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12월 4주
참 너무 뻔하고도 흔히 하는 얘기라 굳이 말하기도 그렇지만, 그치만 딱 그게 어울리고 맞는 말이라 결국 또 이 표현을 쓸 수밖에 없겠다. 한국과 일본만큼 가깝고도 먼 관계의 나라가 또 있을까. 한반도에서 우리가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늘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얽혀 온 동아시아의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인 바다 건너 섬의 그네들. 좋든 싫든 가장 가까이에서 부대끼다 보면 좋은 우정을 나눌 수도 있지만 못된 짓 한번에도 더 크게 상처를 주고 받을 수도 있다. 평화로운 지구촌 글로벌 월드 시대에 한국과 일본은 동아시아의 동반자로서 우정을 나누고자 하면서도, 제대로 된 사과와 화해의 과정이 없이 과거를 덮어버린 탓에 항상 그 우정 뒤에는 아물지 않은 상처와 분노가 남아있다. 이런 두 나라가 함께 만들었고, 이런 두 나라의 친구이자 적으로서의 관계가 엿보이는 영화들을 최근의 <마이웨이>를 보면서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마이웨이>
감독 : 강제규
주연 : 장동건, 오다기리 죠
일본이 한국에 지금까지도 씻기지 않은 고통을 남긴, '증오'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 시기인 1930-40년대 2차대전 시기. 한일 양국 사이에 '우정' 따위를 절대 말할 수 없을 이 시기의 한국과 일본의 우정관계에 대해 '전쟁 속의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정면돌파하는 영화이다. 원래 이 영화는 '노르망디 코리안'이라는 실화에서 출발한다. 노르망디에서 독일 군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이 포로로 잡혀있는 사진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를 sbs에서 다큐멘터리로 취재하면서, 일본에 징집되어 독일에서 러시아에서 전쟁속에 직접적으로 내던져졌던 이들의 가슴아픈 이야기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도 모자라 그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으라고 강제로 내몰린 청년의 슬픈 이야기에, <마이웨이>는 대담하게도 일본인과의 불가능할 것 같은 우정의 이야기를 더한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 앞에서 한 조선인 청년과 일본인 청년은 나라 대 나라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 영화는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아니라 좁게는 개인 대 개인으로서의 우정, 또 더 크게는 전쟁의 비극성 대 인간애의 휴머니즘이라는 구도에만 집중하려 한다.
이미 강제규 감독은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남북한의 관계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한 형제의 형제애'로 극히 축소하여 관객들의 보편적인 감정을 울리는 데에만 주력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똑같은 방식을 적용시키는것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단 한번도 형제였던 적이 없는' 두 나라의 관계를 너무나 쉽고 단순하게만 치환시킨 게 아닌가 싶다. 강제규 식의 일직선적인 서사와 감동코드는 블록버스터급 전쟁 휴머니즘 영화에는 어울리지만, 그 주인공이 한국과 일본처럼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지닌 복잡한 관계에 있을 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 주인공들의 뒤에 있어야 할 역사적인 아픔과 잊어서는 안될 큰 진실의 무게가 보다 크기 때문에.
* <마이웨이>의 영화로서의 최대 미덕은, 한국도 <라이언일병 구하기> 못지 않게 대작 전쟁영화를 수준급으로 만들 실력이 된다는 자부심.
한국과 일본의 최고 꽃미남 장동건과 오다기리 죠를 한자리에 모아 진한 사나이 우정을 그려낸다는 점은 관심을 끌어모으지만... 차라리 노르망디 코리안 같은 소재가 아니라 그냥 보다 편하게 볼 수 있는 소재였으면 좋았을 것 같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
감독 : 이시명
주연 : 장동건, 나카무라 토오루
<마이웨이>랑 비교해서 보면 재미있는 이 영화. 장동건은 <마이웨이> 전에 이미 일본배우와 함께 <마이웨이>처럼 한일관계의 친구이자 적인 애매한 사이를 파고든 영화를 찍은 적이 있었다. 2002년에 개봉한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이다. 당시로서는 근미래인 2009년, 동아시아 일대는 '일본제국'이라는 이름 하에 '대동아 공영권'으로 재 통합된지 100년이 되었고 이제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어진지 오래라는 나름 파격적인 설정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한국인의 핏줄이지만 '사카모토 마사유키'란 이름의 일본인으로 자란 주인공은, 반정부 레지스탕스 '후레이센진'을 때려잡는 경찰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연히 의구심을 품고 후레이센진들을 조사하다 점점 그들과 휘말리면서, 사카모토는 일본의 숨겨진 거대한 음모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역사적 사명감을 깨닫게 된다. 한마디로 <마이웨이>가 한일의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살짝 미뤄두고 휴머니즘으로 눈물을 호소한다면,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아닌 척 하다가 역사를 앞으로 꺼내들며 한국인으로서의 애국심과 자긍심에 눈물을 호소하는 셈이다. 완벽한 일본인로서 자랐지만 결국 그는 스스로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에게도 '한국인'이었고, 누구보다 절친했던 일본인 친구는 서로의 정체성 앞에서 적이 되고 만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역시 역시 소재와 발상은 매우 참신했는데, 그 재미를 이야기 끝까지 제대로 살리지는 못해서 아쉬운 영화이다. 과감하게 시도한 파격적인 한일관계 설정의 가상 미래를 어떻게 극복(?)할까 싶었는데 다소 황당무계한 SF로 휘리릭 뛰어넘어가 버린 점도 그렇고,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어디서 본 듯한 뻔한 전개와 장면으로만 가는 간 점도 그렇고...
* <마이웨이>에서도 장동건 보다 오다기리 죠가 돋보였었는데, 이 영화에서도 개인적으로는 장동건보다 나카무라 토오루가 더 매력이 있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별로가 되긴 하지만-_-;) 장동건은 너무 정석적인 느낌이 있어서 그런지, 잘 생기긴 했는데 주로 매력적으로 끌리진 않는 캐릭터들을 하는 듯.
<역도산>
감독 : 송해성
주연 : 설경구, 나카타니 미키
이번에는 위의 두 영화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영화이다. 한국 출신이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일본인으로서 최고의 프로레슬러의 자리에 등극한 '역도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역도산>. 본명은 김신락. 그는 1939년인가 40년, 그러니까 한창 일제강점기 시절에 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수많은 조선인들 중 하나였다. 스모 도장에 들어갔지만 늘 조선인으로서의 차별과 무시를 당했던 그는 울분을 삼키며 살아남기 위한 칼을 간다. 결국 일본 국적을 얻고 프로레슬러가 된 그는 가라데 촙으로 미국 프로레슬러들을 때려눕히며 1950년대 패전국으로서 실의에 차 있던 일본인들에게 환희를 선사하고 영웅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말년까지 결코 행복하게 영웅으로서만 살았던 건 아니다. 한국인이면서 일본의 영웅이 된 남자,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일본에서 외로웠을 남자. 영화 속의 역도산에게 한국은 고향이되 어머니도 없는 돌아갈 데 없는 곳이자 그를 지켜주지도 못하는 곳이고, 일본은 냉정하게 그를 이방인으로 밀어내는 살벌한 곳인 동시에 그를 사랑해주는 새로운 가족이 있고 그가 유일하게 영웅이 될 수도 있는 곳이기도 했다. <마이웨이>가 한국과 일본의 특수한 관계를 넘어서 양국 모두가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는 이야기를 보여주려고 애썼지만, 만들어진 듯한 그 이야기 보다도 시대의 비극 속에 발버둥쳐야 했던 '역도산'이라는 한 인물이 어쩌면 한일 두 나라의 사이의 어려운 관계를 더 진실되고 진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다.
* 한일합작 영화들에서 일본 배우들과 일본어로 연기를 하다 보면 아무래도 한국 배우들은 어색해지기 마련. 하지만 그 통념을 완전히 뒤엎었던 배우가 바로 설경구이다. 심지어 일본어를 전혀 몰랐다는데도...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은 연기력으로 어색한 언어마저 자연스럽게 들리게 만들어버리더라는... 또 너무나도 단아하던 나카타니 미키는 물론이고 후지 타츠야 등 무직하게 설경구와 무게중심을 잡아주던 일본 중견배우들의 호연도 돋보이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