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편의점 (벚꽃 에디션) 불편한 편의점 1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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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파동 언덕 위에 있는 이 편의점에 나도 가보고 싶다. 마음 추운 요즘 세상에 마음 따뜻해지는 책이다. 지금의 청파동에도 오래된 일본식 건축물들이 아직 남아있는지 모르겠다.작가는 서울의 오래된 동네 청파동에 대한 공감각을 생생하게 포착해 또 하나의 흥미진진한 ‘동네 이야기’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서울역에서 노숙인 생활을 하던 독고라는 남자가 어느 날 70대 여성의 지갑을 찾아준 인연으로 그녀가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덩치가 곰 같은 이 사내는 알코올성 치매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데다 말도 어눌하고 행동도 굼떠 과연 손님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갖게 하는데 웬걸, 의외로 그는 일을 꽤 잘해낼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묘하게 사로잡으면서 편의점의 밤을 지키는 든든한 일꾼이 되어간다.


사람들이 기피하고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인물의 변신과 반전, 아이러니한 상황 전개는 이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염 여사의 편의점은 직원들 입장에서는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으며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이지만 주변에 편의점이 하나둘 생기면서 경쟁에서 밀리자 장사가 잘 되지 않는 상황에 봉착한다. 그러다 보니 동네 사람들에게 ‘불편한 편의점’으로 인식되는데, 이런 와중에 얼마 전까지 노숙자였던 ‘미련 곰탱이’ 같은 사내에게 야간 시간대를 맡긴다니 기존 직원들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그런데 걱정도 잠시, 그가 들어온 후 편의점에는 신선한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그는 물건을 슬쩍한 뒤 튀려는 불량학생이나 한밤중의 취객을 제법 잘 다루고, 일명 제이에스라 불리는 진상 손님까지 두 손 들고 나가 떨어지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편의점은 비싸다며 오지 않던 동네 노인들마저 독고의 싹싹한 태도에 마실 나오듯 편의점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오전 매출이 쑥 올라간다.


독고가 일으킨 변화의 바람은 동료들에게도 전해진다. 편의점 알바를 하며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시현은 신참 독고에게 매장 업무 교육을 해주다 그가 불쑥 건넨 말 한마디에 자신의 숨은 재능을 발견한다. 얼마 후 그녀는 다른 편의점에 스카우트된다. 아들과의 관계 단절로 속을 태우는 오 여사는 자신의 하소연을 귀담아 들어주고 아들과 소통할 방법을 넌지시 알려주는 독고에게 큰 감명을 받는다. 그런가 하면 어떤 손님은 독고의 눈빛과 접객 태도에서 영락없는 사장의 풍모를 추리해내기도 한다. 집과 회사 양쪽에서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는 세일즈맨 경만은 퇴근길 편의점에서 하는 혼술이 유일한 낙인데, 어느 날부터 편의점의 밤을 장악한 사내를 사장이라 지레짐작하여 못마땅한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그 역시 독고의 순수한 호의 앞에서 얼어붙은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고 만다.


독고 효과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염 여사로 하여금 독고를 쫓아내고 편의점을 팔게 하려던 민식은 그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엄마와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고, 민식의 사주로 독고의 뒷조사를 하던 곽 씨는 오히려 타깃인 독고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만다. 지친 상태로 대학로를 떠나와 마지막 글쓰기에 매달리는 희곡작가 인경은 서울역 홈리스였던 이상한 알바와 매일 밤 취재차 대화를 나누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용기를 되찾는다. 어쩌면 이곳 편의점에서는 손님이든 직원이든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과 영감을 주는 존재들인지 모른다. 애초에 염 여사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독고가 이를 받아들인 것도 살기 위한 마지막 본능에 가까웠고, 염 여사 역시 덕분에 편의점의 밤을 맡길 든든한 인재를 얻었으니 그들은 서로를 지켜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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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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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작가의 신작이라니 반갑다. 책속 글귀에 마음이 닿는다. 김연수 작가는 이전까지는 다작 작가로 알려졌는데 그간 어쩐 일인지 알 수 없는 일들로 인해 그의 작품들을 만날 기회가 드물었다. 그런 가운데서 나온 책은 그의 여섯번째 소설집이어서더욱 각별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의 여러 상황 속에서 변화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계속되는 환경 속에서 그는 소설 외에 다른 글쓰기에 몰두하며 그 시간을 신중하게 지나왔다고 한다.


그의 작품들이 삶을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름답고 서정적 언어로 설득해내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의 글읽기를 통해 새로운 삶의 단면들을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작을 여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세계의 끝과 사랑의 시작이 어떻게 함께 놓일 수 있는지 보여주며 ‘미래’를 키워드로 두 개의 이야기가 맞물려 진행된다.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금희 소설가는 평했다. 고독에도 명암이 있다면 그건 허공을 관통하는 한줄기 빛일 것이다. 무게가 없고 부피가 채워지지 않으며 소리도 없지만 현실을 “영원히 흔들리고 출렁”이게 할 하나의 실선. 이 소설집에서는 그런 고독이 두려움으로, 기억의 일렁임으로, 더 나아가 용기와 사랑의 힘으로 변화한다.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빛을 선택하기로” 한 사람들이 어린 사슴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걷고 있다. 누구나 김연수의 ‘얼굴’을 안다고 생각할 것이다. 정말 그럴까. 최근 한국사회가 맞닥뜨린 공동체적 불행과 패배에 대해, 김연수는 그만의 깊숙한 언더라인들을 새롭게 긋고 있다. 


이야기하기 위해 오늘의 수난을 견디는 최후의 바르바라처럼, 우리의 슬픔을 영원히 기억할 단 한 사람의 연인처럼. 문학평론가 박혜진 역시 평가했다. 유한한 육체의 시간 속에서 비관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김연수는 무한한 정신의 시간 속에서 낙관할 수 있는 “깊은 시간의 눈”에 대해 말한다. 깊은 시간의 눈 속에는 나에게 들어온 타인이 있고 나를 품은 타인이 있다. 나와 타인이 섞이며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은 인생의 행과 불행에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는 시간이다.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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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버린 여인들 - 實錄이 말하지 않은 이야기
손경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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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시대 테마사 중 여성 인물 이야기류에 해당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성종 연간(조선전기)의 기록에 등장하는 33명의 하층민 여성들이 연루된 사건과 그들의 삶을 재구성했다. 한 인물에 한 장을 할애해 총 33장으로 이뤄져 있으며 장의 중간 중간 당시의 시대상을 예리하게 짚어내는 <깊이읽기> 8꼭지를 삽입했다. 조선시대 여성사와 관련된 책들은 대개 왕비와 후궁을 다루는 ‘왕실 엿보기’와 일탈적 삶의 표상으로 분류되는 ‘기생 이야기’로 양분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런 두 흐름 뒤에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같은 현모양처 이야기들이 뒤따른다. 이런 책들의 공통점은 사회의 상층부에 위치한, 관련 기록이 풍부한 여성들을 다뤘다는 점이다.


반면 사회의 밑바닥에서 힘들게 살아간 여성들에 대한 책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계집종, 천첩, 무녀, 비구니 등으로 나뉘는 하층민 여성들의 일반적인 삶의 형태를 우리가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 개개인이 사회와 갈등하고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내밀한 개인사에 대한 지식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즉,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모두 한 번씩 왕의 입장에서, 양반의 입장에서, 그도 아니면 남성의 입장에서 역사를 생각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여성들에게조차 핍박받아야 했던 천한 여성의 자리에서 역사를 생각하고 조선시대를 느껴본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에는 기존 책들에 소개된 인물들도 간혹 있지만(4~5명) 대부분은 이 책을 통해 처음 그 존재가 알려지는 이들(20~21명)이다. 또한 조선시대 생활사나 야사류에서 지나치듯 언급된 여인들(7~8명)이 이 책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또한 잘 알려진 어을우동을 다루기보다는 그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동시대 기생 연경비를 다뤘고(9장), 세조 때 양성인간으로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사방지 대신 사방지에게 몸과 마음을 바친 여승 중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7장).

하층민 여성들이 실록에 등장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왕과 함께 의논해야 할 심각한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판관 3명에게 동시에 강간당한 무심無心(1장), 백주대낮 칼에 목 찔려 죽은 백이栢伊(2장), 꿈에 남자를 봤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고읍지古邑之(3장), 아들에게 간통 현장이 발각된 강덕姜德(24장), 아들에게 청부살인을 시킨 흔비欣非(15장), 배다른 남매를 결혼시키려 한 소근小斤(5장) 등 큼지막한 사건들 속에서 그녀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하지만 실록은 그녀들의 신상 정보에 대해 기본적인 것을 알려줄 뿐 깊이 들어가는 세세한 이야기를 다 들려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하층민 여성들의 역사가 제대로 다뤄지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관련 시대자료를 찾아보고 사건의 전후 과정을 세밀하게 추적하여 하층민 여성들의 삶과 내면세계를 유추하고 복원했다.


조선전기는 고려시대의 유산을 정리하고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세워나가던 시기였다. 고려의 종교인 불교는 유교로 대체되었고, 느슨한 신분관계는 엄격한 상하관계로 다시 조여졌다. 남편이 처가살이하던 관행은 며느리가 시댁살이하는 전통으로 역전되었다. 조선은 고려의 모든 유산에 불량품의 딱지를 붙이며 사회 정화의 기세를 올렸다. 그래야 왕조를 뒤엎은 역성혁명의 논리가 설 수 있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성리학적 논리의 사회적 관철 과정이다. 성리학이라는 것이 달리 말하면 일종의 금욕주의인데 이걸 너무 내세우다 보니 인간의 욕망 같은 것은 음지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뚜렷이 구분되었고, 공영역에서는 엄격한 윤리가 요구되었지만 사영역에서는 노비를 마음대로 두들겨 패거나, 종을 간음하고 재산을 빼앗아도 모르는 척 눈감아주는 일이 많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주로 조선 양반들과 하층민 여성들이 사적 영역에서 교환했던 관계, 때로는 참혹하기까지 한 일방적인 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엔 또한 조선시대 첩과 연루된 사건 사고도 소개된다. 조선시대에 첩은 필수불가결의 존재였다. 항간에는 본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할 때 첩을 들였다는 인식이 통용되고 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았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첩이 아들을 낳아도 친형제의 아들을 입양해 장자로 삼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첩은 양반들의 사랑과 성욕을 채워주는 존재라는 게 솔직한 판단이다. 집안끼리의 약속으로 혼인이 이뤄졌기 때문에 정을 못 붙인 부부가 많았고, 지방관 부임 시 옆이 허전하다는 등의 이유도 많았다. <배다른 남매를 결혼시키려 한 소근>은 종 출신으로 양반의 선택을 받은 천첩이다. 그래서 신분콤플렉스가 있었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자신의 전남편 사이에서 얻은 아들과 남편의 딸을 결혼시키려 했다. 사실, 자신의 아들이 딸을 임신시키자 이를 결혼으로 무마하려 했다는 게 정확한 말이다. 이것이 들통 나 세 사람은 모두 사형에 처해진다.


법보다는 인정과 힘의 논리가 지배한 조선. 조선시대 하층민 여성 33인이 보여주는 삶의 풍경은 자못 을씨년스럽다. 실록에 대대적으로 기록된 사건들이라고 해서 비일상적이고 예외적인 모습이라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저자는 실록의 사료가 남성-지배자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사료를 여성-피지배자의 입장에서 읽기 위해 노력했다. 한 사건을 놓고 조선시대 왕은 법을 존중했지만, 왕족(종실)의 사건이나 공신들이 저지른 죄상에 대해서는 법보다는 인정의 논리, 힘의 논리를 따랐다. 저자는 왕의 결정에 어떤 배후가 도사리고 있는지, 그 정치적인 인과관계를 면밀히 따져봄으로써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한 하층민 여성들의 삶을 객관화시키고자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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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샨보이
아사다 지로 지음, 오근영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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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다 지로의 장편 <칼에 지다> <창궁의 묘성> 이전에 단편집들을 여러 권 먼저 보았다. 이 책 슈산보이도 작가의 단편집으로 반가운 책이다. 




책소개를 보면 그동안 수많은 소설에서 남루한 현실 속, 사람의 따스함을 전해주었던 작가 아사다 지로가 또다시 감동적인 작품으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슈샨보이》는 7편의 아름다운 단편 모음으로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아픈 혹은 그리운 기억을 주제로 하고 있다.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잊지 못할 기억 한 가지씩은 있다. 그리운 기억은 꺼내놓고 조금씩 곱씹으며 추억하면 되지만 아픈 기억은 차마 잊지도 못하고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꽁꽁 묻어둔 채 아파할 뿐이다. 작가 아사다 지로는 《슈샨보이》를 통해 이 아픈 기억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려고 작정한 듯 싶다. 어린 시절 유곽으로 팔려온 창녀의 슬픈 인생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어쩔 수 없이 자식을 두고 도망쳐 나온 어머니의 애달픈 사연도, 슈샨보이 출신 사업가의 아픈 과거도, 시력 탓에 연인과 헤어진 맹인 안마사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아사다 지로는 넓은 마음과 따뜻한 손으로 감싸주고 있다. 이제 그만 잊어도 된다고, 이제 더는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고…….


인섹트는 가난한 살림에 어렵게 마련한 학비로 도쿄의 사립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시골 출신 사토루.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위사태로 ‘학교 폐쇄’가 되는 바람에 다방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1년을 어영부영 보내고 있다. 커피 한 잔에 거금 480엔을 내고 별로 예쁘지도 않은 여종업원을 보기 위해 다방을 드나드는 사람들, 비싼 등록금을 내고 공부 대신 시위를 하는 학생들, 물건을 사지 않으면 동전도 바꿔주지 않는 가게들……. 사토루에게 도쿄는 우울하고 삭막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방에서 윤기 나는 날개를 가진 낯선 곤충을 발견하고 어항에 넣어 키우기 시작한다. 도회적인 세련된 생김새와 날쌘 몸놀림, 때로는 날기도 하는 이 곤충은 사토루가 주는 채소 사료를 먹고 산란을 해서 어항 안을 가득 채운다. 나중에 그 곤충이 ‘바퀴벌레’이며 도시인들이 그 벌레를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싫어한다면 왜 그런지 이유라도 알고 싶다.


쓰키시마 모정은 1893년 뱀띠 해에 태어나 미노(巳)는 자신의 이름이 소나 말 같은 짐승 이름 같아 싫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요시와라(에도 시대의 유명한 공창 지대)에 팔려온 그녀는 갖은 고생 끝에 다유(창녀의 우두머리)의 자리까지 올라왔지만 미래가 없는 창녀 생활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어느 날 고마가다 일가의 부두목 도키지로라는 남자가 그녀를 낙적(몸값을 지불하고 유녀를 기적에서 빼내는 것-옮긴이)해주겠다는 소식을 듣는다. 돈을 주고 산 창녀를 잠자리에서도 다유라 부르며 살갑게 대하는 도키지로를 미노는 과분한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기뻐한다. 미노는 행복에 젖어 앞으로 도키지로와 신혼살림을 차릴 그의 고향 쓰키시마에 혼자 찾아가본다. 그런데 아름다운 섬 쓰키시마에서 그녀가 본 것은 도키지로에게 버림받은 아내와 아이들이다. 자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이 불행해졌다는 걸 안 미노는 도키지로가 가족들과 화목하게 살아주길 바라면서 먼 지방의 유곽으로 떠난다.


슈샨보이는 탄탄한 중견 기업 사장인 이치로는 슈샨보이라는 말의 마주이기도 하다. 슈샨보이가 경마에서 우승을 한 날 이치로는 우승 축하자리도 마다하고 철교 밑 구두닦이 노인을 찾아간다. 구두닦이 노인은 전쟁고아인 이치로를 여섯 살 때부터 키워준 사람이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구두닦이가 되겠다는 이치로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의지할 데라곤 너밖에 없다”고 했던 노인은 막상 이치로가 성공을 하고 모시러 오니 “나는 네 아버지가 아니다”라고 하며 한사코 거절한다.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 같은 노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열심히 일했던 이치로는 노인의 거절이 서운해 자신은 두 번이나 부모에게 버림을 받는 거냐고 매달리지만 노인은 그럼 두 번 잊으면 된다고만 한다. 어느 날 찾아간 철교 밑에 구두닦이 노인의 자리가 텅 비어 있다. 근처에 있던 노숙자가 전해준 노인의 편지에는 이치로에게 고맙다는 말이 쓰여 있다. 훌륭한 아이는 훌륭하게 자라는 게 당연하지만, 훌륭하지 않은 아이가 훌륭하게 되어 더 고맙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상보다 대통령보다 백배 훌륭하다고……. 이치로는 노인의 유언을 읽으며 그동안 마음속에서 늘 불러왔던 ‘아버지’를 외치며 절규한다.


제물은 하츠에의 이야기로 10년 동안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게 벌써 20년 전 일이고, 재혼을 해서 행복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녀에게 그 기억은 잊고 싶은, 잊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전남편의 부고를 듣는다. 백화점에서 최고급 와인을 사들고 행복의 거스름돈이라고 여기며 전남편의 빈소를 찾아간 그녀를 맞아준 사람은 처음 보는 아기 엄마뿐이다. 지난 일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 두려워 얼른 마음의 빗장을 다시 한번 굳게 걸어 잠그고 한시라도 빨리 빈소를 빠져나가려는 그녀에게 젊은 아기 엄마는 이곳에도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하츠에는 “잊으면 되지 않소”라며 청혼했던 남편의 말을 떠올리고는 다시 한번 과거의 기억을 지우며 집으로 향한다. 그때 그녀 옆을 지나던 트럭에서 한 젊은이가 내린다. 20년 동안 외면하고 잊으려 했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바로 그녀의 아들이다. 아들은 울지도 않고, 원망도 하지 않고 “잘 지내시는 거지요?”라고 묻기만 한다.


눈보라 속 장어구이는 제국주의 시대의 전쟁을 겪은 경륜 많고 과묵한 사단장은, 전우의 인육까지 뜯어먹는 전쟁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눈보라가 치는 날 찾아온 사관학교 동기생들과 외식을 마치고 한밤중에 경호병도 없이 장어구이 꾸러미를 들고 터덜터덜 돌아온 사단장은 술의 힘을 빌려 젊은 부하 군인에게 장어구이에 얽힌 가슴 아픈 사연을 털어놓는다. 작가는 이 하룻밤의 에피소드를 통해 전쟁의 비극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망향은 크리스마스 저녁, 어린시절 자신을 돌봐준 친척 할머니의 부음을 받은 독신 의사 마사코. 해부 실습으로 거식증에 걸려 의학도로서 한계를 느끼고 있는 제자 오타는 마사코를 따라가고 싶다고 부탁한다. 오타와 함께 장례식장을 찾은 마사코는 늘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할머니에 대한 감회와 함께 그동안 무심했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한다. 그런데 빈소에는 자살할 결심을 할머니 덕에 바꾸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택배원, 할머니에게 50년 넘게 기부를 받았다는 고아원의 수녀들, 할머니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폭주족 아이들이 몰려온다. 게다가 할머니는 마사코에게 자신의 시신을 기증한다는 유언까지 남겼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제자 오타는 자신도 할머니 시신 해부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마사코는 오타의 요청을 승낙하고 할머니에게 한없이 감사한다.


해후는 올해 50세인 도키에는 안마사다. 그녀는 유전이 원인이라는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잃고 부모에게도 버림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한 사랑의 기억이 하나 있다. 안과를 공부해 망막색소변성증의 치료법을 찾아내겠다며 청혼을 했던 의대생 에이치. 사회적인 편견 앞에서 병원장 아들인 에이치와의 결혼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도키에는 그와의 추억만을 간직한 채 온천 마을로 숨어든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에이치는 그녀가 일하는 곳에 전화를 걸어 의사 시험에 합격했다며 치료법을 찾아내 꼭 찾아가겠다고 약속한다. 도키에는 연인의 그 말에 살아갈 힘을 얻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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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지다 - 하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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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있는 아사다 지로의 뛰어난 작품이다. 한 가족의 아버지로서 가장의 책임감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느끼게 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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