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기쁨
아베 피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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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 하나를 떠올린다면 무엇이 있을까? ‘부조리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우리 사회는 지금 대단히 부조리하다. 게다가 앞으로도 더 커다란 부조리를 향해 가게 될 것만 같다.

세계 경제 대국 10위권의 나라인데 절반 이상의 노인들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해마다 쌓여가고 있는취업준비생들로 온 나라가 넘쳐난다. 대학생들과 취준생들 중에서 한 끼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식사권을 잃은 이들도 매우 많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대학등록금을 갚아나기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보지만 낮은 최저임금 때문에 턱도 없다.’ 우리의 가혹한 아르바이트 현장은 대부분 알바생들의 먹을 권리에 대해 무심하다고 한다. 대학생 중에는 친구가 먹고 난 식판을 받아들고 배식대로 가서 밥과 반찬을 받아먹는 이들도 있다. 아픈 부모나 조부모 밑에서 라면조차도 끼니로 때우지 못하는 아이들 또한 점점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 반대편에는 어마어마한 소비와 사치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몇 해 전 읽었던 피에르 신부님의 단순한 기쁨이렇게 부조리한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길을 보여주는 책이다.

피에르 신부님은 페루의 장관이었던 친구와 세계의 부조리에 대해 토론을 하곤 했다. 뛰어난 수학자이자 탐구자이기도 했던 그 친구는 어느 날 이런 말을 하며 대화를 끝냈다고 한다.

명철한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면 부조리와 신비 사이에서 양자택일할 도리밖에 없어.”

피에르 신부님도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강조된 부조리가 인간의 마음속을 지배하는 악을 일깨워준 건 인정한다. 하지만 신부님은 그 부조리가 결국은 인간을 절망으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피에르 신부님에게 곧잘 묻는 질문이 있었다. “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는 걸까요?” 인간의 본질을 파고드는 질문이다. 신부님의 대답은 간명하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이지요.”

그는 오직 인간만이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사랑은 자유를 가진 존재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 전체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 광대무변한 우주의 아주 작은 행성에 자유를 지닌 존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사랑하면서 죽을 수 있기때문에 우주보다 더 위대하다고 신부님은 주장한다.

피에르 신부님에게 하나님은 사랑 자체인 분이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신비의 영역에 속한다. 하나님이 그 사랑을 인간의 마음 속 빈자리에도 새겨놓으셨다는 믿음, 그 사랑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스스로 구원한다. 이것이 부조리가 아닌 신비를 선택하는 길이다.

피에르 신부님은 2차 대전 후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인 엠마우스를 세우셨다. 엠마우스는 현재 44개국의 350여개 단체로 확대되어 가난한 이들의 삶터가 돼주고 있다. 엠마우스가 생겨난 초기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아침에 벨기에 사제가 돌보고 있던 엠마우스로 경찰서장이 찾아왔다. 서장은 정신이상자 남편으로부터 도망친 아주머니와 네 명의 아이를 묵게 해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었다. 사제의 허락을 받고 5명의 가족이 엠마우스에 도착했다. 공동침실에서 자고 있던 노숙인들은 잠에서 깨야 했다. 그들은 가족의 딱한 사정을 듣고 깨끗한 시트로 침대를 정리한 뒤 아이들과 어머니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더니 복도에 서서 커피를 마시면서 떠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입 닥쳐. 소리 내지 말라구. 애들이 자고 있잖아!” 부랑자들의 가슴 속 빈자리에 하나님이 각인해 놓으신 사랑이 밖으로 출현한 것이다. 이보다 더 기적 같고 신비로운 일이 있을까.

예수님의 ‘8에 대한 피에르 신부님의 통찰은 매우 놀랍다. 예수님은 8복 중에서 첫 번째(“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와 마지막 복(“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을 현재형으로 말씀하셨다. 다른 복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자비를 입을 것이다등 미래형으로 표현하셨고. 신부님은 첫 번째 복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신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나눠주는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국가의 대통령이건, 회사의 사장이건, 노동조합의 책임자이건, 교사이건, 매일 저녁 나의 능력과 특권과 재능을 가지고 약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얼 했는가?’라고 자문하는 사람이다.”

또 여덟 번째 복은 순교자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한다. 세 사람이 있는데 그들 중 힘센 자가 가장 힘없는 자를 착취하려 할 때 나머지 한 사람이 네가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이 힘없는 사람을 아프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날 천국이 이미 이곳에 와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피에르 신부님은 인류의 빈곤과 실업, 부패, 차별로 사회를 위협하는 악에 맞서 가차 없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평화를 굳건히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 누구도 그것들과 무관치 않은 공범자이기 때문이다. 굶주린 아이들을 볼 때, 잠잘 곳 없는 가족들을 볼 때, 많은 젊은이들이 적당한 일자리를 찾을 희망이 없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모두 분개해야 하며, 그 분노가 일으키는 자발적 행동들이 평화를 이루어가는 길이라고 한다.

신부님은 길거리에 나앉은 열아홉 가족들을 위해 불법적인 주택을 짧은 시간에 지은 적이 있었다. 수도와 전기 설비 등 적법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채였다. 그 문제가 행정당국에 알려져 옛 친구였던 주택 장관으로부터 비난을 들어야 했다. 신부님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여보게, 자네가 이 가족들에게 적법하게 주거지를 제공할 수 없는 바에야, 저들을 구할 유일한 방법은 불법으로 이미 저질러놓은 상황에다 자네를 몰아넣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니 저들이 합법적인 처지가 되도록 자네 부서들과 힘을 합쳐 일을 해결해 보게나.”

피에르 신부님의 삶을 다시 읽으며 나는 부끄러웠다. ‘나는 어른으로서 살고 있지 못하구나라는 부끄러움이었다.

어른 없는 사회의 저자 우치다 타츠루는 한 사회체계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열 명 중에 두 명의 어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어른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길에 떨어져 있는 빈 깡통이나 유리조각을 보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면 아이다. 어른은 그럴 때 선뜻 깡통을 줍고, 주변에 쓰레기통이 없으면 자기 집으로 가져가 분리수거해서 재활용품 수거일에 내다 놓는 사람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일본 사회에 어른인 사람이 5% 정도밖에 없기에 심각한 위기 상태라고 진단한다. 우리 사회에는 얼마만큼의 어른이 있을까? 인간은 부조리한 현실과 하나님의 신비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우리는 둘 중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어른은 아무리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신비를 선택하는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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