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불평등 - 21세기문화총서 9
허버트 실러 지음, 김동춘 옮김 / 민음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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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사회.’ 이 용어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앨빈 토플러가 ‘제 3 의 물결’이라고 명명한 새로운 시대에는 인터넷 등의 뛰어난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정보가 우리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리라는 식의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을 정도이다. 꿈의 속도로 미래를 향해 가는 길이 열린 것 같은 이 21세기에 과연 어떤 장애물이나 문제점은 존재하기나 할 수 있을까?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선각자는 하나의 개념으로 수많은 사례들을 설명해내고, 다양한 분야에서 일관된 하나의 관점을 찾아낼 수 있게 하는 특징이 있다. 허버트 쉴러는 이 정보화사회에 대해 ‘정보불평등’이란 하나의 개념으로 맥락에 충실한 현실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도록 정리해냈다. ‘제 3의 물결’, ‘정보화사회’라는 말과 동시에 떠올리게 되는 장밋빛 희망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 희망은 정말로 장밋빛인가?

허버트 쉴러의 통찰력으로 그 희망을 파헤쳐보면 있지도 않은 허상에 감추어져 버린 현실이 직시하게 된다. 바로 그 현실이란 힘있고, 권력을 가진 어떤 소수의 어떤 집단이 모든 것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것을 명제이다. 여기서 모든 것이라 함은 정말로 모든 것이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상업화된 것, 자본이 사용되는 모든 상업화된 것, 광고하게 되는 모든 상업화된 것은 소수의 초거대 기업이라는 세력의 뜻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범주들은 점점 더 찾아보기 힘들어 지고 있다.

이것은 미래를 부정적으로 다룬 공상과학영화에 흔히 보여지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섬뜩한 묘사는 미디어를 연구하고 있는 사회과학자에 의해 고발되는 현재의 모습이기도 했다. 허황된 음모론같이 보이는 이러한 시각은 어떻게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그러한 지배가 사람들 모르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허버트 쉴러의 연구는 미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라고 칭하기 보다는 ‘미국인들’, ‘사람들’이라고 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변방중의 변방인 대한민국, 포항이라는 작은 도시의 변두리인 남송리 3번지에 사는 한동대학생인 나에게 이것은 묘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위기는 정말로 나와 연관이 있는 것인가? 미국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허버트 쉴러가 지적한 것처럼 초거대 기업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그러한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은 우려한다면 전지구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 두는 것도 온당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모든 부분이 해체되어 돈으로 해결되는 거래가 되어버리려고 하는 우리의 현실은 허버트 쉴러의 탁월한 통찰에 여전히 적용된다.

정보화사회에서 자유는 힘있는 자들의 자유이다. 즉, 기업만을 위한 자유다. 정보화 사회로 인한 희망이란 극소수를 위한 희망일 뿐이다. 갈등은 사라지지 않았다. 갈등은 기술의 발전으로 전혀 없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심각해진다. 그러나 특이한 상황은 정보가 중요해지는 시대에 기업의 자유가 만인을 위한 자유처럼 포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들이 사회구성원 모두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 ‘문화’라는 이름은 문화산업을 소유하고 있는 특수한 사람들의 교묘한 설득작전인 것이다. 따라서 이 희망은 결국 절망이다.

장밋빛을 약속했던 새로운 미디어는 기업의 소유가 되었다. 결국 이것 또한 광고의 수단이 되어버릴 것임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사회적 자원, 공공의 권리들이 개인화된 기업들에게 판매되고 있다. 사회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정부의 권한과 권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헌법조차도 기업들을 보호하고 있다. 비단 이러한 상황은 미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점점 후기 산업화 되어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될 것이라는 경고를 이 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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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 개정판, 원문 영어 번역문 수록 현암사 동양고전
노자 지음, 오강남 풀어 엮음 / 현암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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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은 당시 주류의 사상에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흐름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환경오염, 인위적이고 상업적인 자본의 횡포, 빈부의 차 현재의 많은 문제점들의 원인들도 지적해줄 수 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환기를 할 뿐이지 현실적으로 전복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도덕경에서 나타나 있듯이 도, 무위는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애쓰지 않지만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나는 도덕경의 사상이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점 보다는 새로운 사유체계를 이루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었다.

도와 덕에 관한 경전은 말중심의 사유체계에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도에 대한 정의는 그 서술하는 즉시 한계에 봉착하게 되며, 따라서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라는 진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서 로고스 중심주의적 사유체계는 적절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유체계로 도를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도는 오히려 언어 중심의 사유체계를 뛰어넘는 이미지 중심의 사유체계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지도 또한 개념적 또는 추상적인 의미 규정과는 달리 대상을 구체적으로 감각적으로 재현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정의할 때에 우리는 논리적 사유방식, 즉 로고스 중심주의적 사고로 이미지의 하나의 측면만을 말하겠다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지는 규정이나 논리에서 벗어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붙잡아야 하며, 이미지에 대해 정의 내리는 주체에 따라 그 의미가 다양하게 변하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미지를 로고스 중심적인 사유체계로 정의하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은 도를 정의할 때 가지는 어려움과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특히 이미지는 명백하게 현존하는 인식이나 사물의 재현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히 부재하는 것의 표현도 아니다 . 몽젱은 “이미지는 절대 존재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또한 비존재와도 아무 관련이 없다. 이미지는 현존하지 않는 절대 존재의 독특한 표현 양태이다. 이미지는, 부재와 현존을 맺어준다. 게다가 이미지는 우리에게 이 부재를 현존케 하고, 그 부재의 현존을 하나의 기호관계로 뚜렷하게 해준다.”고 했다.

인간이 현재 세상에서 그 무언가 결핍을 느끼고 그 무언가를 표현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의 이미지인 것이며, 인간은 언제나 결핍을 느끼는 존재하는 의미에서 언제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노자가 도덕경을 통해서 도와 덕에 대해서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했다면, 그것은 단지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에 대한 이미지의 공유일 것이다. 도에 대해서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에서 전달될 수 있다는 점. 이것은 이미지 중심의 사유체계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접합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지는 그것이 관련되는 모든 영역(실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이지만) 즉 논리, 미학, 윤리, 교육, 정치, 형이상학, 예술, 철학에서 하나의 근본토대를 차지하고 있다 .

이미지와 상상력이 서구의 합리주의내에서 경시 받아오다가 이제서야 인류의 공통분모로 그 위상이 올라가고 있다 . 도의 성격, 즉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말로 표현할 때는 어렵지만 상상력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신비함은 언어 중심주의가 아니라 이미지 중심주의라는 대안적인 새로운 사유체계와 닮은 점이 많으며 이렇게 이미지중심주의로 전환하며 이해할 때, 그 본래적인 진의가 전달될 수 있어 보인다. 또한 그 동안 주류에서 외면되어 왔던 인류의 공통분모인 이미지와 상상력의 의미를 도라는 궁극의 진리로 극대화 시켜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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