻게 하여 문명의 수호자가 되었을까? "그[석륵]은 유목민적인 성향도 못지않게 강했고, 특히 그의 흉노인 후예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석륵의 계승자인 석호(334-349)는 자기를 암살하려고 기도했던 아들을 사형에 처할 정도로 방탕한 짐승이었다. 그 아들은 완전히 괴물로서 자신의 가장 예쁜 첩을 불에 구워서 탁자에 내오게 할 정도로 변태적인 타타르 냉혈한이었다. 석호는 가장 열렬한 불교의 보호자가 되었는데, 이것은 문명의 마력에 처음 접하면서 빠져버리는 야만인 사이에 흔히 나타날수 있는 이상현상이다."
탁발도의 경우 "새로운 통치자의 어머니가 과부로서 가질 수 있는 야망, 탐욕, 또는 질투가 빚어낼 결과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황제 즉위 이전에 그녀를 죽이는 야만적인, 그러나 사려 깊은 투르크-몽골의 관습을 그대로 보존하였다"고 한다.
3-5세기 훈족에 대한 서구(아마 로마시대) 역사서의 묘사를 보면 이렇다. 아이의 뺨에 수염이 자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 깊은 상처를 냈다. 음식을 요리하거나 얌념을 치지 않고, 안장 밑에 놓아두어 부드럽게 된 들풀의 뿌리와 고기를 먹었다. 농기구를 사용하는 방법이나 고정된 거처가 없다. 늘 유목생활을 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취위, 배고픔, 갈증으로부터 단련되었다. 모임도, 장사도, 마시거나 먹는 일 심지어는 말을 탄 채 자기도 했다. 이런 생활과 함께 괴물같은 인상과 염소가죽으로 '대충' 만든 복장을 한 모습을 본 서구(로마와 게르만 세계)는 공포에 떨었다.
581년 중국의 사가들이 돌궐에 대해 이렇게 묘사를 하고 있다. 그들은 노인을 존중하지 않고, 혈기가 왕성할 때 우대를 받는다. 염치와 예의를 모르고, 이런 점에서 옛 흉노와 비슷하다. 여기서의 흉노는 서양에서 말하는 훈이라는 학설이 존재한다. 또 사람이 죽으면 자손이나 친척들이 양이나 말을 잡아 그의 천막 앞에 그에게 제물을 바치듯이 놓아둔다. 그들은 말을 타고 애도하는 울음을 내면서 그 천막 주위를 일곱 바퀴 돈 다음에 그 천막 앞에 와서는 얼굴을 칼로 그어서 피가 눈물과 함께 흐르게 한다. 장례를 치르는 날 그와 가까웠던 친족이나 그와 가까왔던 다른 사람들이 제물을 바치고 말을 달리며, 죽었던 날과 마찬가지로 그의 얼굴을 칼로 긋는다. 장례 이후에 고인이 생전에 죽인 사람의 숫자만큼의 돌을 그의 무덤 주위에 둔다. 아버지나 백부나 숙부가 죽으면 그의 아들이나 어린 동생 혹은 조카가 미망인과 그녀의 자매와 결혼한다. 그들은 악령과 정령을 숭배하고 무당을 믿는다. 전투에서 죽는 것이 그들에게는 영광이고, 병에 걸려 죽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이 정도면 야만이라는 표현이 가리키고 있는 유목민의 생활상을 어느 만큼 알 수 있다.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문명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문명화과정>을 볼 것)
문명의 마력이란 물리적 힘을 사용하지 않고도 권위를 부여하고 충성을 하도록 만들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즐거움을 주는 기술들인듯 하다. 종교가 지배자를 신이나 하늘의 대리인으로 만들고, 문명국의 궁정은 '움직이는 도시'에서 보여줄 수 없는 거대한 즐거움을 야만적 지배자들에게 선사한다. 많은 의례적인 절차들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같은 친족/씨족 내에서도 왕과 왕이 아닌 자에 대한 차별성을 만들어 낸다. 이런 의례들을 통해 친족 살해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도 문명의 역할 중 하나일 것이다. 과부인 어머니가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를 만듬으로써.
하지만 문명화의 결과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목적 생활에서 나온 전투력의 약화에 의한 문명으로부터 패퇴 또는 너무 문명화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는 형태로 나온다. "그들[타브가치(탁발)]은 북중국의 다른 투르크-몽골계 국가들을 통일한 뒤 너무 한화(漢化)되어 부족이나 왕조 모두 중국인 대중 속으로 녹아들었다. 더욱이 불교를 위한 그들의 열의는 기독교에 대한 카롤링거와 메로빙거의 열정의 재판이었다. 마지막으로 프랑크 자신이 게르만의 침입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대항에 로마 전통의 보호자가 되려고 했던 것처럼, 탁발도 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초원 깊숙한 곳에서 미개인으로 남아 있었던 몽골계 부족들을 상대로 황하에서 '라인 강의 파수꾼'이 되었다."
유목제국들은 야만과 문명이 만나는 초기에는 아주 강한 힘을 갖게 된다. 탁발의 경우를 통해 보면 반쯤은 한화된 투르크-몽골계 부족인 탁발은 '중국에 대해서 모든 고유한 군사적인 우위를 점하면서도 여전히 북방의 야만적인 부족들에 비해 우월감을 갖게 해주는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429년 타브가치의 왕 탁발도가 몽골의 유연을 상대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중국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다. 풋내나는 망아지와 송아지들이 호랑이와 늑대를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유연 그들은 여름에 북쪽에서 방목하고, 가을이 되면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겨울에 우리의 변경을 약탈한다. 우리는 단지 여름에 방목장에 있는 그들을 공격하기만 하면 된다. 그때 그곳의 말은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숫말들은 암말과 교미에 정신이 없고 어미말은 망아지와 지내기 바쁘다. 만약 우리가 그곳으로 가서 그들의 목초지와 물을 없애버리기만 한다면 며칠 이내로 그들을 잡든지 아니면 붕괴시켜버릴 것이다." 정확한 판단이다. 유목민의 조직은 여름이 되면 모두 흩어져(전투조직이 와해되어) 있다 겨울에 약탈을 위해 뭉치는 '국가'가 아닌 전투 연맹체 정도이다.
탁발도가 말한 이와 같은 이중의 우위는 이후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원의 황제)가 남송과 카이두 몽골부족을, 그리고 초기의 만주족(청)이 최후의 중국인 반란과 마지막 몽골의 호전성을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이중의 이점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탁발, 쿠빌라이조, 만주도 완전히 한화되는 때는 반드시 찾아왔다. 그러면 그들은 북방의 부족들에게 패배하였고, 중국에서 쫓겨나거나 아니면 그 속에 흡수되어버렸다. 이것이 (야만과 문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중국과 몽골 역사의 기본적인 리듬이다.
탁발의 경우 황제였던 탁발홍은 471년 승려가 되기 위해 어린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었고, 그의 아들인 탁발굉(효문제, 471-499)은 용문 석굴을 만들게한 장본인이다. 탁발은 중국의 문화와 불교의 신앙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투르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강인하고 늠름한 기상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게 된다. 한번 보살의 자비로운 손길에 스친 사나운 전사들은 승려의 인문주의적인 가르침에 너무나 감화되어 원초적인 호전성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방어마저 게을리하게 된다.
8세기 중앙아시아에서 주도적인 세력이었던 위구르 쿠르크 제국의 경우 "피냄새로 진동하는 야만인들의 습속이 유행하던 나라가 채소를 먹는 사람들의 땅으로 바뀌었다. 살인이 자행되는 나라가 선이 권장되는 나라로 바뀌었다"고 쓰고 있는데 마니교와 기독교의 영향이다. 이런 내용은 모든 유목민족의 역사에서 나오는 듯하다. 더 이상 이런 사례를 열거하지 않겠다.
유목민이 야만에서 문명으로 넘어오는 사이에 국가가 존재한다. 정주민의 땅을 차지한 유목민은 그들을 통치하기 위해 국가를 만들고, 그 국가에 그들이 '포획'되면서, 즉 야만성을 잃고 문명화되면서 다시 그 '국가-정주민의 땅'을 잃거나 '민족/부족' 자체가 정주민에게 동화되어버린다.'중국화=문명화' 과정을 거친 유목민의 운명은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유목부족 자체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중국의 한족처럼 변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한족이 유목민에 비교하여 절대적 다수라는 단순한 사실에 기인한다.
둘째, 문명화 과정은 '사람들을 유약하게 만드는 그런 가르침'이어서 유목민의 호전성을 사그라들게 만들어 전투력을 잃었을 때 수적으로 소수인 그들을 다시 초원으로 몰아내버리거나, 다른 초원의 호전적 유목민의 사냥감이 되도록 만든다. 문명세계의 발명품인 국가는 유목민에게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면서도 다시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원인이 된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읽은 목적은 국가의 형성, 체제의 변환 또는 이행, 진지와 기동이라는 그람시적 은유 등에 대해 해석을 위한 것이다. 이제 이런 내용에 빗대 그람시의 이야기를 해석해 보자.
첫번째의 경우는 가지고 진지전, 기동전, 화력전, 그리고 유목민 이야기에서 말했던 그람시의 진지전의 운명을 예감할 수 있다. 만일 '노동자가 절대적 다수'라면 그람시의 이야기가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노동계급의 존재론적 위치와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이라는 문제 등과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존재론적 당위가 아닌, 사실을 보면 부르조아 사회에서 부르조아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이 임금노동자라고 해도 노동계급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 생각을 한다해도 존재론적 당위가 전제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닌가?
결국 '문명화'된 사회에서 계급의식을 지닌 노동자계급은 다수가 아닌 정치적 소수인 것이다.
두번째 경우를 가지고는 반대로 어렵지만 하나의 가능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람시가 이야기하는 계급적 헤게모니를 구성하기 위한,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의 야만성을 '문명화'할 수 있는 조직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이다. 그람시의 진지는 문명화 과정 속에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과 이것의 현실화쪽으로 '접합'시켜나가기 위한 장(場)을 만든다. 이속에서 '폭력에 대한 독점'으로 정의되는 '계급적' 국가를 '문명화' 시킬 수 있을까? 이 과정은 앞에서 살펴 본 수적(數的) 소수에서 다수로 되어가는 과정이다. 사람들의 경제적, 존재론적 위치가 아닌 '어떤 다른' 심급에서.
이런 관점에서 그람시는 마키아벨리적 군주에 빗대 현대적 군부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하며,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많은 유목민의 군주들이 자신들의 민족을 문명화시키려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이에 대한 어렴풋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진지(성곽) 내에서 벌어지는 과정은 이데올로기적(문화적) 과정이다. 톤유쿡의 지적처럼 '전사에게 사람들을 유약하게 만드는 부처와 노자와 같은 가르침'을 전달하는 곳이다. 불교 사원과 도관이 있다. 도망가 숨을 곳이 없을 때, 즉 기동전이 불가능할 때 진지전이 필요하다면 이것의 전제조건은 아렌트가 말하는 '전체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다. 전체주의에서는 국가 안에서 전체의 일부가 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시민권을 쫓아내 버린다.
문명화 과정을 거친 유목민의 운명, 그리고 그람시적 진지와 기동
이런 생각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와 함께 읽은 책들의 내용이 결합되어 나왔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를 읽고 있는데 이런 내용이 있다.
(다민족국가에서 소수민족의) 동화의 강력한 방해 요인은 이른바 주도 민족들이 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폴란드에 살고 있던 러시아나 유대계 주민들은 폴란드의 문화가 자신의 문화보다 더 우수하다고 느끼지 않았으며, 폴란드인이 전 주민의 60퍼센트를 차지한다는 사실에도 특별한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글을 반대로 읽으면 수적, 문화적 우월성이 동화의 핵심 동력이다. 이런 아렌트의 지적이 맞다면 문명에 쉽게 젖어드는 유목민의 경우 정주문명의 우월성을 느끼고, 정주민들이 수적으로 월등히 많다면 어쩔 수 없는 필연인 것이다.
함께 읽은 책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읽으면서 문명에 대한 이해를 위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을 함께 읽기 시작하였다. 문명의 시작은 어쩌면 '차이; 피지배계급보다 자신들이 났다는 우위의 표현체계'일 수도 있다. 훈족을 보면서 놀랐던 중세 초의 유럽인들처럼 현재의 우리도 중세의 유럽인을 보면 '야만인'이라고 놀랄 것 같다. <문명화과정>에서는 궁정사회의 예절 등이 어떻게하여 일반화되어 '민족의식'이 되고, 다시 근대적 국가(nation, 민족국가)가 성립되는지를 추적한다. 현재 <전체주의의 기원>과 같이 읽고 있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Who Sings the Nation-state?>도 함께 읽었다. 주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집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수행적 모순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유란 무엇인가 되묻고, 스피박은 국가적 추상구조라는 개념을 통해 재분배와 사회복지기능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무거운 주제지만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읽기 시작한 것도 버틀러가 「국민국가의 몰락과 인권의 종말」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갔기 때문이다. 학교에 대닐 때 아렌트를 아주 멀리서 '소비에트'를 공격하는 우파 지식인 정도로 생각을 했었다. 또 이런 선입관 때문에 손이 가지 않았었다. 내 개인적인 상상이지만 알뛰세르의 제자인 발리바르가 '인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는데 아렌트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아닐까?
인권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보통 학교에서 '천부인권설'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런 설(說)이 단순한 주의, 주장에서 사회적인 힘을 가지고 정치적 사실이 되는 과정, 신화가 현실이 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아렌트는 이렇게 만들어진 현실이 사실은 '신화적 현실'이었음을, 인간에게 사실상 인권이 없었음을 주장하는 듯하다. 신화가 현실이 되는 과정은 이데올로기가 사실/진리가 되는 과정으로도 읽을 수 있다.
또 문명과 차별성(차이)의 문제로 <유한계급론 - 문화, 소비, 진화의 경제학>을 사들었다. 베블린의 책을 해설해 놓은 것이다. 베블린의 책은 대학시절 일별했었는데, 마르크스 이외에는 이단시 되었던 풍토에서 공부한 관계로 선배한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 기억뿐이다.
이번에 1997년 3월 3일 을지서적에서 산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을 함께 읽어야겠다. 10여년전 책 뒤에 써 놓은 글이 있다. 1996년 말 제대를 하면서 바로 취직을 한 후 6개월이 체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방황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인데, 지금도 ...
"나에게 투쟁정신이 필요하다. 나는 절망하고 있다. 나 자신에게"
<구별짓기>도 사람간/계급간의 차별화 전략에 대한 분석이다.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에 대한 분석인 <유한계급>에서 시작된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문명화과정> 역시 비슷한 내용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이론적 정확도를 떠나 느낌이지만 문명을 습속으로, 탈주해서 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의식적 좌파들이다. 하지만 문명을 떠나 정말 '밖에서' 생각할 수 있을까? 자기가 서 있는 곳을 넘어설 수 있을까? 넘어선다면 어떤 개인이 넘어서는 것이 아닌 '문명' 자체가 넘어서는/넘어서고있는 것은 아닐까? 유목주의(노마디즘)은 결국 문명세계에 의해 사라져 갔다.
그러나 완전히 기병으로 구성된 금나라(여진족) 군대는 중국 남방으로 너무 깊이 들어갔다. 그곳에는 범람하는 땅, 서로 얽히는 강들, 논과 운하가 있었고, 조밀한 인구가 언제 그들을 기습하고 포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