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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샨보이
아사다 지로 지음, 오근영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아사다 지로의 장편 <칼에 지다> <창궁의 묘성> 이전에 단편집들을 여러 권 먼저 보았다. 이 책 슈산보이도 작가의 단편집으로 반가운 책이다.
책소개를 보면 그동안 수많은 소설에서 남루한 현실 속, 사람의 따스함을 전해주었던 작가 아사다 지로가 또다시 감동적인 작품으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슈샨보이》는 7편의 아름다운 단편 모음으로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아픈 혹은 그리운 기억을 주제로 하고 있다.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잊지 못할 기억 한 가지씩은 있다. 그리운 기억은 꺼내놓고 조금씩 곱씹으며 추억하면 되지만 아픈 기억은 차마 잊지도 못하고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꽁꽁 묻어둔 채 아파할 뿐이다. 작가 아사다 지로는 《슈샨보이》를 통해 이 아픈 기억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려고 작정한 듯 싶다. 어린 시절 유곽으로 팔려온 창녀의 슬픈 인생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어쩔 수 없이 자식을 두고 도망쳐 나온 어머니의 애달픈 사연도, 슈샨보이 출신 사업가의 아픈 과거도, 시력 탓에 연인과 헤어진 맹인 안마사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아사다 지로는 넓은 마음과 따뜻한 손으로 감싸주고 있다. 이제 그만 잊어도 된다고, 이제 더는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고…….
인섹트는 가난한 살림에 어렵게 마련한 학비로 도쿄의 사립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시골 출신 사토루.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위사태로 ‘학교 폐쇄’가 되는 바람에 다방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1년을 어영부영 보내고 있다. 커피 한 잔에 거금 480엔을 내고 별로 예쁘지도 않은 여종업원을 보기 위해 다방을 드나드는 사람들, 비싼 등록금을 내고 공부 대신 시위를 하는 학생들, 물건을 사지 않으면 동전도 바꿔주지 않는 가게들……. 사토루에게 도쿄는 우울하고 삭막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방에서 윤기 나는 날개를 가진 낯선 곤충을 발견하고 어항에 넣어 키우기 시작한다. 도회적인 세련된 생김새와 날쌘 몸놀림, 때로는 날기도 하는 이 곤충은 사토루가 주는 채소 사료를 먹고 산란을 해서 어항 안을 가득 채운다. 나중에 그 곤충이 ‘바퀴벌레’이며 도시인들이 그 벌레를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싫어한다면 왜 그런지 이유라도 알고 싶다.
쓰키시마 모정은 1893년 뱀띠 해에 태어나 미노(巳)는 자신의 이름이 소나 말 같은 짐승 이름 같아 싫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요시와라(에도 시대의 유명한 공창 지대)에 팔려온 그녀는 갖은 고생 끝에 다유(창녀의 우두머리)의 자리까지 올라왔지만 미래가 없는 창녀 생활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어느 날 고마가다 일가의 부두목 도키지로라는 남자가 그녀를 낙적(몸값을 지불하고 유녀를 기적에서 빼내는 것-옮긴이)해주겠다는 소식을 듣는다. 돈을 주고 산 창녀를 잠자리에서도 다유라 부르며 살갑게 대하는 도키지로를 미노는 과분한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기뻐한다. 미노는 행복에 젖어 앞으로 도키지로와 신혼살림을 차릴 그의 고향 쓰키시마에 혼자 찾아가본다. 그런데 아름다운 섬 쓰키시마에서 그녀가 본 것은 도키지로에게 버림받은 아내와 아이들이다. 자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이 불행해졌다는 걸 안 미노는 도키지로가 가족들과 화목하게 살아주길 바라면서 먼 지방의 유곽으로 떠난다.
슈샨보이는 탄탄한 중견 기업 사장인 이치로는 슈샨보이라는 말의 마주이기도 하다. 슈샨보이가 경마에서 우승을 한 날 이치로는 우승 축하자리도 마다하고 철교 밑 구두닦이 노인을 찾아간다. 구두닦이 노인은 전쟁고아인 이치로를 여섯 살 때부터 키워준 사람이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구두닦이가 되겠다는 이치로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의지할 데라곤 너밖에 없다”고 했던 노인은 막상 이치로가 성공을 하고 모시러 오니 “나는 네 아버지가 아니다”라고 하며 한사코 거절한다.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 같은 노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열심히 일했던 이치로는 노인의 거절이 서운해 자신은 두 번이나 부모에게 버림을 받는 거냐고 매달리지만 노인은 그럼 두 번 잊으면 된다고만 한다. 어느 날 찾아간 철교 밑에 구두닦이 노인의 자리가 텅 비어 있다. 근처에 있던 노숙자가 전해준 노인의 편지에는 이치로에게 고맙다는 말이 쓰여 있다. 훌륭한 아이는 훌륭하게 자라는 게 당연하지만, 훌륭하지 않은 아이가 훌륭하게 되어 더 고맙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상보다 대통령보다 백배 훌륭하다고……. 이치로는 노인의 유언을 읽으며 그동안 마음속에서 늘 불러왔던 ‘아버지’를 외치며 절규한다.
제물은 하츠에의 이야기로 10년 동안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게 벌써 20년 전 일이고, 재혼을 해서 행복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녀에게 그 기억은 잊고 싶은, 잊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전남편의 부고를 듣는다. 백화점에서 최고급 와인을 사들고 행복의 거스름돈이라고 여기며 전남편의 빈소를 찾아간 그녀를 맞아준 사람은 처음 보는 아기 엄마뿐이다. 지난 일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 두려워 얼른 마음의 빗장을 다시 한번 굳게 걸어 잠그고 한시라도 빨리 빈소를 빠져나가려는 그녀에게 젊은 아기 엄마는 이곳에도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하츠에는 “잊으면 되지 않소”라며 청혼했던 남편의 말을 떠올리고는 다시 한번 과거의 기억을 지우며 집으로 향한다. 그때 그녀 옆을 지나던 트럭에서 한 젊은이가 내린다. 20년 동안 외면하고 잊으려 했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바로 그녀의 아들이다. 아들은 울지도 않고, 원망도 하지 않고 “잘 지내시는 거지요?”라고 묻기만 한다.
눈보라 속 장어구이는 제국주의 시대의 전쟁을 겪은 경륜 많고 과묵한 사단장은, 전우의 인육까지 뜯어먹는 전쟁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눈보라가 치는 날 찾아온 사관학교 동기생들과 외식을 마치고 한밤중에 경호병도 없이 장어구이 꾸러미를 들고 터덜터덜 돌아온 사단장은 술의 힘을 빌려 젊은 부하 군인에게 장어구이에 얽힌 가슴 아픈 사연을 털어놓는다. 작가는 이 하룻밤의 에피소드를 통해 전쟁의 비극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망향은 크리스마스 저녁, 어린시절 자신을 돌봐준 친척 할머니의 부음을 받은 독신 의사 마사코. 해부 실습으로 거식증에 걸려 의학도로서 한계를 느끼고 있는 제자 오타는 마사코를 따라가고 싶다고 부탁한다. 오타와 함께 장례식장을 찾은 마사코는 늘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할머니에 대한 감회와 함께 그동안 무심했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한다. 그런데 빈소에는 자살할 결심을 할머니 덕에 바꾸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택배원, 할머니에게 50년 넘게 기부를 받았다는 고아원의 수녀들, 할머니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폭주족 아이들이 몰려온다. 게다가 할머니는 마사코에게 자신의 시신을 기증한다는 유언까지 남겼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제자 오타는 자신도 할머니 시신 해부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마사코는 오타의 요청을 승낙하고 할머니에게 한없이 감사한다.
해후는 올해 50세인 도키에는 안마사다. 그녀는 유전이 원인이라는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잃고 부모에게도 버림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한 사랑의 기억이 하나 있다. 안과를 공부해 망막색소변성증의 치료법을 찾아내겠다며 청혼을 했던 의대생 에이치. 사회적인 편견 앞에서 병원장 아들인 에이치와의 결혼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도키에는 그와의 추억만을 간직한 채 온천 마을로 숨어든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에이치는 그녀가 일하는 곳에 전화를 걸어 의사 시험에 합격했다며 치료법을 찾아내 꼭 찾아가겠다고 약속한다. 도키에는 연인의 그 말에 살아갈 힘을 얻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