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절제 사회 - 유혹 과잉 시대 어떻게 욕망에 대항할 것인가
대니얼 액스트 지음, 구계원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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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혹이란 내가 나의 욕망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을 만큼의 크기일 때(혹은 그렇게 믿고 있을 때)는

탐스럽고 매혹적이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걷잡을 수 없을 지경으로 거대해져 그 무게에 짓눌리게

되면, 그때는 저 붉은 빛이 매력이 아니라 공포가 된다.

 

가까운 예를 들자면 내가 이 책의 리뷰어가 되겠다고 자청했을 때 유혹의 열매는

그저 달콤해 보이기만 했다.

출판사가 내건 조건들은 충분히 가능해 보였고, 책에서 발췌한 유혹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몇몇 사례들이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사례 1: 잠자리를 함께해서는 안 되는 남자와 데이트하러 갈 때는

일부러 후줄근한 속옷을 입었던 여자)

그러나, 리뷰 마감 시한을 며칠 앞두고 시간에 쫓기는 입장이 되자 담당자의 문자 메시지 알림은

통상적인 것들조차도 가슴을 철렁철렁하게 만들었다. ㅋㅋㅋ

 

자기 절제의 문제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

이 책에 있다.

 

"자명종 시계의 문제점은 자명종을 맞출 때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 그것이 울릴 때는 말도 안 되게 보인다는 것이다."

- 렉스 스타우트,  '로데오 살인' 중에서 - (p.242)

 

그럼, 자기 절제란 뭐지?

저자인 대니얼 액스트에 따르면... 이렇다.

의식적인 개입 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여러 가지 욕망과 열망을 1차적 욕구라고 하고,

그 외에 우리가 실제로 선호하는 다른 중요한 욕구를 2차적 욕구라 부르기로 했을 때,

자기 절제는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어떤 것인지 판단한 다음,

보다 마음이 덜 끌리는 욕구의 도전에 대항하여 선호하는 욕구를 고수하는 것, 을 의미한다.

(p. 28 참조)

그러니까... 무조건 자신의 욕망을 희생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비전과 더불어

더 큰 만족감을 위해 코 앞의 사소한 만족감을 잠시 뒤로 미루는 것이 자기 절제라고 할 수 있겠다.

담배를 끊어서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 다이어트와 운동을 통해 비만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

순간의 쾌락을 위해 도박에 빠지지는 않는 것, 등등...

 

 

이 책을 읽어야겠다 마음 먹자 책장을 열기도 전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나를 가장 괴롭히는 유혹은 무엇인가. 내가 가장 빈번히 자기 통제에 실패하는 문제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몇 가지 항목들을 실제로 기록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새로운 점들이 발견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우리 사회와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기 절제의 실패로

심각하게 고통받고 있다는 것.

저자는 그것을 '유혹의 민주화'라는 단어로 설명하였다.

옛날에는 각자가 속한 집단이나 종교, 국가가 도덕이나 윤리, 규율이라는 형태로 상당 부분

그 짐을 덜어 주었는데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와 인터넷, 통신의 발달 등으로 유혹은 도처에 있는 반면 

절제는 전적으로 개개인의 의지에만 의존하다 보니 과부하가 걸린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살짝 위안이 되기도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

 

또 한 가지는, 처음 생각했던 몇 가지 말고 내가 가지고 있는 진짜 심각한 

자기 절제의 실패 케이스를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심지어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무의식적으로 감추고 있었던 어떤 성향이었다. 쩝.

 

자기 절제가 필요한 부분은 일상 생활에 걸쳐 광범위하게 적용되는데,

나의 경우는 책을 읽으면서 내가 미리 리스트 업 해 놓은 것 중에 심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 경중을 따져서 구분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진실로 병적인 것과 미래를 위한 혹은 나 자신을 위한 재투자에 해당하는 것과

단순히 소모되고 소비되고 마는 것의 구분도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나 스스로 드러내어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숨은 일인치,

그러나 그 부정적인 영향력은 궁극의 빙산이었던 '그것'을 찾아 자각하는 일,

그것도 꽤나 유의미한 작업이었다.

 

자기 절제가 필요한 것 중 대표적인 하나인 '미루기'를 이 책에서 배운 방법들을 통해

실천해 보았다. 설명해 보자.

 

리뷰를 쓰기 위해선 책을 통독해야 하는데, 문학작품이 아닌 404쪽짜리는 거의 처음이고,

일정도 처음 계획과 달라져서 난관에 부딪혔다. 

생각보다 마지막에서 진도를 뽑는 게 수월치 않았다.

그러다 마감 시한이 사흘 앞으로 다가오자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1. 환경을 바꾼다.

 

2. 자기 절제에 치명적인 '외로움'을 제거하고,

   동병상련의 동지들을 '임의의 친구'로 삼기 위해 도서관을 선택한다.

 

3. 침대(잠)라는 유혹, 인터넷이라는 유혹, 음식과 음악이라는 유혹을 제거하여

   집중력을 방해하는 모든 유혹으로부터 '사전 예방 조치'를 취한다.

 

4. 만족의 지연

   오늘 이 자리에서 책을 다 읽고 가야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다.

   배고파도 참아야지.. (눈물..)

 

5. 보상

   열심히 읽고 리뷰를 쓰면 뿌듯한 내가 될 수 있지!!

   숙제를 끝낸 행복감을 위해.. 참자... (눈물...)

 

5. 울랄라~~ 집에서 그리고 이동 중에 짬짬이 읽느라 열흘 넘게 걸리던 분량이

   불과 다섯 시간만에 끝났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것은 리뷰 미션을 기한 내에 완수하지 못했을 때의 수치심을 상상하자,

이것이 한없이 게을러질 수 있었던 혹은 이런 저런 유혹에 질 수 있었던 내게 자기 통제력을

갖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결심 머그를 받을 수도 있다는 불확실한 보상이 아니라,

미션 실패라는 훨씬 현실적인 두려움이 더 강력했다.

 

 

 

 

그렇다면 자기 절제가 정말 의지만의 문제일까?

 

저자는 이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정말 엄청난 자료조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 정치, 심리학, 정신분석학, 경제학, 신경과학, 문학, 고전, 영화, TV 애니메이션 등등

각 분야의 다양한 예제들을 통해서 흥미롭게 분석하고 설명하고 있다. 

진정 '절제'가 필요했던 건 자료에 대한 그의 욕심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방대한 분량의 데이터들이 눈을 핑핑 돌게 한다.

 

미국 작가인 만큼 미국의 정치, 경제에 대한 설명이 많아서 그 부분은 내겐 조금 지루했지만

그 외에 다양한 심리학 실험과 여러 작가들의 문학 작품에서 인용된 내용들은 어찌나 적절한지 

곧잘 웃음을 빵빵 터뜨리게 만들었다.

특히 성과라면, 플라톤의 <향연>과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급상승했다는 것!!!

세이렌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고향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 뱃전에

자신을 묶어 달라 했다는 오디세우스는

이 책에서 자기 절제에 있어서 사전 예방 조치의 전범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재능은 쾌락에 빠져들 때와 그러지 말아야 할 때를 판단하는 능력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디세우스는 일종의 이상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 현재나 미래의 고통을 피할 수 있을 때마다, 혹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때마다,

오디세우스의 자제력은 부족함이 없었다."

한 19세기 비평가는 약간의 과장을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오디세우스는 결코 자신의 욕구나 열정을

충족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p. 122)

 

그러니까 우리의 오디세우스는 자기 절제가 결코 부처님 가운데토막처럼 되라는 얘기가

아니라는 걸 몸소 입증하고 계신 거다.

즐길 건 즐기고 삼갈 것은 삼갈 것, 진정 타이밍의 귀제라 아니할 수 없도다!!!!

 

다시 아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자기 절제가 정말 의지만의 문제일까?

 

최근에는 뇌의 전두엽과 관련된 연구도 활발하고, 유전의 문제도 논의되고 있고,

뇌의 종양처럼 병적으로 뚜렷한 원인들이 자기 절제를 방해하고 분노나 충동성, 공격성을

촉발하여 범죄가 일어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보고 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을 역 이용하여 모든 잘못을 '무슨 무슨 증후군' 탓으로 돌리는 어처구니 없는

변명도 통하는 세상이 되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법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내가, 혹은 당신이 겪고 있는 자기 절제에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들이 당장 해결되지는 않는다.

몸무게를 고통 없이 금방 감량할 수 있다던가, 불필요한 낭비를 줄여 부자가 되는 획기적인

방법을 알게 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가 가진 문제와 그 해결의 단초를 명확하게 직시할 수 있는 계기를 주는 처방전일 뿐이다.

처방전을 약으로 바꾸고, 시간에 맞춰 꾸준히 복용하는 것은 앞으로 우리의 몫이다.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것이 여럿 있었지만,

절제의 미덕을 발휘해 딱 두 가지만 여기 소개하자면...

'습관' 그리고 '만족의 지연' 이라는 개념이었다.

 

요즘은 프로이트 덕분에 사람들이 아는 게 많아져서

자신의 부적절한 습관에 이런 저런 핑계를 대기 쉽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그 습관을 차곡 차곡 쌓아온 사람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일정 부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햄릿의 대사를 인용한 이 부분이 내겐 매우 의미심장했다.

 

오늘 밤만 참아 보시지요.

그러면 다음번에는 참기가 좀 더 쉬워지고,

그다음에는 더더욱 수월해진답니다.

습관이란 타고난 천성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녔기에

악마를 굴복시키거나 몰아내 버리지요.

(-p.133)

 

 

만족의 지연,

이것은 지금 당장 욕구를 충족시키기 보다는

보다 먼 미래의 만족을 위해 현재의 만족을 보류하는 것을 말한다.

흔한 예로, 몇 년 후의 내집 마련을 위해 지금 당장의 외식도, 새 옷도, 여행도, 자제하고

저축을 하는 것을 들 수 있겠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얼마만한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 문제에 상상력과 비전이 개입한다고 보았다.

상상력과 비전이 부재하는 사람은 즉각적인 보상과 단기적인 욕구의 충족에만 매달려

인생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약이나 알콜, 도박 중독자들처럼..

 

만족을 지연하는 지혜도 필요하지만 또한 너무 지나친 지혜도 어리석다고 한다.

그래서 몽테뉴는 지혜에도 자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속된 말로 어차피 썩어 문드러질 육신...  엥?

농담이고... 귀한 초콜릿을 선물 받아 안 먹고 아끼고 아끼다 결국 썩어서 버린 경험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돈 마퀴나스라는 한 칼럼니스트의 일화는 웃음이 빵 터지게 했다.

그는 한 달간 금주한 끝에 술집으로 달려가 이렇게 외쳤단다.

"나는 내 망할 의지력을 정복했소. 스카치 더블 한 잔 주시오!!"

 

하하.

 

만족의 지연, 에 관해서는 참 오만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나의 인생을 바꿀 만한 결정, 혹은 나를 극한의 갈등 상황에 이르게 한 선택에 있어서

결정적 키워드는 늘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기도 하면서 또한 대단히 합리적인 방식이기도 했다. 

양날의 칼처럼...

그런 절박함은 내 심장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알려주기에 

혼란 속에서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도와준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실수는 있었을지언정 후회는 부르지 않았다.

대부분은...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한 번 더 멈칫하게 된다.

다시 그런 선택의 상황에 서게 된다면 그땐 섣불리 저 카드를 빼들 수는 없을 것 같다.

 

하~ 뭐든 중용이 어렵구나. ;;;

 

 

워낙 풍성한 소재를 다루고 있고 공감 가는 주제에 관한 책이어서 말이 한없이 길어졌지만

결론적으로, 이리저리 춤추고 구르는 욕망과 유혹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이 책은 우리가 처한 환경을 돌아보는 시발점으로 보면 좋겠다.

세상의 유혹에 무지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지 말고 적을 파악하자는 것!

 

이제 더 세세하고 날카롭고 흥미진진한 발견은 통찰력 있는 여러분 각자의 독서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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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들의 전략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최성현 옮김, 미카미 오사무 그림 / 도솔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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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는 지구의 건강에 긴급 사태가 생기면 달려가 처리하는 식물계의 적십자다.

다행히 지구가 위급한 상황을 넘기면 잡초는

성장 속도는 자기보다 느리지만 보다 크고 튼튼하게 자라는 나무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 알프레드 크로스비

 

잡초는 가이아의 백혈구이자 부스럼 딱지이고 반창고이자 항생 물질이다.

- 짐 놀먼

 

인간이 상처를 내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것이 잡초다.

살아 있는 지구는 잡초에 의해 아름다워지고, 인류에 의해 황폐해지고 있다.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야말로 잡초다.

작물에 사로잡혀, 혹은 인간 중심주의에 빠져 인간은 잡초의 이런 면을 보지 못하고 있다.

 

- 옮긴이 '최성현'의 글에서 발췌

 

 

 

입춘이다.

이제 곧 굳게 닫혔던 땅이 열리고 나뭇가지가 눈을 틔우면서 기특한 연둣빛이 세상을 물들이리라.

혹한을 견디느라 웅크리고 있던 식물들이 기지개를 켜는 봄이 오면 또 한번 우리는 기쁨과 함께

다시 피어나지 못할 우리의 지난 봄들을 아쉬워하리라.

 

나는 동물의 고통보다는 식물의 고통에 더 쉬이 마음 주는 심장을 가졌다.

길고양이의 로드킬보다도 가로수의 무참히 잘린 어깨에 더 분노하는 심장이다.

식물성이다, 라는 생각에는 동물성이다, 라는 생각과는 대조되는 각별한 편견이 있다.

수동적이고 순응적이고 내성적이고 온순하고 정적이고 신뢰할 만하고 연약하고 정직하고 단순하고 기타 등등.

그래서 식물을 사랑했다.

식물을 사랑하는 남자에게는 경계를 풀었다.

 

만약 나와 같은 이가 또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아뿔싸, 하고 이마를 칠지도 모르겠다.

우린 그동안 완벽하게 속아왔다. 아니 우리의 무지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여기 나온 50가지 식물(흔히 잡초라 불리는)들의 속사정을 낱낱이 들여다 보며 그러나

이런 고약한 것들, 괘씸한 것들, 앙큼하게도 나를 속여 왔어? 이런 기분은 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아슬아슬해 보이던 존재가 나름의 방어전략과 공격적인 전술을 갖추고

제 앞가림을 충분히 하며 거친 땅에 적응하고 진화해가며 살고 있다는 데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풀들의 생존전략이 얼마나 영리하고 과학적이고 기발한지 헛웃음을 자주 날리게 될 것이다.

 

일본인이 저자다.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초'들을 다루었다.

마찬가지로 일본인이 세밀화 형식의 그림으로 각 풀들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글을 읽으며 전혀 어색함이 없다.

같은 동아시아 권이라 식생이 비슷하고 어린 시절의 경험(몇몇 풀을 가지고 놀던)도 닮아 있는 탓이리라.

 

또한 거기에 더해 번역하신 '최성현' 선생의 공도 있을 것이다.

잊고 있었는데 이 양반, <바보 이반의 산 이야기>를 쓴 분이다.

오랜만에 책장에서 꺼내 이리저리 펼쳐 보다가 싱싱한 네잎클로버를 발견했다.

소나기 내리던 어느 해 초여름 풍경이 불쑥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덕분에 창밖 숲은 아직 하얗고 앙상하지만 내 마음은 벌써 봄이고,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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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미안해서 비행기를 탔다 - 오기사가 다녀온 나르시시즘의 도시들
오영욱 글.그림 / 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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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그의 책을 샀다.

그는 스스로에게 미안해서 혹은 누나한테 미안해서 비행기를 탔다는데 ...

 

 

 

 

 

나는 오기사한테 미안해서 책을 샀다.

2005년에 나온 첫 번째 책도 사고 2006년의 두 번째 책도 샀는데 2008년에 나온 책은 사지 않았다.

잠시 그에게 무심했다. 인정한다.

 

그의 처녀작 <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는 당시에 정말 참신한 여행기였다.

15개월간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그린 수평과 수직의 선들이 왜곡된 독특한 그만의 그림체와

대체적으로 간결하고 짤막한 그러나 재치있고 정곡만을 찌르는 글들로 이루어진 내용은

아마 모르긴 해도 그때까지 우리가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스타일이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첫인상이 좋았던 나는 건축가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에 머물면서 공부하던 시기를 그린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가 나왔을 때 환호했다.

내가 좋아하는 바르셀로나가 그의 펜 끝에서 어떻게 그려졌을지 무척 궁금했고 기대했고

삼청동 초입의 어느 북까페에서 열린 아담한 출판기념 모임에서 그를 만났다.

 

 

그때만 해도 20대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남동생 같았는데 어느덧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마 지금 마주친다 해도 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지만 그를 보는 내 시선은 누나에서 이모 정도로 진화했달까.

자동차에 달린 사이드 미러를 통해 보는 것처럼 가끔은 그가 실제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지곤 한다.

 

 

 

그래서 얼마 전,

오기사가 다녀온 세 가지 테마의 도시들 (욕망-라스베이거스, 일탈-인도의 찬디가르, 위안-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을 다룬

이번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새롭게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책들과는 다른 보다 진지한 책이 될 거라고 걱정(?)을 했는데, 반대로 나는 보다 진지한 그의 책을 기다렸었다.

언젠가 다른 매체를 통해 접한 그의 장문에서 블로그나 여행기를 통해 봐 왔던 단문과는 다른 색깔의 매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한테 미안해..>는 그의 말대로 한없이 진지하고 글자로 빽빽한 책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기대처럼 빽빽한 책은 아니었다. 이제 막 건물들이 들어서는 신도시처럼.

하지만 역시!

그다운 위트와 얄미운 깍쟁이 같은 문장은 여전히 나를 웃게 만들었다.

꿈에도 관심있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먼 도시들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 하나의 도시를 이런 식으로 해체해서 보는 방법도 있구나, 건축가다운 시각도 보았다.

수많은 팬들을 열광시키는 그림은 현저히 줄어든 대신 그 자리를 그가 직접 찍어 온 사진들로 채웠다.

그런데 사진들의 인쇄 상태는 도시의 매력이나 오기사의 시각을 돋보이게 할 만큼 매력적이지는 못했다.

라스베이거스와 찬디가르를 다룬 부분까지는 그 주제에 맞게

생활의 무게에 눌려 있던 내 안의 오래된 일탈 욕망을 자극하는 역할을 충분히 해 줘서

오랜만에 심장이 콩당콩당, 추억 속의 도시를 그리게 하고 꿈을 갖게 했다.

하지만 위안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룬 마지막 장은 붙박이처럼 묶여 있는 나를 위로하기에는 뭔가 역부족이었다.

다른 책의 인용보다는 오기사만의 색깔이 도드라졌어야 했다. 아쉽다.

 

 

 

 

 

그의 첫 번째 책에서 가끔씩 등장하던 오기사 그리고 오기사.

 



 

두 번째 책에서 일관성 있게 혼자 등장하던 오기사.

 


 

 

그리고 네 번째 책 찬디가르 장에서 집중적으로 등장하던 오기사 그리고 오기사.

 

 

헬멧을 쓴, 머리 크고 다리 짧은 오기사 캐릭터는 오래전부터 '오기사'라는 별명과 함께 유명한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가 그린 그림이 도심 까페의 벽, 어느 센스 있는 백화점의 여자 화장실, 젊은 감각으로 개업하는 캐주얼 음식점의 면면을 장식할 만큼

사랑 받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 헬멧 쓴 오기사는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여행을 떠나고

서슴없이 예쁜 여자를 밝히며

일기를 쓰듯 그림으로

하이쿠 같은 단문으로

스스로를 유창하게 표현한다.

 

 

그렇담 맨머리의 ㄹㄹㄹ레알 real 오기사는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나한테 미안해서...> 를 읽다가 문득

초기 여행기에서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 있던 오기사는

어느 새 헬멧 쓴 오기사와 자리가 역전된 거 아닌가, 싶은

수박 겉핥기 식이고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 식인 생각이 스쳤다.

 

이번 책은 그런 의미에서 서른 중반을 넘어선 건축가 오영욱의 변신의 욕구를 매우 조심스럽게 드러낸 것이라고

내친 김에 또 내 멋대로 짐작해 버린다.

 

완전한 변신과 기존 이미지 사이의 과도기적 방황이랄까?

사실 그건 변신이라기 보다는 건축가 오영욱의 본질이고 무시할 수 없는 큰 부분이지만 말이다.

 

하여 책을 쓰는 고충을 전혀 알 리 없는 나는 그에게 겁없이 무식하게 외친다~

 

오기사여,

그대가 꼭 하고 싶은 말이라면 '무겁고 진지하게 끝까지' 해 부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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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브루클린이라 불러주오 디 아더스 The Others 8
에두아르도 라고 지음, 고인경 옮김 / 푸른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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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에게. 

 

브o루o클o린!

과연 그렇구나. 네 엄마 말처럼 브루~클린, 너의 이름을 발음할 때마다 내 입 속에선 서로 다른 크기의 영롱한 비눗방울들이 음악처럼 튕겨져 나오는 느낌이구나. 너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대단히 아름다운 이름이고 네게 무척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해.

당연히 너는 나를 전혀 모르겠지. 나 역시 너의 존재를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단다.
그러다 책의 말미에 이르러 어? 설마.. 혹시.. 하는 기대가 생겼고 드디어 네가 스스로를 드러냈을 때 참 낯설면서도 반가운 마음이 일었지.  


특히 네 엄마의 과거를 마주한 너의 놀라움 - 코브라가 든 상자를 열었다가 깜짝 놀라 다시 닫아버린 후의 두근거리는 심장 같다던 - 그 충격을 지켜보면서 너와 아주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어.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은 거고.
 

브루클린.
사랑을 해 본 적 있니? 어쩌면, 잊지 못할 치명적 사랑에 빠지기엔 아직 이른 나이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얘긴 너에게 꽤 불편할 수도 있어. 하지만 갈이 네 엄마와 처음 사랑을 나누고 난 후 묘사한 문장은 내가 읽어 본 그 어느 러브신보다도 황홀하고 사실적이고 아름다워서 여기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그 순간 나는 공중에 붕 떠올랐다. 그녀의 피부에서 나오는 열기와 내 피부의 열기가 합쳐졌다. 세포와 세포, 표피와 표피마다 각기 달랐던 체온이 하나가 되었다. 그때였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내 운명이 영원히 그녀에게 매이게 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p. 169)

이건 비록 갈의 표현이긴 하지만 네 엄마도 똑같은 교감을 나눴을 거라고 확신해. 왜냐하면 이런 감정은 혼자만이 가질 수 있는 착각이 아니거든. 테크닉적인 오르가슴은 혼자서도 가능하고 그 어떤 상대와도 가능할 수 있겠지만 마음과 마음,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순간, 아니 갈의 표현처럼 소위 '세포와 세포'가 만나는 듯한 벅찬 희열은 상대와의 완벽한 교감 없인 절대 일방적으로 맛볼 수 없는 거거든. 한 사람의 일생에서 한 번쯤 그런 상대를 만난다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고 그러니 어쩌면 네 엄마 나디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다간 여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게다가 네 아빠를 만났잖니. 아까 편지 서두에 내가, 너의 존재가 몹시 낯설었다고 말한 거 기억하지. 그래. 네가 알다시피 네 엄마는 계속되는 유산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포기한 상태였어. 그래서 나도 네가 태어났을 거라곤 예상을 못했던 거고. 그런데 네 말처럼 나디아는 네 아빠에게서 그토록 갈구하던 안정감과 평화를 느낀 거야. 그런 게 가능하리라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내적인 고요까지도. 안정감과 평화, 내적인 고요, 이런 모든 것들이 단순히 물질적인 무엇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것쯤은 브루클린 너도 알겠지.

나는 네 엄마가 시달렸던 태생적인 불안감과 무의식적인 파괴본능을 이해할 수 있어. 그건, 나디아의 경우 거듭되는 유산, 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지만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띠기도 하거든. 일정한 내적 경계선을 침범하는 보다 친밀한 관계에 대한 파괴본능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둘러싼 평화와 안정에 대한 기질적인 반동일 수도 있고. 그래서 그들은 애써 쌓아 올린 신뢰나 애정, 관계의 탑을 어느 한 순간 (자기도 모르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무너뜨려 버리지. 마치 고여 있는 썩은 물 속의 물고기처럼 그 평화와 안정감이 그들에겐 죽음처럼 숨막히거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속에서만이 드디어 그들은 다시 도전의 의지가 생기고 관계 복구의 희망에 불타오르고 생명의 투지가 생기는 악순환인 거야. 

그 끔찍한 악몽을 끝내 줄 한 사람을 만났고 (그건 앞서 말한 갈과의 관계와는 또다른 의미의 희귀한 축복이지) 그 부인할 수 없는 증거로 너라는 선물이 태어났으니 얘야, 브루클린, 너는 자신을 한껏 자랑스럽게 여기고 사랑해도 된단다. 그리고 돌아가신 엄마를 맘껏 그리워하고 사랑하렴. 사려 깊은 넌 이미 그녀의 삶을 오롯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지만, 엄마의 기질을 많이 닮았다는 너, 나디아의 딸 브루클린, 언젠가는 그녀의 삶과 고통, 사랑 그리고 그녀의 '투쟁'이 '그녀만의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의 것'처럼 절실하게 와닿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거다. 그럼 네 속에 다른 형태로 살아 있는 나디아를 혹은 갈을, 브루클린을 느끼게 되겠지. 

뭐? 나에게도 세포가 녹아들어 하나가 되는 것 같은 그런 사랑이 있었냐고. 네 아빠 브루노 구비 같은 남자를 만났느냐고. 후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네 엄마 나디아는 참 복도 많은 여자다. 그 모든 사랑에 더해, 한 남자의 소설에 영감을 주는 뮤즈가 되기까지 했잖니.

음악가가 바치는 아름다운 선율의 주인공이 되는 것, 화가의 화폭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모델이 되는 것, 작가의 창작의 원천이 되는 쓰린 사랑 이야기의 여주인공이 되는 것, 여자들이 꿈꿀 수 있는 로망이긴 하지. 하지만 때에 따라선 그런 걸 바라는 것 자체가 '노망'이 되는 슬픈 경우도 있단다. 그 얘긴... 여기까지. 

만나서 반가웠다.
 

안녕, 브루클린

 
서울, 2011년 11월 27일

알,

당신에게도 브루클린 같은 도시가 있나요?
이처럼 많은 사연을 품고 있고 이처럼 깊은 애증이 배어 있는, 생명체 같은 도시 말예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게 브루클린은 그저 브루클린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알록달록한 실뭉치가 가득 든 바구니같이 느껴져요.
에두아르도 라고가 내 마음속 회색빛 도시에 색채를 입힌 거지요.

당신도 이 소설을 읽으면 분명 반할 거예요.
당신 덕분에 알게 된 여러 가지 소설 형식이 이 안에 들어 있거든요.
소설 속의 소설, 서간체 형식, 하나의 스토리 라인이 아닌 각각의 독립된 단편들의 병렬 배치, 그 어수선함을 나중에 크게 하나로 아우르는 끈.

올해 읽었던 쿤데라의 작품들과 내가 열광했던 라클로의 소설도 떠올랐는데
그것들보다 훨씬 복잡하고 헝클어져 있고, 친절하지 못한 책이었어요.
처음엔 도대체 정체가 뭐야, 하고 볼멘소리가 터져나오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신기한 건 그 중구난방 뒤섞여 보이는 거대한 털실 바구니 안에서 어느 새 내가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는 거예요. 굳이 실뭉치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려는 노력도, 엉켜 있는 실타래를 풀어 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은 채로 다만 각각의 색채에 빠졌을 뿐이에요.
[아마도 당신은 이런 나를 게으르다고 질책하겠지요]

어쨌든 그래서 소설은 연애 얘기도 됐다가 열애 얘기도 됐다가 지독한 이별 얘기도 됐다가 정치 얘기도 됐다가 한 사내의 기이한 죽음에 대한 얘기도 됐다가 브루클린의 역사 얘기도 됐다가 한 남자의 출생에 얽힌 비밀 얘기도 됐다가, 됐다가, 됐다가, 를 반복했어요.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결국 '한 작가의 이야기' 아니 '두 작가의 이야기'로 귀결되고 말았지요.

 
그래요, 알.
당신이 그러한 것처럼 나 역시 한시도 당신이 작가라는 걸 잊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난 당신이 갈이기보다는 네스터이길 빌어요.
아니, 갈인 동시에 네스터이기를 빌어요.

비록 내가
당신의 나디아가 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말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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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 농부가 세상을 바꾼다 귀농총서 13
요시다 타로 지음, 안철환 옮김 / 들녘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쿠바의 유기농업 기술이 흥미로운 것은 바이오 농약과 미생물 비료 등 최첨단 바이오 기술과 지렁이 퇴비나 윤작과 같은 전통 농법을 연계시켜 자재가 부족한 상황에도 당장 실천 가능한 적정기술을 개발했다는 점에 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지역마다 토착 재배기술을 훌륭히 개발함으로써 농가의 전통적인 지혜를 재발견하는 데 힘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식충개미를 이용한 단순한 방제 방법인 아리모도키조우 벌레를 이용한 방제법을 살펴보

자. 먼저 바나나의 줄기를 잘라 사탕과 벌꿀을 발라서 개미집이 있는 곳에 두면 개미가 단맛 대문에 줄기에 모여들게 되는데, 이번엔 이것을 고구마 밭에 가지고 가 햇빛이 쏘이도록 놔둔다. 그러면 개미가 따가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땅 속으로 굴을 파고 들어가서는 아리모도키조우의 유충을 먹어버린다. ( p. 103)

 

  쿠바는 분명히 1990년대 중반부터 식량위기에서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유기농산물이 국민 전체를 위한 것이지 비싼 고급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 p. 19)

 

  시장원리와 경쟁원리를 도입하지 않으면 생산 의욕은 높아질 수 없고, 그렇다고 시장원리에만 맡겨두면 노인과 결손가정 등 사회적 약자가 타격을 입게 된다. 이런 모순은 쿠바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든 마찬가지다. (중략) 농산물을 통째로 판매하면 큰 이익을 얻게 됨에도 불구하고 아바나의 도시농장과 시민농장 중 80퍼센트는 생산물의 일정 비율을 지역의 초등학교와 탁아소, 양로원 등에 무상으로 기부하며, 원예동호회도 생산량의 약 10퍼센트를 인근 학교, 노인동호회, 산부인과에 기부한다.  (중략).. "무상으로 토지를 빌리기 때문에 생산물의 일부를 커뮤니티에 환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p. 132~133)

 

  우리들은 님 나무를 밭의 북동쪽에 심었습니다. 바람을 이용하기 위해서였지요. 수분 발산 과정에서 님은 천연의 농약성분을 방출하는데, 바람이 불면 그 성분이 밭으로 퍼져갑니다. 생태적인 해충 방제의 한 방법이지요. (p. 181)

 

  지금까지 에너지는 힘 있는 자와 부자에게는 이익을 남겨주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게 만들고 부채를 떠맡겨 더욱 예속시키는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재생 가능한 대안 에너지, 그것이 태양열인데 태양열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무기일 수 있습니다. 햇빛은 누구에게나 다 공평하게 내리쬐어줍니다. 중국인, 흑인, 인디언, 백인, 노약자, 가난한 사람 그리고 돈을 가진 사람에게도 빛을 쬐어줄 만큼 그 마음 씀씀이가 넉넉하지요. 태양에 대해서는 봉쇄

도, 지배도, 파괴도 불가능합니다. 태양에너지는 인민을 위한 무기이며, 인간이 필요로 하는 참된 경제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p. 205)

  

  하향식 해결법이나 시장에 의한 해결법은 개인을 배제한 채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다를 게 없다. 이에 반해 '커뮤니티 해결법'은 개인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세계화라는것에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측면도 있지만 위험성이 커지는 측면도 있다. 지금까지는 정부와 대기업이 신용을 제공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불신이 아주 커지면 한계가 뚜렷해진다. 인간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커뮤니티에 신용의 '근거'를 두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 그래야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열릴 것이다. (p. 240)

  

  종전의 중앙집권적인 '복지국가'의 체제를 개조하여 의사와 환자와의 동반자 관계에 의해 개인의 자연 치유력과 커뮤니티의 힘을 이끌어내는 '자급적인 의료'로 전환을 꾀한 것이다.   (p. 247)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보장해주는 것에서 사회주의가 물러서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가 유지하고 싶어하는 사회주의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중략) 우리는 물질 분배에 대해서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무조건 신뢰하지 않아 시장의 힘이 여러 가지 일을 결정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의료, 주택, 교육 등 기본적인 인간의 필요에 대한 권리를 보호하려고 했을 때 시장의 힘으로는 지배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진리는 시장보다 위에 있고 생존권은 자유시장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분야에서는 유연하게 대응한다 해도 부의 분배에 있어서 만큼은 사회주의의 원리에 따른 엄격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p. 289)

 

 

  사회주의는 자원의 공평한 분배 이상의 것이어야 합니다. 체 게바라는 다만 물자의 재분배가 아니라 사람들을 소외의식으로부터 어떻게 해방시킬 것인가를 늘 고민했습니다. 기술관료technocrat와 관료bureaucrat기구가 공정하게 분배한다 해도 인간소외는 해방할 수 없습니다. 이는 체와 피델이 그려왔던 사회주의가 아닌 것입니다. 체가 추구한 것은 공업화의 진보로 사람들이 많은 소비품을 갖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윤리와 가치관에 근거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착취와 인종차별, 욕망에 근거한 자본주의와는 다른 가치관을 말이죠. 우리는 이 세계에 없는 종류의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p.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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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분이 가시고 난 후 인구에 회자되던 책들 중에 유독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지구 반대편, 정치적 이념마저도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수도에서 벌어지는 푸른 혁명은 그가 꿈꾸던 세상과 얼마만큼 닮아 있었을까, 내가 잠시 맛보았던 아바나의 유기농업은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어떤 세세한 무늬를 가진 것이었을까를 생각하며 책을 주문했었다. 쿠바에 가기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더 많은 것이 보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쿠바는 1959년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 이후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설탕과 커피를 국제 시가보다 월등히 높은 가격에 공산권에 수출하고 역으로 석유나 식료품, 화학 비료 같은 일상용품을 소련으로부터 헐값에 수입하는, 전적으로 소련
에 의지한 불안정한 유토피아였다. 결국 그들은 소련 및 공산권의 붕괴와 61년부터 시작되어 92년의 '쿠바 민주화법', 96년의 '헬무드 버튼 법'으로 심화되는 미국의 무자비한 대 쿠바 경제봉쇄로 인해 끔찍한 위기를 맞게 된다. 
 

  이 책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 심지어 생존에 필수인 의약품조차 공급받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그들이 사회적 약자를 최대한 보호하며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를 보여주는 보고서이다. 또한 어떻게 살아남는가와 같은 1차원적인 목표를 넘어서서,  생태보전과 생산성 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유기농업이란 틀 안에서 어떻게 동시에 달성하며 (p. 7),  교통혁명과 대체 에너지 개발을 통해 어떻게 생태도시로서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룩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범세계적인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현실에서 부딪힌 쿠바의 모든 것이 내게 그러했듯, 이 책에 일관되는 저자의 시각에 대해, 그들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는 아닐까와 그동안의 미국 편향적인 정보 접촉의 폐해로 인한 근거없는 의심이 아닐까 하는 양가감정이 교차하여 혼란스러워지는 고약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생존해온 이력,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은 우리의 현실과 비교해봤을 때 감동과 진지한 생각거리를 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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