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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이해 : 인간의 확장 - 맥루한 1
마샬 맥루한 지음, 박정규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제주도 여행, 올레길
지난해 연말 3박4일 일정으로 제주도에 다녀왔다. 셋이 이렇게 '길게' 여행을 간 적이 없다. 이번 여행은 그냥 걷자는 것이었다. 첫날은 오후에 도착하여 절물휴양림과 산굼부리를 둘러보았고, 둘째날은 올레길 중 첫번째 코스를 걸었다. 셋째 날은 한라산을 올랐다. 그리고 마지막 날은 비자림을 걸었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 제주도 여행은 렌터카 센터에서 시작하여 렌터카 센터에서 마친다. 차를 빌려 제주도를 이리 저리로 가로지르다 밤이 되면 숙박지로 새처럼 돌아왔다가, 또 다시 아침이 되면 이리 저리 구경거리를 찾아 나선다. 모두들 자동차를 타고 이렇게 돌아다니다보니 모든 사람들이 같은 곳에서 같은 것을 보고 돌아온다. 두번, 세번 갔다오면 어딜가든 심드렁해지기도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번 제주도 여행 중 이런 사회적인 현상의 원인을 찾은 듯하다. 그것도 "미디어의 이해"라는 관점에서.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우리가 찾는 구경거리들은 모두 차길 가에 있고, 만약 차가 가지 못하는 곳에 있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가는 곳이 이렇게 정해져 있다보니 우리가 만나는 삶과 그속의 사람들도 그리 특별하게 느껴지지않는다. 어디서나 서울의 롯데월드나 자연농원에서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식당엘 가도 마찮가지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제주도 사람들은 모두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고, 알게 모르게 나머지 모든 주민들도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자동차 문명의 양상
이런 모든 이유가 자동차 때문이라는 것이 이번 여행에서 내가 느낀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발(足)이 잘려 장애인이 되었기 때문에, 다시말해 자동차에서 내려 서서 무거운 발걸음을 뗐기 때문이다. 머리만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발도 생각을 한다. 맥루한은 이런 현상을 자동차적인 문명의 양상으로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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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는 그 마력만으로 사회적인 수준의 균일화를 꾀하였다. 그리고 자동차는 똑같은, 또한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도로와 보양지(保養地)를 만들기도 하였다. 텔레비젼의 출현이래, 당연한 일이거니와 이처럼 누구든지 같은 자동차를 타고, 같은 장소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한다는 획일적 상황에 대하여 이따금 불만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 한 대의 자동차가 갈 수 있는 곳에는 모든 자동차가 가고, 자동차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반드시 자동차적인 문명의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마샬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커뮤니케이션북스, 1997, pp.256~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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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제주도에 간다면 성산 일출봉을 가본다. 제주도 어디서 출발하든 자동차를 타고 잘 닦인 아스팔트를 달리거나, 좁은 해변도로를 통해 갈 수 있다. 그리고 빼곡히 들어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참 걸어 올라갔다 내려온다. 우리는 성산 일출봉에 가지만 얼마나 그것을 느낄 수 있을까?
아우라, 먼 것의 일회적 현상
벤야민이 "어느 여름날 오후에 휴식을 취하면서 지평선 너머의 산의 능선 또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 위로 그늘이 드리우는 어느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것 - 이것은 이 산의 아우라, 이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호흡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파시즘에 관한 문헌을 공부하는 CP Group 번역, p.4)고 할 때의 느낌, 아무리 가까이 있다 해도 먼 것의 일회적 현상인 아우라 말이다. 관광지의 번잡함을 느꼈다면 나만 그랬을까? 내가 성산 일출봉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것 아니다. 아주 아름답지만 제주도라는 맥락 속에서의 성산 일출봉을 볼 수 있냐고 묻는 것이다. (맥락적 이해에 대해서는 아래 소개한 전경수의 <문화시대의 문화학>을 볼 것)

미디어, 인간의 확장
맥루한은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 내용보다도 그 결과, 확장된 형식(기술)에 의해 유발된 효과에 관심을 둔다. 맥루한에게 자동차는 "말(馬)의 경우보다 훨씬 더 타는 사람을 슈퍼맨(superman)으로 만드는, 인간의 확장 형태"(p.256)로 간주된다. 그리고 "여행에 자동차를 사용하는 것은 사람을 '점점 몰개성적(沒個性的)'으로 만든다고, 대중 작가마저도 확신을 가지고 비난할 수 있을 때, 미국 생활의 구조가 의심된다고 하여도 좋을 것"(p.258)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기계에 의한 인간의 확장이 전통적인 맥락을 단절시키고 "인간집단의 모든 존재방식과 더불어 인간의 감관지각의 종류와 방식도 변화"(p.4)시킨다는 벤야민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때 다시 역설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미디어의 발달이 항상 인간의 확장으로 귀결는 것일까? 자동차를 예로 들면 항상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곳만으로 인간을 옭아매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확장의 이면, 축소된 감각능력
제주도에서 올레길을 걸으면서 얻은 깨달음은 기술에 의한 인간의 확장의 이면이다. 확장 뒤에는 어떤 것의 축소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말미오름에 올라 보았던 성산포 앞바다와 구불거리는 돌담에 둘러쌓인 당근밭, 감자밭들, 우도와 일출봉, 그 자리에 서서 느꼈던 아우라 - 아무리 가까이 있다 해도 먼것의 일회적 현상과 같은 것이 이 속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자동차에 의한 우리 발의 확장이 이러한 것을 축소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감각능력의 증대는 다른 감각능력의 축소를 동반한다. 따라서 아이디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기계적 삶의 초현실성
다시 맥루한에게 돌아가 보면 "자동차는 인간을 연결하거나 분리시키는 모든 공간을 전면적으로 바꾸어놓았다."(p.261) 자동차를 발로 단 우리는 더 이상 감각에 의한 이런 느낌을 기대할 수 없게된 것이다. 가끔 다리(자동차)와 귀(휴대폰), 눈(TV), 팔(컴퓨터)을 떼고 육신(肉身)만으로 세상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확장된 육신이 초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처럼, 육신으로 느끼는 세계의 생소함이 초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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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신들의 걷는 모습을 모방하여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자 했을 때, 다리와는 전혀 다른 모양의 바퀴를 만들어 내었다. 이렇듯이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초현실적(超現實的)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아폴리네르, 「Surrealisme」, 월간 「Europe」, 1968년, 11~12월호, 임영방, 『현대미술의 이해』, 서울대학교 출판부,1993, p.177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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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리네르의 말을 빌어 말하면 인간의 확장은 사람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초현실적인 효과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바꾸면서 살아가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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