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라이프
김사과 지음 / 창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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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 작가의 《하이라이프》를 읽었다. 2000년대 초반의 어린 허영심과 로망이 이렇게 진화했구나, 내 눈앞에 생생하게 보여준 김사과의 단편집.

▪️밑줄긋기

그녀는 다시 한비를 보았다. 깜--빡. 이제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한비가 보내는 유혹의 신호, 그 모호하게 열렬한, 자연스럽지만 필사적인, 그리하여 굉장히 그로테스크해지는 그녀의 구애가 다름 아닌 자신의 부모를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여 진실 또한 명확해졌다. 그녀가 청춘을 바쳐 선망한 신비한 생명체 한비의 창조자가 바로 그녀의 부모라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당연한 사실이 아닌가? 대체 그 진실의 어느 부분이 충격적일 수 있는가? 바로 그들이 한비를 낳아 기른 부모인 것이다. 그들이 수십년에 걸쳐 다듬고 깎아 완성한 자랑스러운 작품, 바로 그것이 한비인 것이다. _p.120

▪️김사과 작가가 프레시안에 제발트의 《토성의고리》에 대해 쓴 글을 보았다. '사과'라는 이름이 주는 과즙팡팡한 느낌과 정반대에 있는 글이 주는 경각심은 정말 강렬했다. (사실 글로 혼나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소설은 어떨까.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 《두 정원 이야기》《♡100479♡》는 연작이라고 해도 무방할 서사이다. 《예술가..》이수영이 알수없는 (사실은 너무 분명한) 분노를 쏟아내며 결국 《두 정원..》의 김은영이 되버린 것 같기도하고, 그 전에 이수영은 《1004 79》친구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던것 같다. 아, 이것은 리얼리티라고 밖에..

▪️아주 오래 전 읽었던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가 생각났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책장을 뒤져 다시 읽어보았다. 화자의 부잣집 친구, 혜미가 타고다닌 폭스바겐 비틀이 각주에 친절히 달려있다. 그것도 노란색 컬러 사진까지 덧붙여서. 이 소설은 그 컬러각주만큼이나 그때의 내 작고어린 허영과 헛짓에 파란약과 빨간약을 동시에 내보였던 것이다. 1972년생 정이현 작가가 2002년에 쓴 글이 1984년생 김사과 작가가 2020년에 쓴 글에서 내게 말하고 있었다. 어제는 지인들과 부동산경매 임장갈 계획을 세우고 34평 신축 아파트에는 건설사 하자보수 손해배상을 위한 법원 감정인이 다녀갔다. 그럴듯 해보이는 40대를 맞이하는것 같으나 나는 어디 말하기 부끄러워질만큼 여러 허들을 넘지 못했고, 이제는 친구,동기,선후배가 모두 변호사인데 나만 아니면 어떡하지, 내집단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이제 외집단이 되버리면 어떡하지 걱정하는... "너는... 이렇게 자랐구나" 말해주는 것 같은 소설들. 나는 책을 덮으며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지금 대체 어떻게 된거지?

▪️《두 정원 이야기》의 김은영은 적당히 평온을 택하고 《예술가와 보헤미안친구》의 이수영은 "이제 나는 어떡하냐고! 나는!나는!"이라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른다. 나는 늘 전자를 택해온 사람. 생애 어디에선가 이수영처럼 소리를 질렀어야했단 생각이 든다. 그래서 김사과의 생생한 화법에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진다. 이수영의 분노는 그래서 순수하고 용감하다. 나는 늘 그런 사람들을 좋아했지.

▪️세 작품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 마저도) 모두 '나'와 '친구'가 있다. 나는 '적당'하고 친구는 ( 내게 결핍된 것에 다른 말이 아닌) '특별한' 것이 있다. 더 물질적이고, 남자에 의존적이었던 허영은 김사과에 이르러 조금더 자존적이고 예술적이며 개인적이 된것인가. 왠지 더 지평은 넓어지고 고민은 복잡해진것 같다. ESG 에코 부자가 어디 쉬운가. 그래도 '나는 이런 고민중'이라며 그 어려운 것을 해내려는 욕망은 도시를 휩싼다. 이것은 다시 리얼리티라고 밖에...

▪️나는 어느 날은 이수영처럼 소리치고 싶고, 어느 날은 아파트 커뮤니티에서 커피 마시고 싶고, 어느 날은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싶고, 어느 날은 나인원한남 푸드코트에 가고 싶어질 것이다. 나는 이렇게 자랐구나. 이제 각성하고 어떻게 늙을것인지 생각하라. 이것은 리얼리티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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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너머 자유 - 분열의 시대, 합의는 가능한가 김영란 판결 시리즈
김영란 지음 / 창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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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입각해 우리나라 최근 전원합의체 판례를 분석해 본 책이다. 전작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가 저자 본인이 관여하신 전합판례 10가지에 대하여 소개하고 코멘트하신 책이라면 이 책에서는 그 이후 판결들을 롤스의 정의론 프레임으로 분석하고 해설하였다.

판례를 읽고 싶었는데 <정의론>이 나오니 시작이 좀 어려웠다. 그러나 이렇게도 판례를 살펴볼 수 있구나 싶어 좀 갬동이었다. 롤스의 이론을 도구로 한국 사회의 공적이성의 표본을 해석해보는 일. 멋지다!

▪️롤스는 '합당한 다원주의'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 '공적 이성'을 이용하여 '중첩적 합의'에 이르는 미국 사례들을 이야기하였다. 이에 저자는 분묘기지권과 제사주재권 관련 전합판례가 (핫하다 핫해!) '중첩적 합의'로 나아간 것을 밝혀낸다. 또 친생자추정에 대하여는 '공적이성'에 의한 중첩적 합의와 전통적 가치에 호소한 '비공적 이성'이 대립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법외노조에 대한 통보제도에 대해서는 롤스의 정의 원칙 가운데 제4단계 즉 법해석관점을 통해 이야기한다. 2부에 나오는 판례들은 기본적 자유들의 우선성을 접목하여 해설하고 계시지만 사실 양심의 자유, 소수자들의 기본권 판결들도 '공적이성'과 '중첩적합의 '합당한 다원주의' 등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 로스쿨에서도 다수의견만 배우기 일쑤이므로 일반 시민들이 반대의견과 별개의견들을 읽어볼 기회는 많이 드물것이다. 그러나 많은사람들이 판결전문을 읽을 때 뜨겁게 감동할 때가 있음을 경험해보면 좋겠다. 각자의 입장과 인식을 꼼꼼히 논쟁하고 다수의견과 반대의견은 촘촘히 싸운다. 별개의견의 디테일에는 장인정신이 느껴진다.

저자는 여기에 롤스의 정의론이 말하는 법원의 역할 프레임으로 그 꼼꼼하고 촘촘하고 디테일 폼 미친 판례들을 바라본다. 다수의견만 읽었을 때는 알지 못하는, 판결문만 단편적으로 볼 때 판단하지 못했던 합의의 과정들이 입체적으로 읽혀 더없이 풍부해진다. 좀 감동이다.

▪️ 롤스가 말하는 정의론의 '계약'을 다시 생각해본다.
1) '무지의 베일'을 쓰고 우리는 공동체의 규칙을 선택한다. 즉 나는 남자일지 여자일지, 가난할지, 부자일지, 힘이 셀지 약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규칙을 정한다.
2) 그럼으로써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이익이 돌아가는 '차등원칙'이 생기고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이 가능하다.
3) 정의원칙은 무지의 베일 속에서 정의 원칙이 채택되고 - 핵심적 헌법원칙들이 만들어지고 - 이 헌법원칙에 따른입법이 되며 - 궁극적으로 행정부과 사법부, 시민들에 의한 법규의 적용과 해석, 준수로 완성된다. 시민들은 '비공적 이성'으로 시민적 판단을 해도 되지만 법관은 오로지 '공적이성'을 통해서만 말하고 설득해야한다는, 그래서 법원은 한 사회의 '공적이성의 표본'이 될 수밖에 없다. 무거운 말이고 무서운 말이다.

▪️법이 대체 뭐하는 것인지 더듬거리는 로스쿨지망생들은 정의원칙 제4단계에서 사법부의 역할을 이해하면 좋을 것 같으므로 추천합니다. 내가 이렇게 암기대왕이 되려고 로스쿨에 왔나 싶은 재학생들에는 주요 전합판례들의 다수의견과 반대의견 별개의견을 설명해주시므로 추천합니다. (특히 명의신탁!) 그리고 나처럼 '나는 변호사가 될 자격이 있나'를 고민하는수험생들에게는 법은 중국어를 이해 못해도 규칙만 지키면 게임에서 지지 않는 '중국어방'이 아님을, 다원적 우리가 살아가는 바탕임을 상기시키기에 좋으므로 추천합니다.

#판결너머자유 #김영란 #창비 #책추천 #창비에서책을제공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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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믿음
헤르만 헤세 지음, 강민경 옮김 / 로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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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의 저자는 믿음을 무엇이라 말할까 궁금했다. 밑줄그은 문장들이 많았다.

- 나에게 삶은 이 세상의 양극 (일치하는 것과 일치에서 벗어나는 것) 사이를 오가는 것, 즉 이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기둥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이 세상의 축복받은 다양성이 얼마나 황홀한지 끊임없이 언급하고 싶고, 그 다양성의 근본에는 일치가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싶다. 아름다움과 추함, 밝음과 어두움, 성스러움과 죄악은 아주 잠시만 대립할 뿐 줄곧 서로 뒤섞이며 변화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싶다.
_p.42

- 내가 믿는 종교는 나중에 그 형태를 자주 바꾸었는데, 갑자기 개종한 듯 변한 것이 아니고, 서서히 성장하고 발전하듯이 변화했다. 나의 '싯다르타'는 깨달음이 아니라 사랑이 중심이었다. 싯타르타는 종교적 가르침을 거부하고 일치의 체험을 중점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이런 면을 그리스도교와 일맥상통한다고, 개신교 같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_p.104

- 젊은이들에게는 완전하게 질서가 잡히고 체계적인 종파에 속해 정해진 질서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바리사이처럼 보이겠지요. 저는 지식인이 지닌 생명력과 그리스도교가 지닌 최고의 생명력은 언제나 세상이 진부하게 변하는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갈망하는 '새로운'질서는 오래전부터 남아있는 질서라고 생각하며, 그 오래된 질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상징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면 오래된 질서가 생생한 힘을 다시 얻으리라 믿습니다. _p.180


헤르만 헤세는 자신이 시인이자 구도자이자 고백자로서 이 세상을 이해하도록 도와야한다고 했는데, '헤세 선생님! 저를 거둬주십시오!' 고백할 뻔 했다. 특히 <일치에 관하여>와 <단편신학>은 아름다운 문장들이었다. 몇 번을 곱씹어보았다.

작가는 인간을 현실적인 인간과 종교적인 인간으로 나눈다. 또 인간의 성숙단계를 1)순수의 단계 2)절망의 단계 3)구원의 단계로 나눈다.

종교적인 인간은 현실적인 인간을 '질투'하고 낙천적인 기쁨을 느껴버린 사람은 값싸게 절망을 뛰어넘으려는 유혹에 빠진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후퇴하는 일은 흔하다.

인도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아트만'. 산스크리트어로 '호흡' '숨'을 의미한다. 아트만=참된 나. 깊이 집중하여 숨을 들이쉬어 본다.

신약성서를 한마디로 하자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고 힌두교의 '타트 트밤 아시'는 '그가 바로 너이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헤르만헤세가 설명하는 공교로운 진리들의 향연이 위로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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